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8화 (88/248)

88. 선제후 지슬리

항구에는 흰색의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도 잘 보이라고 3개씩이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백기가 맞나?”

“예. 남작님. 흰색 맞습니다.”

“설마 항복하자는 것은 아니겠고. 게스티 백작이 미쳤나? 자신의 함대가 박살 나는 꼴을 육상에서 다 봤을 텐데 이제서야 대화를 하자고? 이 자가 진짜 뭐 하자는 거지? ”

“연락선이 하나 나옵니다!”

백기와 지슬리 공작의 깃발이 함께 나부끼는 작은 배 하나가 항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니 잠깐.

그리고보니 게스티 백작의 깃발이 없다.

지금 오고 있는 저 연락선 뿐만 아니라 항구에도 게스티 백작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다.

지슬리 공작의 깃발이 곳곳에 걸려 있을 뿐이다.

그 이외에는 따로 걸려 있는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다.

이거 상황이 이상한데?

게스티 백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연락선에서 내 함선으로 올라온 사람은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는 남작이었다.

전령으로 남작을 보내다니!

우리 쪽을 대하는 지슬리 공작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내게 전언을 가지고 온 남작부터가 동격의 남작이 아니라 고위 귀족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사실 남작 작위를 가진 행정관리와 영지를 가지고 있는 남작은 칭호만 같지 사실상 다른 종류의 귀족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도 있으니 쉽게 대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내게 게스티 백작이 해적과 손잡은 혐의로 지슬리 공작에게 체포되었고, 현재 세라빅은 지슬리 공작이 직접 끌고 온 병력에 의해 점령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역시나!

게스티 백작은 자신의 모시는 주군에게 버림당했다.

처음부터 각 잡고 들어간 설계에 당한 것인지 아니면 일이 굴러가다 보니까 숙청해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 되어서 숙청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스티 백작이 끝장이 났다는 것은 확실한 듯 싶다.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된 우리는 전투 준비 대신 항구의 한 쪽에 정박한 채 재정비에 들어갔다.

나는 헬문트 시장과 함께 선제후 지슬리 공작을 만나기 위해 그가 머무르고 있다는 시내의 저택으로 향했다.

게스티 백작이 세라빅에 머물 때 거처 겸 집무실로 썼다는 저택은 지금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택 내부에는 모퉁이마다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지슬리 공작령에서 온 관리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와 헬문트는 전령으로 왔던 남작의 안내를 받아 지금 지슬리 공작이 있다는 커다란 방으로 향했다.

선제후 지슬리 공작은 탄탄한 몸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거인 혼혈이었던 아르보그에는 못미치지만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육체로는 특상급이었다.

특히 근육이 두드러지는 두꺼운 팔이 인상적이었다.

“윌리엄 남작. 만나서 반갑소. 첫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 않아서 유감이긴 하지만 앞으로 사귈 시간이 많겠지.”

“지슬리 공작 각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공작 각하를 모시고 사냥이라도 나가고 싶습니다만 아직 전투 후의 마무리가 끝나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저런. 아직 뒷정리 중이었군. 전투가 끝나고 난 후가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 바빴을 텐데 이렇게 인사까지 오다니 경의 배려에 감사하네.”

“바쁜 것은 병사들이겠지요. 그런데 게스티 백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작자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선제후 지슬리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게스티 백작은 지슬리 공작과 같은 파벌의 귀족이고, 봉신 계약까지 한 귀족이었다.

그것도 백작이라는 고위 귀족에 항구 도시를 영지로 가졌으니 파벌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는 큰 영향력을 가진 자였다.

게스티 백작이 사고를 친다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게스티 백작은 사고를 쳐도 엄청난 사고를 쳤다.

해적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사실 밝혀지지 않았다면 문제는 없다.

밝혀졌어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다면 역시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작에게 그런 영향력은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게스티 백작의 군대는 박살이 났고, 연합군을 결성한 해상 교역로 상의 여러 도시들은 배상을 요구하며 세라빅까지 몰려왔다.

게스티 백작의 주군이라고 할 수 있는 지슬리 공작은 이 모든 사태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원만하게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게스티 백작은 해적과 손을 잡고 선량한 상인들을 약탈한 혐의가 드러나서 체포되었네. 아무래도 귀족이니까 생포된 해적처럼 교수대에 목을 매달지는 않겠지만 노역형은 피할 수 없을 걸세. 아마 어딘가의 광산에 가서 죽을 때까지 곡괭이질이나 하게 되겠지.”

“배상이 필요합니다.”

“만족할 정도는 안 되겠지만, 게스티 백작이 가진 개인 자산을 압수해서 분배하겠네. 자네 쪽에서 포로로 잡은 자들에 대한 처분 권한은 손대지 않도록 하지. 대신 나포한 배는 돌려주게.”

“그것은 곤란합니다. 나포한 배는 우리 소유입니다.”

내가 지슬리 공작의 요구를 거절하자 곧장 옆에서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윌리엄 경. 배를 그냥 가져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내 조카인 컷허드일세. 항구 도시인 마함의 영주지. 그의 지불 능력은 내가 보증하도록 하겠네.”

건장한 몸, 두꺼운 팔, 비슷한 얼굴. .

지슬리 공작의 친척, 그것도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따로 소개를 받지 않아도 알겠다.

지금 이 자리에는 컷허드 말고도 지슬리 공작과 닮은 꼴인 덩치가 셋이나 더 있다.

모두 눈을 반짝이며 대화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상세한 것은 옆에 있는 헬문트와 의논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자네는 좀스럽게 굴지 않아서 좋군. 잘 안 맞는 사람과는 끝까지 잘 안 맞더군. 어쨌든 이번 일로 인해 손해가 막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 덕분에 골칫거리를 치워버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는 부분도 있다네.”

잘 안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 게스티 백작이겠지?

공개 석상에서 이런 취급이라니.

아무래도 게스티 백작의 복권은 힘들 듯 했다.

그가 광산에서 인생을 마칠 확률이 갑자기 껑충 뛰었다.

“공작 각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 역시 기쁘게 생각합니다.”

“직접 경험하니 대단하기는 하군. 칼마르의 검. 경이 사태를 파악하고 정리하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두 달이야. 믿어지지 않는군. 솔직히 말해서 한때는 게스티가 성공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경이 나서니까 순식간에 정리가 되는군. 비결이 뭔가?”

아! 토사구팽 맞네.

이 경우는 성공한 것이 아니고 실패한 것의 꼬리를 잘라버린 것이니까 좀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런데 게스티 백작, 광산까지 갈 수나 있을까?

이런 상황이면 가는 중간에 ‘사고’로 죽는 것 아냐?

“아시겠지만 바다에서 개인적인 능력은 별로 의미없습니다. 적보다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함선.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깁니다.”

“윌리엄 경은 모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 그래.”

“개인적으로는 모험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는 주의지만 군을 이끌 때는 모험같은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봅니다.”

“너희들 들었지? 윌리엄 경의 말을 잘 새겨 들어라. 특히 컷허드. 그동안 불만이 많았겠지만, 어떠냐? 네가 게스티 백작보다 더 나았을 것 같더냐?”

이제는 숨기지도 않는다.

가능성만 있었다면 해상 교역로를 장악했을 거라는 말을 대놓고 한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접는 수순이니 이렇게 다 터놓고 이야기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윌리엄 경. 앞으로 우리가 해상 교역로를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습니까? 게스티 백작이 해적과 손을 잡기까지 해서 배를 모는 상단이라면 다들 의심스럽게 쳐다보지 않겠습니까?”

이제 지슬리 공작령에서 배를 이용한 상거래 담당으로 유일하게 남은 컷허드는 앞으로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는 칼마르의 사면이 필요해 보였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컷허드 경. 우리 쪽에서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따로 불이익을 주지는 않겠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익이 급한 자들부터 손을 내밀 테니 그때부터 잘해 나가면 될 겁니다.”

지슬리 공작은 내 말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앞으로 우리의 입장은 간단하네. 해상 교역망에 우리를 끼워주면 돼. 이제 해상 교역망을 지배할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말해서 손에 넣어보겠다고 한 번 시도한 것은 사실인데 그거 잘 안되더군. 듣던 거하고 달랐어.”

“계속 그런 생각이라면 우리는 좋은 거래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나는 말이야.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아. 사람이 부족하거든. 산에서 금속을 캐는 것만으로도 손이 부족해. 알아보니 바다에서 쓸만한 전력을 양성하는 것은 한 세대는 걸리는 일이라더군.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으면 모를까 들어가는 돈을 감당할 수 없어. 아무리 우리가 광산으로 자금을 축적했더라도 그것은 무리야. 게스티 백작은 내게 거짓말을 했어.”

이번에 벌어진 일은 결국 게스티 백작이 잘못을 했으니까 모든 책임을 지고 끓는 솥에 들어가는 것으로 지슬리 공작의 양심 속에서도 결론이 난 모양이다.

결정권자야 지슬리 공작이었겠지만, 실제로 일을 진행한 것은 게스티 백작이니 아주 억지는 아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자들을 둘러 보았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딱 봐도 같은 핏줄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덩치만 큰 가족기업이었던 것이다.

전문경영인은 두 번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고.

한가족 경영 무섭네.

“윌리엄 경이 컷허드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내가 경의 호의에 대한 대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자네도 알겠지만 3백 년 전 내전 끝에 8명의 대귀족은 선거로 황제를 뽑자는 제안에 합의를 했다고 하지. 그런데 그런 제도는 이전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해. 가문에 내려오는 기록을 보면 부족민이 다같이 모여서 부족장을 뽑는 야만족도 아니고 선거로 제국의 황제를 뽑는다니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도 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결국 선거로 황제를 뽑는데 모두 합의했지. 제국은 지금까지 3백 년을 그렇게 살아왔어.”

지슬리 공작은 내게 몸을 숙였다.

“그런데 경에게 하나 묻지. 선거로 황제를 뽑자는 제안을 누가 했을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8명의 대귀족 중의 하나가 그런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전으로 제국이 망할 정도로 싸워댔다는데 8대 귀족 중의 하나가 아예 낯선 제도를 제안해서 정착시킨다고?

이거 가능한가?

대답을 못하는 나를 보고 지슬리 공작이 스스로 대답했다.

“그래. 아니야. 선거 제도는 선제후가 된 8명의 귀족 중 하나가 제안한 것이 아닐세.”

지슬리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얼마 전부터 세력이 약한 선제후들이 무리한 짓을 하고 있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선거 제도의 제안을 누가 했는지 알아보게. 자네에게는 흥미로울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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