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거인 격살
수인족은 평상시에는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다닌다.
눈동자나 체모, 피부 등에 특징을 드러내는 수인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필요할 때 아주 많은 칼로리를 소모해 가면서 짐승을 닮은 아인종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것을 수인이라고 부른다.
수인으로 변한 후에는 평소에 가진 육체적 능력의 2~3배는 우습게 발휘한다고 한다.
듣기로는 수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수인에 따라 다르고 한다.
아무리 길어도 반나절을 넘지 못하고, 전투 같은 격렬한 활동을 한다면 불과 한 두 시간만에 체력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도 생길 정도로 수인의 육체는 성능에 비해 효율이 안 좋다.
그런데 저 안에서 로브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자들 중 몇은 수인이었다.
수인으로 계속 있는 것은 칼로리 소모가 심해서 피한다고 했는데?
설마 계속 수인으로 있는 것이 가능해지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거인족.
사실 거인족은 말로만 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저기서 커다란 욕조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저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말로만 들었던 거인족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을 가슴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키.
인간의 몇 배를 상회하는 거대한 덩치.
그리고 자연스러운 움직임.
인간이 저런 키와 덩치를 동시에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근육과 뼈로는 저런 덩치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육을 사용해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이고, 넘어지기라도 했다가는 바로 골절이다.
그런데 저 자는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팔뚝이 보통 사람의 몸통보다 더 클 정도로 비정상적인 덩치를 하고도 그 움직임에 어색함이 없다.
오히려 날렵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내가 내부를 살피는 사이 두 명의 괴인이 출입구 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타는 냄새는 왜 더 심해지는데? 밖으로 나간 놈들은 왜 안 돌아오는 거야? 무슨 일이 났나?”
“냄새가 더 심해집니까? 저는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넌 인간이니까 그렇지. 거기다 감각도 둔해졌다면서? 그래도 이렇게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모르겠다고 하니까 오히려 신기하다. 아! 진짜 이 냄새. 이러다가 코가 마비되겠네.”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 군기 빠진 말년을 연상시키지만 번득이는 눈에 살기가 어려 있는 자들이었다.
사람 좀 많이 죽여본 티가 났다.
출입구에서부터 상대하기에는 숫자가 좀 많은데 싶은 순간 벽에 뚫려 있는 환기구에서 연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출입구 쪽으로 오던 괴인들은 벽으로 달려가서 환기구를 살피기 시작했고, 안쪽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괴인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췄다.
그 중에서도 수인족 티가 나는 괴인들은 천을 물에 적셔서 코와 입을 막느라고 바빴다.
그제서야 커다란 욕조를 들여다 보다가 몸을 일으킨 거인이 고함을 질렀다.
“뭐냐!”
동굴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렁우렁하는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힘이 있었다.
“아무래도 화재가 난 것 같습니다. 군장님.”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긴 것 같습니다!”
환기구를 살피던 괴인들이 보고를 하자 모든 괴인들이 다급하게 각자의 무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칼은 기본이고 곤봉에 철퇴, 도끼까지 다양한 무기를 집어들었다.
“환기창까지 연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불이 나도 크게 난 모양입니다. 방해하는 놈들이 없어도 불을 끄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군장님! 어떻게 할까요?”
무기를 든 자들은 거인을 바라보며 명령을 요구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려움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피를 보고 싶어하는 흥분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을 꺼라. 만약 불을 지른 놈들이 있으면 한두놈 정도는 잡아와. 물어볼 것이 있으니까. 나머지는 다 죽여버려.”
거인은 환기창을 노려보며 명령을 내리다가 고함을 질렀다.
“다들 튀어나가!
그 말을 신호로 로브를 입은 자들은 수인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몰려나갔다.
나는 괴인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거인은 부하들이 사라지자 오히려 수다스러워졌다.
“애쉬. 이 머저리 자식이 배반했나? 아니면 프리더드의 개라도 숨어들어 온 걸까? 며칠만 더 있으면 이전이 끝나는데 이게 무슨!”
거인은 잠시 말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인상을 쓰더니 성큼성큼 한 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 곳에는 쇠막대기가 구석에 기대어 있었다.
쇠막대기?
아니 그것은 쇠기둥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직경은 한뼘쯤 되고 길이는 거인의 키와 비슷하다.
설마 저런 흉악한 것을 무기로 쓰는 걸까?
거인의 무기가 저 쇠기둥이라면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저런 것을 어떻게 막나?
기술로 흘려내는 것도 어느 정도지 저런 무기는 절대 안 된다.
거인은 쇠기둥을 잡더니 내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성큼성큼.
인간이 뛰는 것보다 거인이 여유있게 걸어오는 것이 더 빠르다.
내가 설마? 하는 거인은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왔다.
그리고 쇠기둥을 휘둘렀다.
한쪽 벽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무너졌다.
나는 무너진 벽 뒤에서 거인을 노려보며 칼을 빼들었다.
나와 거인은 무너진 벽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너는 누구냐?”
“거인이 왜 여기에 있지?”
우리는 답변없는 질문을 나눴다.
“누구의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염탐꾼은 아니로군”
눈 앞의 거인은 자신이 거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 북부에서도 한참 오지에나 있는 존재가 여기에까지 와 있다니.
그것도 선제후 아르보그의 비밀스러운 일을 담당하면서.
선제후 아르보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수인족에 거인에.
이러다가는 외국의 왕까지 끌어들이겠다.
거인은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이라도 하듯 쇠기둥을 슬쩍 내밀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수평으로 휘두른 쇠막대기가 공간을 찢어발길 것처럼 위압적인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과속한 25톤 트럭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건 맞으면 죽는다.
체력이 MAX니 인간 최강이니 하는 것,
다 소용없다.
나는 위험을 알리는 본능의 감각에 맞서기를 포기하고 연달아 휘둘러오는 쇠기둥을 피해 넓은 공간으로 몸을 피했다.
나보다 강한 힘 앞에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힘이 세다.
인간을 상대로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상태창이 내 믿음의 근거였다.
그 뒤로 어떤 사람과 맞붙어도 힘에서 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싸워왔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 내 강력한 힘이 반전의 한 방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까지 내 믿음은 배반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힘에 대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저런 괴물같은 아인종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던 말이다!
거인은 나를 따라 움직이며 연달아 쇠기둥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나는 죽음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부서진 바닥돌에 걸려 멈칫한 순간,
거인은 나를 노리고 쇠기둥을 내리쳤다.
바닥에 도랑을 판 것 같은 흔적이 남았다.
넓적한 돌을 깔고 그 사이사이를 찰흙으로 마감한 바닥이 한순간에 박살이 난 것이다.
벽도 아니고 흙바닥을 쳐서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고?
미치겠다.
탱크를 막아야 하는 보병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손오공이 8톤짜리 여의봉으로 내려칠 때 신선이든 요괴든 막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하는데 저 모습을 보니 이해가 간다.
나는 쇠기둥을 피해 커다란 욕조들이 놓여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반격의 여지라도 잡으려면 좀 더 복잡한 지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쇠기둥은 걸리는 것은 뭐든지 거침없이 파괴했다.
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욕조 사이로 피하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걸리적 거리는 욕조도 같이 박살을 낸 것이다.
쇠기둥이 욕조를 강타할 때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욕조 파편은 사방으로 튀고 안에 가득 담겨 있던 검붉은 물은 바닥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 검붉은 물을 따라 사람도 하나 쓸려 나왔다.
숨을 쉬는 것을 보니 아직 살아는 있는 것 같은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호스와 관을 몸 곳곳에 연결해 놓은 것이 사람을 가지고 뭔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선제후 아르보그 이 새끼.
대인배? 마음씀씀이가 넓어?
웃기지도 않은 놈이 지랄을 하고 있군.
그 놈은 인간이 아니다.
“길들여진 늑대. 도망은 잘 치는군.”
“거인족 혼혈 따위에게 목줄이 잡혀서 기어다니는 노예놈보다는 낫겠지. 나는 안 잡혔으니까.”
거인의 얼굴이 확 굳었다.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다는 티가 난다.
이거 설마?
“어! 진짜 거인족 혼혈이었어? 선제후가?”
황제 중에 용족 혼혈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니 선제후 중에 거인족 혼혈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제국은 다양한 아인종이 섞여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다.
황제 용족 혼혈설도 그런 황제도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 정도일 뿐이다.
보통 귀족도 아니고 선제후가 인간이 아니라면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
옛날에 그랬다더라 하는 소문과 지금 그렇다라고 하는 현실은 다른 것이니까.
거인은 기분 상했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쇠기둥을 내게 휘둘렀다.
이번에는 나도 피하지 않았다.
칼로 쇠기둥을 막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칼로는 안 되었다.
쇠기둥을 칼로 내리치는 순간 가벼운 반탄력과 함께 칼이 부러졌다.
부러진 칼은 누가 집어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날아가서 벽에 박혔다.
나는 칼몸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손잡이를 집어던진 후 새로운 칼을 뽑았다.
마지막 칼이었다.
이번에는 먼저 움직였다.
칼로 쇠기둥의 옆면을 밀면서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인은 칼은 아무 위험이 안 된다는 듯 무시하고 내 어깨를 잡아왔다.
동시에 내 칼이 거인의 배를 찔렀다.
마치 여러겹의 가죽을 찌른 것 같았다.
가죽 사이에 끼어서 더 이상 칼을 찔러 넣을 수 없는 느낌이다.
거인의 근육은 칼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공격 실패의 대가는 컸다.
거대한 바이스에 잡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근육이 짓이겨지고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력이 어깨를 죄었다.
거인은 나를 내려다보며 제안했다.
“길들인 늑대. 항복하고 복종을 맹세한다면 죽이지 않겠다.”
“아직 안 끝났다. 노예야.”
나는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 흘러다니는 신비를 정시했다.
신비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믿었다.
그리고 신비의 힘을 빌려 거인의 옆구리를 갈겼다.
그 순간 지금까지 가죽으로 몇 겹씩 댄 것 같았던 거인의 피부가 물이 찬 고무풍선처럼 느껴졌다.
한 번 더!
한 번 더 치면 풍선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아!
주먹을 거인의 배에 댔다.
그리고 끊어쳤다.
거인의 얼굴에 고통이 서렸다.
거인이 내 어깨를 놓는 순간,
거인의 허리를 잡고 몸을 위로 띄웠다.
그리고 가슴을 가격했다.
물로 가득 찬 가죽주머니가 충격파에 찢겨 나갔다.
심장이 멈춘 거인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