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87화 (87/248)

87. 세라빅 해전의 끝

이번에는 방어였다.

두 척의 함선이 거의 동시에 내가 타고 있는 전투함으로 달려들었다.

이미 한 번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우리였다.

이번 전투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기세를 올렸다.

“온다! 온다! 온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갑판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적의 함선이 충각 돌격을 감행했다.

조타수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두 척의 함선이 동시에 달려드는 데는 방법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정통으로 함선의 옆구리는 피했지만, 충돌 자체는 피할 수 없었다.

함선이 부서질 정도의 충돌이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탄 전투함이 가운데 끼어버렸다는 것이다.

두 척의 배에 탄 적들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었다.

갈고리 쇠사슬과 그물이 양쪽에서 날아왔다.

바싹 들이댄 뱃전은 충격으로 인해 부서져 나갔지만, 갈고리 쇠사슬과 그물은 세 척의 배를 마치 한 척의 배처럼 단단히 얽어맸다.

기다렸다는 듯이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이 뱃전을 넘어왔다.

아무래도 적의 숫자가 월등했기에 이번 전투의 주전장은 내가 있는 전투함이 되어 버렸다.

갑판 위는 아군과 적의 피로 이미 미끄러웠다.

그 위에 새로운 피가 뿌려졌다.

“해적을 죽여라!”

“바다의 아들들아! 복수다! 해적에게 죽은 형제들을 기억하라!”

“우리의 도시를 지켜라! 우리의 가족을 지켜라!”

“우리가 무너지면 세라빅이 불탄다!”

양 쪽 다 필사적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각자의 명분을 외치는 병사들은 서로에게 무기를 들이댔다.

나는 뱃전에 서서 넘어오는 적들을 향해 쇠막대기를 휘둘렀다.

넘어오는 동안 제대로 방어할 수 없는 적은 쇠막대기를 휘두를 때마다 어딘가가 부러지며 바다에 빠졌다.

특별히 재수가 없는 자는 일격에 즉사해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뱃전에 걸쳐지기도 했다.

“씨발! 괴물아 죽어!”

드디어 기사라고 할 만한 자가 등장했다.

게스티 백작은 자신의 기사를 너무 아껴서인지 바다 위의 전투에 내놓지를 않았다.

이렇게 몇 안되는 간부 선원이 분을 못 참고 튀어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긴 창을 든 그는 평지처럼 갑판 위를 뛰더니 뱃전 넘어 내게 일격을 가했다.

작은 원을 그리듯 빠르게 움직이는 창촉이 내 가슴을 노리고 찔러왔다.

쇠막대기로 창을 쳐내면서 그대로 적의 팔을 후려쳤다.

내 쇠막대기는 질량 병기나 다름없다.

인간의 팔뼈 정도는 가볍게 후려치는 것만으로도 부러뜨릴 수 있다.

만약 그가 철제 갑옷을 입었다면 뼈가 부러지는 일까지는 없었겠지만 지금 배 위에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나무나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다.

적은 왼쪽 팔뼈가 부러지며 창을 놓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적의 절망어린 눈빛을 바라보며 강하게 내리쳤다.

십여 명에 달하는 적 병사가 차례로 쓰러지고 기사급의 간부 선원마저 일격에 죽어 나가자 내가 있는 쪽으로 오는 병사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곧장 양쪽의 병력이 뒤엉켜 있는 갑판으로 향했다.

일격에 목숨 하나.

최대한 화려하고 잔인하게 적을 학살했다.

우리쪽 병사는 다리클리프 특산 나무 갑옷 덕분에 잘 안 죽는 데다가 나까지 날뛰니 적들의 동요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불이 붙은 기름단지를 던지며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돛을 노리고 불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백병전으로는 손해가 너무 크니 전투함의 기동력을 빼앗아 버리려는 심산이다.

“모래를 끼얹어!”

젖은 천막과 모래로 불을 꺼서 배를 화재로 잃는 일은 면했지만, 적의 불화살에 돛은 못쓰게 되어 버렸다.

다행히 노는 대부분 멀쩡하고 예비 노도 가지고 있다.

만약 노까지 잃어버리면 우리는 전투에서 탈락이다.

전체적인 전투 상황은 별로 낙관적이지 않았다.

적의 수가 우리의 두 배는 되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왜 우리만 싸우고 있는 거지?

지금 우리는 전투함 6척만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서 게스티 백작의 함대 전체와 싸우는 중이다.

나머지 우리 편은 뭐하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나머지 함선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건가?”

나는 선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선장은 아직도 거리가 상당한 우리 편의 나머지 함선을 가리키며 맞고함을 질렀다.

“바람이 이상합니다! 남작님. 계속 맞바람이에요. 이거 말도 안 됩니다!”

나는 기어오다시피 하는 우리 쪽 함선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전투함만 싸우고 있으면 진다.

아직은 기세가 죽지 않았지만 이렇게 2배가 넘는 적과 계속 싸우면 질 수 밖에 없다고!

게다가 돛을 이용하는 배는 아무래도 움직임이 자유스럽지 않다.

지금처럼 백병전으로 해전을 끝내는 시대에서는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다.

이놈들 설마?

나는 돛대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한 눈에 적 함선이 다 눈에 들어왔다.

게스티 백작의 함선들은 둘로 나누어져 있는 연합군의 함선을 각개격파를 하겠답시고 우리편 전투함 주변에 다 몰려 있었다.

한 척만 빼고.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마법과 기적이 환상이고, 거인과 늑대인간이 이야기 속의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세상이 아니다.

이곳에는 신비가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곳의 사고방식이다.

대개의 경우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나는 다리클리프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바람을 움직이던 여자.

별 것 아님 산들바람이기는 했지만 만약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바람이 산들바람 정도가 아니라면?

나는 홀로 떨어져 있는 적의 배에 집중했다.

역시 다르다.

뭔가 달랐다.

저 곳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선장! 배를 움직여! 우리는 저 곳으로 간다!”

선장은 내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내 명령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눈치챈 선원들은 부상이나 사망으로 자리가 비어버린 노꾼의 자리에 앉아서 함께 노를 저었다.

나는 돛대에서 내려와서 뱃머리로 이동했다.

이제 전투병력은 절반 이하.

그나마도 대부분 부상병이다.

전투함 하나 정도는 더 잡아먹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그러니까 뒤처진 우리 편이 어서 와야 한다.

따로 떨어져 있는 적의 배에 가까이 갈수록 내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문제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적의 배의 선수에 한 여자가 팔을 옆으로 벌리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가 앞을 향해 바람에 날리고, 펑퍼짐한 옷은 맹렬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태풍같은 바람이 그녀의 주변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탄 배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바람의 시작점이 그녀가 되는 듯한 장면이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원인이다.

“발리스타는?”

“두 개 다 고장입니다. 부속이 없어서 수리는 안 됩니다.”

발리스타 사수는 창병으로 전직한 지 오래였다.

두 차례의 전투를 연속으로 겪으니까 멀쩡한 것이 없다.

결국 내가 해야 하나?

투수가 전력으로 야구공을 던지면 100미터가 넘게 날아간다.

비도는 던지기에 숙련된 병사가 던지면 200미터를 날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저 여자와 나 사이의 거리는 못 잡아도 300미터는 넘는다.

내가 인간 중에서 MAX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저 거리를 던질 수 있을까?

200미터를 던진다는 병사도 10년은 훈련한 숙련병인데?

그런 자보다 100미터를 더 던진다고?

고민할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저 여인이 탄 배와 내가 탄 전투함 사이를 가로막기 위해 게스티 백작의 전투함 하나가 미친듯이 노를 젓고 있었다.

거리도 얼마 안 남았다.

저 전투함이 가로막기 전,

저 여인과 나 사이가 가장 가까울 때,

그 때를 노릴 수 밖에 없다.

타다닥!

경호를 맡은 용병이 내 옆에 대형 방패를 세우자마자 화살이 연달아 날아와 박혔다.

그러나 내 신경은 오로지 저 멀리 있는 저 여인에게 가 있었다.

왼쪽 상완에 감아놓은 비도집에서 비도를 뽑았다.

하나를 던지고,

다시 하나를 던지고,

다시 하나를 던졌다.

12개 한 묶음으로 되어 있는 비도집이 순식간에 비어버렸다.

그리고 적의 함선이 전투함의 앞을 가로막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전투함의 앞을 가로막은 적 함선의 앞부분이 깨어졌다.

우리 쪽 전투함은 멀쩡했지만, 전투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갈고리 쇠사슬과 그물이 날아온다.

다시 백병전인가?

이번에는 오른쪽 상완에 감아놓은 비도집을 풀 차례였다.

12개의 비도가 날아가며 12명의 목숨을 거두어 들였다.

나는 손에 쇠막대기를 쥐었다.

질려버린 적의 눈알이 바로 앞에 있었다.

*

고통스러웠다.

윈나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통증이 머리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칼로 머리 속을 헤집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세라빅의 가족을 생각한다면 버텨야 했다.

눈 앞의 적들을 모두 처리할 때까지.

이미 3척의 배가 불에 타거나 노를 모두 잃은 채 표류하고 있었다.

아직도 싸우고 있는 3척의 전투함만 제압할 수 있다면 쉴 수 있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

바람이 적을 향해 맹렬하게 불었다.

신비에 기대어 바람의 방향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지만 점점 힘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팔을 옆으로 크게 벌리고 신비를 향해 호소하지만 바람의 힘은 점점 약해졌다.

그래서 무리를 하고 무리를 했다.

아무 생각없이 바람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무엇인가가 그녀를 건드렸다.

섬찟!

피부의 솜털까지 바싹 곤두서는 느낌에 그녀의 정신이 바람 사이에서 풀려나왔다.

짧고 작은 칼이 그녀의 바로 발 앞에 박혀 있었다.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에 뺨에 손을 대어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뺨을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다.

그녀가 보고 있는 동안 짧고 작은 칼이 연달아 날아와 그녀의 앞에 박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그녀의 허벅지에 박혔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소녀는 노인이 되어 갔다.

검은 머리는 희게 변했고, 매끄러웠던 피부는 푸석거리는 주름으로 덮였다.

근육이 마르고, 눈이 침침해졌다.

수십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흘러갔다.

사실은 윈나 역시 알고 있었다.

신비가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속삭였을 때, 그 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쓰러졌다.

다급하게 달려온 병사들은 늙은 여인이 이미 죽었음을 발견했다.

*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고 점점 바람의 세기가 강해졌다.

바다를 향해 불던 바람이 이제 육지를 향해 분다.

바람을 타고 연합군의 함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의 숫자가 두 배다.

전투는 반나절 남짓 더 진행되었다.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적의 저항은 극렬했다.

항구 도시의 선원이나 병사들이 해적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는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은 마지막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합류한 우리편 함선들의 가세는 일방적인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숫자도 숫자지만 함선의 높이가 일반적인 전투함보다 조금 높았기 때문이다.

함선을 가까이 대도 사다리를 걸치고 오르든가 아니면 갈고리 쇠사슬이라도 걸고 올라가야 할 판이니 숫자까지 적은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은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을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했다.

결국 게스티 백작의 함대는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채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바다 위에서의 전투를 마무리 하자마자 세라빅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아직 남아 있는 게스티 백작군은 얼마 없겠지만 그래도 자기집 앞마당이니 반격이 있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라빅을 비우고 마지막 항전을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세라빅에서 게스티 백작군이 아니라 선제후 지슬리 공작의 군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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