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3화 (93/248)

93. 황도

황도는 처음 방문해 본다.

황도뿐 아니라 중간에 거친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칼마르 백작령과 그 주변부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지구에서 세계 각국을 누볐던 상사맨이 이 곳에서는 지방 촌놈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네아도, 대부분의 기사도 황도는 처음이었다.

이럴 때 실감한다.

지금 이 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물론 우리와 같이 온 용병은 예외다.

일부러 황도나 그 주변부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용병대를 구성했고 나머지 사람들 역시 되도록 지리에 밝은 축으로 채워넣었다.

만약 황도를 탈출해서 칼마르로 가야 한다고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온 용병 백인대는 황도 근교의 소도시에 주둔시켰다.

아예 커다란 농장을 하나 미리 사들여서 병영을 만들어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용병들을 편하게 대기시킬 뿐 아니라 말과 무기까지 충분히 비축해 둘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좋지만 좀 지나치지 않느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반론을 무시하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아내의 권리에 의한 통치라는 권력이 내게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큰맘 먹고 혈통에 의한 권위 부여라는 치트키를 처음으로 사용해 본 것이다.

너무 편했다.

왜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며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였다.

리네아 역시 내 준비에 대해 찬성이었다.

오히려 더 준비해야 할 것은 없는지 따로 챙길 정도였다.

병영에 무기와 말을 추가로 비축해 둔 것도 그녀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리네아도 우리의 황도 방문이 불안한 것이다.

황도 근처까지는 이렇게 용병대라도 끌고 올 수 있지만 모두 황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데려갈 수 있는 호위 병력은 10명에 불과하다.

황도 자체의 치안 유지 병력이 있지만 그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제후들 중 유력한 자에게 포섭되어 손발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니 선제후들을 3백년 동안 억제하고 있었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면, 이렇게 소수의 병력만을 호위로 거느리고 황도에 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생각해 보라.

선제후가 8명이나 있다.

단 한 명만 이상한 생각을 가져도 대형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인질이 될 수도 있고, 위험하다고 판단되어서 제거당할 수도 있다.

칼마르뿐만 아니라 황제 선출 의식에 참가하고 증인이 되기 위해 황도에 온 모든 귀족이 다 그런 처지다.

어쩌면 선제후조차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선제후들은 확실히 알 테고, 그들과 가까운 대귀족 정도는 알 수도 있겠다.

황궁의 관리들 중 일부도 알 것이다.

어쩌면 그들과 상부상조하는 귀족들에게 살짝 귀뜸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짜로 그럴까 싶은 생각도 든다.

칼마르는 선제후의 가까운 측근까지도 협력자로 포섭해서 내부의 비밀까지도 빼낼 정도였다.

그런 귀족조차 8명의 선제후를 동시에 억제해서 황제를 투표로 뽑도록 강요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것은 에할름의 말이 모두 망상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없어요. 윌리엄.”

리네아는 끙끙거리는 나를 보고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우리는 3백 년의 동안 이루어진 전통에 기대어 우리를 보호하면 됩니다. 그런 존재가 실존을 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요. 3백년 동안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가 평화스럽게 이루어져 왔다고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

3백년 동안 황제 선출 투표가 이어졌지만 사고가 터진 적은 없었다.

적어도 크게 드러난 사고는 없었다.

그렇게 3백년의 세월이 쌓아온 전통을 믿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 전통이 허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통을 깨는 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리네아는 만약 독립을 꿈꾸는 선제후가 있더라도 시작부터 자신의 명분과 세력을 깍아내고 시작할 리 없으니 쉽게 사고를 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황성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병력 파악에 신경을 썼다.

*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

거대하고 역사도 오래된 국가다.

제국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국가 하나가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국으로의 역사는 5백년에 불과하지만 그 전신이 되는 왕국까지 포함한다면 1천년은 한참 넘는다고 한다.

전설과 역사의 구분이 모호한 부족 국가 시절까지 올라가는 것은 빼고도 말이다.

그리고 좀 웃기는 이야기는 제국명 앞에 신성이 붙는 것을 보면 제국이 매우 종교적인 나라일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신성이 가장 앞에 붙은 것은 제국의 원류가 되는 왕국의 초대 국왕이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신성을 붙였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계속 이어져내려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국에서 제국으로 변하고, 왕이 세습 황제가 되고, 세습 황제가 선출 황제가 되는 그 변화 속에서도 신성 마르스홀롬 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제국의 사람들은 오래 묵은 국가의 국민답게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황도는 별도의 도시명이 없다.

그냥 황제의 도시.

황도다.

처음에 건설 될 때부터 별도의 도시명이 없었으니 지금도 없는 것이다.

황도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계획 도시다.

선출된 황제가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다양한 기관과 단체가 자리 잡고 있다.

치안을 목적으로 하지만 황도 직속의 기사와 병사들까지 존재한다.

모두 황제의 명령만을 듣는 자들이다.

처음부터 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불리하고 통치에도 비효율적이었기에 투표로 선출된 초대 황제는 황도의 건설에 매우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선출직 황제니까 자신의 본거지에서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이 황제 개인에게는 오히려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통합이나 선제후들 간의 균형을 생각해 본다면 특정 선제후령의 중심 도시를 임시라도 제국의 수도로 만드는 것은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임시로 선택된 황도가 몇십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진짜 황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출된 황제는 황도의 힘을 가지고 세습을 시도할 것이다.

내전을 멈추고 제국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선제후 제도를 만들고, 선출직 황제를 옹립했는데 또다시 새로운 내전의 불씨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미온적이다못해 어기적거리며 딴지까지 걸어대는 초대 황제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황도를 건설했다고 한다.

초대 황제의 사망 이후에야 황도 건설에 속도를 붙어서 2대 황제 치세에 황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역대 황제는 모두 황도에 머무르며 제국을 통치했다.

*

“오면서 본 황도의 모습은 정말 대단했어요. 칼마르 시와는 감히 비교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중심 도시인데 칼마르 시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윌리엄. 황제의 통치는 통치가 아니라 조율에 가깝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도시까지는 필요 없는 것 아닐까요? 이곳으로 제국의 재화와 인재가 집중되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제국 정도의 규모가 되면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조율로 통치를 대신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율을 하려면 그에 어울리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황제라는 직위만으로는 부족했을 겁니다. 황제라도 하더라도 8명의 선제후 중 하나가 투표로 선출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아마 저 거대한 도시는 부족한 황제의 권위를 보충해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내 말에 옆에서 불쑥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흥미로운 말씀들을 나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역대 황제는 통치를 하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조율을 하는 것에 그쳤지요. 그런데 백작부군께서는 통치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직접 통치를 하기에는 제국의 영역이 너무 넓습니다. 직접 통치가 가능한 영역은 왕복 1주일에서 한 달 사이의 거리, 그 가운데 어디쯤일 겁니다. 정확한 것은 통치자의 역량과 지형이 좌우하겠지요.”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과연 도서관의 건설을 생각하실만하군요. 저는 황궁 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엘더러입니다.”

“저는 칼마르의 백작인 윌리엄입니다. 이쪽은 칼마르의 여백작이신 리네아 칼마르 공이십니다.”

“두 분 백작 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와 리네아는 황궁 도서관을 방문하는 중이었다.

펜던트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러나 비밀을 풀자고 황궁 도서관의 아무에게나 펜던트를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에할름의 말이 진실이라면 펜던트가 가지는 중요성이나 기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황궁 도서관의 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칼마르에도 백작의 개인 도서관 정도가 아니라 별도의 건물과 학습기관이 딸린 대형 도서관을 짓고 싶으니 충고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해서 말이다.

돈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니 황궁 도서관에서도 흥미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역시 면담 요청을 한 다음 날 바로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래서 황궁 도서관의 손님맞이방에서 관장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궁 도서관의 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더러는 장년의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좀 더 많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 도끼 정도는 충분히 휘두를 수 있는 팔뚝을 가진 자였다.

평생을 책상에 앉아서 책만 보던 사람은 분명 아니다.

우리는 황궁 도서관에 있는 장서의 일부를 필사해가기를 원했고, 황궁 도서관 출신의 사서를 고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물론 그 대신 막대한 액수의 황금을 약속해야 했다.

이것은 명품과 명품의 생산과 보관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을 패키지로 사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래였기 때문이다.

인쇄기술이 없는 이곳에서 책은 사치품이고 명품이다.

“저로서는 칼마르의 제안이 반갑기만 합니다. 황제 폐하가 계시지 않으니 황궁 도서관의 재정에도 문제가 생기더군요. 처음 겪는 일이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칼마르에서 좋은 제안도 받고, 조만간 황제공위의 불안한 시대도 끝날 것 같으니 마음 속의 커다란 돌덩어리를 내려놓는 기분입니다.”

“칼마르의 입장에서도 이처럼 저희의 제안을 반겨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공식적인 면담의 명분이 끝났다.

그제서야 나는 목걸이를 걸린 펜던트를 풀어서 엘더러 앞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엘더러는 자신의 앞에 놓인 펜던트를 보더니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에할름 경으로부터 선물 받았습니다. 황궁 도서관으로 가져가라는 말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시더군요.”

내 말을 들었음에도 엘더러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대신 펜던트를 돌려서 금열쇠를 꺼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시오.”

잠시 후 그가 가져온 것은 커다란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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