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7화 (77/248)

77. 귀환.

마스터 요한이 내게 오르벤 강체술을 가르칠 때 말하기를 일정한 수준에 오르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말대로 내 실력은 오르벤 강체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힘도 기술도 극적인 변화는 없었던 것이다.

단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네 주변의 신비를 직시하라는 말에 작은 변화를 느꼈을 뿐이다.

가끔 무엇인가가 내 주변에, 이 세상에 있다는 감각을 느끼곤 했다.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말주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이 감각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감각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단어와 개념을 들고 와서 비슷하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이것은 가로와 세로만 있는 2차원의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까지 있는 3차원의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가로, 세로, 높이라는 요소로 정의된 물건이 3차원의 공간을 지나갈 때 2차원의 공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억지로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한다고 한들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은 3차원의 공간도 그 곳에서 이동하는 물체도 본 적이 없으니 상상도 이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3차원의 공간을 느끼고 그 곳에서 이동하는 물체를 본다면, 단숨에 그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하고 이상한 비유와 설명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은 자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설명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방금 내가 그랬다.

나는 오르벤 강체술을 익히면서도 신비를 직시하고 신비의 힘을 끌어다 쓴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나마 기와 연관지어서 이해하려고 했지만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다른 법이니 내 이해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둔 순간.

극도의 집중력이 발휘된 순간.

나는 비로소 신비를 직시한다는 것.

신비를 힘을 끌어다 쓴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단편적인 이해만으로도 거인을 이길 수 있었다.

주먹으로 거인을 때릴 때마다 거인의 몸 어디가 부서지는지 투시라도 하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특히 두 번 주먹질을 한 후에, 아! 이거 이렇게 때리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시원하게 갈겨버린 마지막 주먹은 거인의 심장을 찢어 버렸다.

심장을 찢고 등뼈를 분쇄하고, 등을 터뜨렸다.

거인은 심장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으로 절명했다.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거인을 주먹 한 방으로 격살했다.

온 몸에서 끓어 오르는 기운이 나를 고양시켰다.

거인 아니라 용을 데려다 놔도 한 주먹에 때려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때.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깨진 욕조에서 검붉은 물과 함께 쓸려 나온 사람이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의 몸 이곳저곳에 연결된 호스에서는 역류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실험체가 된 채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그가 남기는 유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죽어가던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내쉬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다.

검붉은 물이 실험체들의 생명유지에 절대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싸움으로 사방이 부서지고 난장판이 되니 실내를 둘러 보았다.

큰 욕조를 닮은 구조물이 아직 여럿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렇게 호스를 몸에 달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환기구에서 연기가 본격적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재는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규모가 커진다고 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자칫 거인을 때려 잡아놓고 질식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빠르게 이 곳을 뒤졌다.

편지, 보고서, 낙서까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문서는 몽땅 챙겼다.

그 사이에도 연기는 더욱 짙어졌다.

좀 더 뒤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애쉬 남작까지 처리할 것을 생각하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탈출은 들어온 길을 되짚어서 나갔다.

물에 적신 천을 얼굴에 감고 몸을 낮춘 후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연기는 지하 통로에 자욱했지만 다행히 아직은 불길이 통로를 덮칠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상은 지하와 상황이 달랐다.

불기둥이 몇 개나 솟아서 날뛰는 중이었다.

나는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화끈한 열기를 느꼈다.

당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벽을 부수고 곧장 밖으로 튀어 나갔다.

처음 불을 지른 저택의 외곽에는 이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불린 불기둥이 본격적으로 저택을 잡아먹고 있었다.

내가 벽을 부수고 탈출한 쪽도 장난이 아니었다.

지붕은 이미 불길로 덮였고, 나무로 된 벽을 타고 불길이 내려오는 중이었다.

몇 분만 더 지체했어도 불구덩이에서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진회색의 로브를 입고 있는 자들은 화재 때문에 대낮처럼 밝아진 저택의 주변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인력으로 저런 불길을 잡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는 하겠다.

저 자들도 처리하고 싶었지만 화재를 보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저택의 외곽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작은 불이라면 진화를 돕는다면서 들어와서 도둑질을 하겠지만 불길이 너무 격렬한데다가 저택 사람들도 어딘지 수상해 보이니 망설이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하급관리나 경비병까지 나타날 것이다.

이제 여기서 내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미련을 내려놓고 애쉬 남작의 영주성을 향해 달려갔다.

내 기억에 애쉬 남작은 별 볼일 없는 자였다.

산적이었던 내 손에 죽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당시의 나는 내 칼에 배와 허벅지를 깊이 베이고 내장과 피를 흘리며 기어가는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애쉬 남작.

나는 윌리엄이라고 한다.

당신이 죽인 기사 버로스의 아들이지.

이제 왜 당신이 죽어야 하는지 알겠지?

나는 배신을 한 게 아니야.

복수를 한 거지.

그리고 그의 등판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애쉬 남작은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내 손에 죽을 예정이다.

애쉬 남작의 영주성은 아직 조용했다.

물론 도시 외곽의 저택에서 벌어진 화재 소식이 당도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영주의 잠을 깨울 정도로 간이 큰 시종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누군가가 와서 화재 소식을 전하고 영주를 불러오라고 난리를 치는 것만 아니라면 오늘 밤은 계속 조용할지도 모르겠다.

애쉬 남작의 침실은 영주성 2층이었다.

2층 까지의 벽은 제법 높고 앞에는 경계병까지 있다.

그러나 벽을 타고 올라가서 창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 움직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졸고 있던 경계병은 그럴 만했지만 침대에서 자고 있던 애쉬 남작까지 그냥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어이가 없었다.

작위계승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와서 밤늦게 연락책까지 만났으니 피곤하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기사 훈련까지 받은 귀족인데 이것은 좀 심했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귀찮음을 덜었다.

나는 침대로 조용히 접근해서 잠이 들어있는 애쉬 남작의 목을 졸랐다.

불과 몇 초만에 애쉬남작은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아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침실에 들어와서 애쉬남작을 기절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10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때 애쉬 남작의 옆에서 잠을 자고 있던 여인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비명보다 먼저 내 손이 여인의 목을 눌렀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목을 조르면서 동시에 목의 경동맥을 누른 것이다.

그것으로 여인 역시 금방 기절해 버렸다.

애쉬 남작에게 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나는 애쉬 남작에게 재갈을 물리고 잘 묶어서 둘러멨다.

그리고 영주성을 빠져 나와서 비명을 질러도 사람들이 오지 않을 만한 곳으로 향했다.

지난 번에는 내 실력이 별 볼일이 없어서 제대로 말도 못 나누어보고 죽였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두고 대화를 좀 해 볼 생각이었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내 선친에 대해,

그리고 아르보그 공작에 대해 애쉬 남작은 내게 많은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

작위계승식에 참석했던 칼마르의 사절단은 칼마르를 향해 귀환하는 중이었다.

리네아 여백작까지 함께하는 일행이라서 여유있고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사절단의 실무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

때문에 귀환 일정이 약간 지체되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에서 감시하는 누군가가 보더라도 일부러 귀환을 늦추고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약간의 지체가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애쉬 남작령에 다녀올 동안의 시간을 어느 정도 벌어준 것이다.

나는 밤에 조용히 사절단으로 합류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내 대역 노릇을 했던 기사 덕분에 멀리서 살펴보는 정도로는 내가 없어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며칠 후에 만나게 된 선제후 아르보그의 부하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낭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중의 하나가 라그닐드였다.

라그닐드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 다가왔다.

“윌리엄 경. 사절단에 계셨군요.”

“예. 막시밀리안 공작의 작위계승식에 갔다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다행이군요. 다른 곳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

“예?”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라그닐드는 나를 무시하고 리네아 여백작에게 갔다.

경기병 특유의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 라그닐드는 제대로 쉬지도 않고 며칠을 말을 타고 달렸는지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녀와 함께 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의심받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암염 광산이 습격당했을 때부터 용의자 명단에 올랐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험실은 화재로 전소되었고, 거인을 비롯한 실험실 사람들이 여럿 죽었고, 애쉬 남작은 납치되어서 행방불명이다.

아르보그가 귀머거리는 아닐 테니 나와 애쉬 남작 사이의 악연에 대해 알고 있을 테고 당연히 유력한 용의자로 나를 지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작 나는 사절단 사이에 있으니 잘못 짚었나 싶을 것이다.

“애쉬 남작령이 알 수 없는 자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애쉬 남작은 행방불명이라고요?”

“예. 백작 각하. 애쉬 남작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혹시 수상한 자들을 보시게 되면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지요.”

애쉬 남작.

찾지 못할 텐데.

내가 사절단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수색을 위한 협조 요청도 끝낸 라그닐드는 곧장 떠나 버렸다.

그 후로 사절단은 별다른 일 없이 칼마르에 귀환할 수 있었다.

리네아 여백작은 칼마르에 귀환하자마자 두 명의 가신을 불렀다.

나 역시 그 옆에 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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