94. 황궁 도서관에서 받은 상자
엘더러가 가져온 상자는 검은색의 금속 재질로 되어 있었다.
한 번에 주물로 만들어 낸 통짜 쇳덩어리처럼 어떤 접합 부위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뚜껑 같은 것도 없었다.
어떻게 여는 걸까?
“이것이 에할름이 남겨놓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윌리엄 공의 것입니다.”
엘더러는 금열쇠를 다시 내게 건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역시 상자를 여는 방법을 모르거나 아니면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상자를 이리저리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금속상자를 여는 열쇠인 모양인데 문제는 금속상자에 열쇠 구멍이 없다.
겉보기에는 그냥 통짜 금속 덩어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무게를 보니 설마 그럴 리는 없고, 연결부위조차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정밀하게 잘 만들어진 금속 상자임이 분명했다.
당겨도 보고, 비틀어도 보고, 밀어도 보고.
점점 세게 힘을 주며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어!
상자의 한쪽 모서리가 밀렸다.
눈으로 봐서는 전혀 틈을 볼 수 없었는데 모서리를 밀자 10cm 정도 밀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열쇠 구멍이 나타났다.
나는 홀린 듯이 열쇠를 꽂았다.
열쇠를 돌리는 순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여섯 면이 살짝 떨어지면서 분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각각의 면에는 커다란 유리관이 붙어 있었고, 드러난 상자 내부에는 몇 권의 책과 서류가 쌓여 있었다.
“억지로 부수려고 한다면 내부가 불에 타도록 만들어져 있는 상자입니다. 안에 들어있는 책과 문서의 가치가 너무 대단해서 허락된 자가 아니면 볼 수 없도록 장치한 것이지요.”
엘더러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관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책을 하나 집어 들고 내용을 드문드문 살펴 보았다.
서류도 읽어 보았다.
다시 책을 들고 목차를 보았다.
황궁 도서관 출신의 학자니까 그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책과 서류인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
학자가 무기나 보석을 남겼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에할름은 왜 내게 이런 것을 준 거지?
각 지역의 세수, 토질, 기후, 인구를 정리한 연감이라니.
이것은 황제 아니면 그의 비서관들이나 볼 법한 정보 아닌가!
더구나 비밀 결사와 각종 단체, 영향력 있는 개인을 정리해 놓은 문서는 어떻게 봐도 인재영입을 위한 사전 작업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마지막 시점이 모두 10년 전이라는 것 정도?
선제후에게 가져간다면 계승작위에 영지까지 얹어주며 환영할 만한 정보다.
“이미 눈치를 채고 계셨겠지만, 황궁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쌓아놓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황제가 통치를 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지요. 우리는 매년 각 지역의 인구와 물산, 풍토의 변화를 파악합니다. 각 지방별로 중요한 인물과 가계도 역시 기록합니다. 중요한 단체와 귀족들에 대한 기록은 따로 문서로 작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대 황제께서 서거하신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해왔습니다.”
제국 전체를?
가능할 리가 없는데?
중세의 기술력으로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기관의 설립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곳은 봉건제가 정치체제의 기본이니 행정조직을 이용한 정보의 수급도 불가능할 것이다.
엘더러의 저 말은 과장이거나······
아니, 또 이런 실수를!
여기는 지구가 아니다.
이곳은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다.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다.
지구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이미 지난 해전에서 당할 뻔 하지 않았나?
나는 책과 문서를 챙기면서 엘더러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에할름부터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전대 도서관장이었던 에할름은 뭐랄까 적극적으로 행동하자는 쪽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달랐지요. 어리석게도 그는 선제후를 믿었습니다.”
“은거한 것을 보니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군요.”
“그렇습니다. 윌리엄 공. 그는 배신당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모두 잃고 그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은거지에서 평생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속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린 그가, 그의 유산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윌리엄 공을 선택했다니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산을 이어받을 사람이 아니라 보관할 사람이겠지요. 그는 황궁 도서관도 불에 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말입니다.”
엘더러는 쓰게 웃었다.
“그분이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하시던 분이기는 하셨지요. 그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3백년 전의 내전은 끝난 것이 아니라 조금 오랫동안 멈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황궁 도서관의 사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관점입니다. 내전을 멈추게 했던 원인이 사라진다면 다시 내전이 시작되리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전의 불길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엘더러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에할름 다음으로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결국 4~5개 정도의 왕국으로 쪼개질 것으로 봅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은 이상 선제후들의 폭주를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까지는 나와 비슷한 전망이다.
선제후들 중에서도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힐 테니까.
그렇다면 칼마르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칼마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마르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덩치가 너무 작습니다. 쌓여있는 부가 있으니 오랫동안 버틸 수는 있겠지만 쪼개진 왕국들이 자리를 잡으면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나 역시 그의 분석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전망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황궁 도서관은 일종의 정보 기관이고 동시에 황제의 씽크탱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수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각종 정보를 모아서 가공하고, 황제에게 정책이나 전망을 조언하는 기관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보를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특징이 있다.
수동적이라는 것.
그들은 현재의 상태에서 미래를 전망한다.
개인의 상상력을 섞는 것은 금물이다.
매우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료가 우선인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현재로 미래를 예측한다면 패현의 건달패거리가 제국을 건설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을까? 탁발하던 땡중이 제국의 주인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칼마르의 덩치가 작아서 결국은 눌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면 덩치를 키우면 될 것 아닌가?
쪼개진 왕국이 자리를 잡으면 위험하다고 하니 자리를 잡지 못하게 방해를 하면 될 것 아닌가?
물론 황궁 도서관의 예측과 달리 황제가 선출되면 이 모든 걱정이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황궁 도서관의 예측대로 내전이 시작된다면, 바로 곧 난세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허용되는 시대.
지난번에는 5년 만에 목이 잘리고 끝났는데,
이번에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해 졌다.
*
전통이나 권위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생기기도 한다.
처음에는 억지와 거짓말로 꾸며진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흘러간 세월을 장식으로 두르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믿기 시작한다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전통이 되고 권위가 되는 것이다.
황도에 자리 잡고 있는 기관들이 그랬다.
3백년 동안 황제를 보좌하며 권력의 한 축으로 지내다 보니까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당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황제 공위 기간이 5년을 넘고 10년째에 이르게 되자 사방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본격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영주들에게 할당된 세금과 부역이 황도에 올라오는 것.
황도의 재판관이 내린 판결에 영주가 따라야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점점 무시당하기 시작하자 황도의 관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권력이 황제에게서 나온 권력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전통과 권위, 법률을 들먹이는 관리도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상황파악이 된 관리들은 황제 없이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자신들의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황도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황도의 관리에게도, 제국에게도 안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내일이 귀족 전체가 모이는 대회의가 있는 날인데 아직도 황제 선출을 위한 합의가 지지부진한 겁니까? 치안부감”
“그렇습니다. 행정보좌관님. 선제후들은 극도로 발언을 꺼리고 있습니다. 누가 황제로 입후보할지조차 아직 합의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뱅트손 공작은 여전히 5살짜리 손자를 입후보자로 내세우고 있는 겁니까?”
“예. 뱅트손 공작 뿐 아니라 스케티 공작 역시 2살짜리 손자를 입후보자로 내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작자들이 다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혹시 아르보그 공작에게서 다른 말이 없습니까? 그는 나설 만도 하지 않습니까?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칼손 아르보그 공작도 지슬리 공작처럼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지슬리 공작이야 전부터 입후보할 생각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지만 아르보그 공작의 태도는 의외입니다.”
“이런. 뭔가 문제가 생기긴 생긴 모양인데.”
황도의 실무 관료로는 가장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보좌관은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선제후들이 누구를 황제로 뽑을지 합의를 하려고 들지 않는다니!
가장 유력한 후보 가문 둘은 상상 이상의 후보를 내놓은 후 대놓고 대립을 하고 있고, 다른 선제후들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다.
이러다가 충돌이라도 벌어지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원래 황제를 뽑는 선거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을 하나로 묶는 장엄한 예식의 한 절차로 황제에게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선제후 제도가 성립된 이후 황제는 언제나 사전합의를 통해 선거로 확정이 되었고, 제국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분의 부재가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는 지금 선제후들은 황제라는 상징을 존중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내각의 멍청이들은 뭐 하고 있답니까? 치안부감.”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전대 황제 폐하와 뱅트손 공작과는 사촌이기도 해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황제가 선출되면 그는 자신을 보좌해 줄 가신들을 이끌고 황도로 들어 온다.
그리고 그 가신들이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실무 조직에 명목상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다.
당연하겠지만 새로운 황제가 선출될 때마다 전대 황제를 보좌하던 가신 출신 관리들은 싹 물갈이가 된다.
그런데 지금은 황제 공위 상황.
전대 황제를 보좌하던 가신들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황도를 통제하고 있다.
만약 이들이 노골적으로 뱅트손을 위해 움직인다면 다른 귀족들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몸을 사리는 것이 당연하기는 한데, 과연 끝까지 그럴까?
행정보좌관은 과연 내일의 대회의가 정상적으로 돌아갈지 의문이었다.
대회의까지 12시간도 남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