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3화 (73/248)

73. 황제 또는 왕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 망해버려라.

회귀하기 전에 인사말처럼 흔하게 듣던 말이었다.

욕이라기 보다는 한탄 같은 것?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마을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길 위에서 떠돈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세계로 내동댕이 쳐진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가 본격적인 내전의 초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난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고, 생존이 곧 투쟁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것을 강에서 그리고 산에서 몸으로 겪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고 잃은 것이 많은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에게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모두가 이런 엿 같은 세상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산에서 만났던, 나름 공부 좀 했다는 하급 관리는 진짜 머지 않아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물론 흔히 생각하듯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해서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이 더 이상 제국으로 있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왕국들이 자리 잡는 몇 십년간의 기간, 적어도 한두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망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웃어넘겼다.

전쟁이 나든 기근이 닥치든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망하면 또 어떤가.

가진 것도 없는데.

당시의 내가 가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세상이 망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설사 망하더라도 질서 있게 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도 칼마르 백작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으면 한다.

이제는 전과 달리 가진 것이 제법 있어서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영지가 있는 계승 남작이고 여백작의 약혼자다.

산적이었던 과거와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칼마르라는 울타리가 제국 해체를 견뎌낼 수 있을까?

리네아 여백작은 제국 해체라는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도그럴 것이 선대 백작은 선제후들간의 격렬한 내전 정도까지는 예견한 모양이지만 제국의 해체는 언급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해체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도 선제후들간의 갈등이 영지전으로 비화한 것이 여러 번 있지 않았습니까? 지나친 우려가 아닐까 합니다. 공작 각하."

"그렇지. 백작의 말이 맞기는 하오. 그러나 나는 걱정을 멈출 수가 없소. 황제위의 궐위가 10년이나 시간을 끈 적은 제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란 말이오.. 그리고 황제 후보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도 처음이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리키는 것은 명백하오. 제국은 분열의 길로 가고 있소."

제국이 분열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은 나 역시 동의한다

제국 분열의 초창기 모습을 보았으니까.

그런데 회귀 전과 비교하면 사건이 일어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리고 회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

이를 테면, 오늘 바르거가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이 된 일.

그런데 회귀 전에는 바르거라는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다.

이 시기라면 죽어버린 막시밀리안 공작이 위세를 떨치며 칼마르를 괴롭히고 있을 시기다.

그가 배후에서 손을 쓴 수적이니 산적이니 하는 무리가 날뛰고 내전으로 박살난 올보르그 지역에서 쏟아들어온 난민으로 인해 칼마르는 엉망이 된다.

칼마르가 제대로 반격을 시작한 것은 좀 더 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칼마르는 수적도 잘 처리했고 올보르그 지역에서 온 난민도 잘 소화했다.

칼마르를 건드린 자들에게 반격까지 해서 마무리도 다 끝난 후다.

적어도 2, 3년은 더 빠른 전개다.

그리고 황위계승자로 내세운 5살과 2살의 아이들.

회귀 전에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이다.

사실 그 정보를 듣는 순간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내가 제국 남쪽끝 칼마르에서 일으킨 작은 사건이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변화라도 가져온 것일까?

달라벤 강의 수적 창궐을 막아서?

그것도 불과 1년 만에?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라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원인은 원인이고 결과는 결과다.

문제의 해결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제국이 분열로 가고 있다는 공작 각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작. 나는 칼마르의 도움이 필요하오."

"칼마르는 선제후가 아닙니다. 황제 선거에 표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리네아 여백작의 어조는 단호했다.

칼마르의 중립은 칼마르의 모든 유력자들이 동의하는 정책이다.

백작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롭고도 강력한 명분이 없는 한 칼마르의 중립이라는 정책이 바뀔 일은 없다.

"그러나 표를 갖고 있는 자들을 압박할 수는 있지. 나는 글렌 공작에게 표를 달라고 요구할 거요. 바르거 막시밀리안도 나와 함께 할 것이오. 만약 칼마르까지 함께 해 준다면 요구는 금방 관철될 거라고 생각하오. 바로 지척에 1만에 달하는 영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백작이 하는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없소. 설사 그 자가 선제후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나는 3표를 확보하게 되지. 내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의 해체는 없을 거라고 장담하오. 내 능력을 다해서 막을 거요. 그게 칼마르에게도 이익이 되겠지."

"칼마르는 언제나 중립이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도 중립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중립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제국이 무너지면 칼마르도 타격이 클 거요. 물류는 마비될 것이고, 공인들이 만든 상품은 창고에서 먼지나 쌓인채 잊혀질 거요. 암염 상행은 약탈 당할 것이고, 몰려든 난민으로 칼마르 시의 주변 지역은 무법천지가 될 거요. 이 모든 것이 중립이라는 단어 때문에 벌어지는 사태요."

선제후 아르보그는 귀족의 언어로 협박을 했다.

저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면 직접 저런 사태를 일으키겠다는 의미다.

아르보그의 말을 이해한 리네아 여백작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차가운 말투로 또박또박 반박해 주었다.

"제국이 혼란해지면 칼마르의 가치는 더욱 커지겠군요. 사방이 도적으로 들끓을 테니 달라벤 강을 통한 물류 이동의 가치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고, 공인들의 상품은 시간이 지난다고 썩는 것도 망가지는 것도 아니니 바다를 이용해 외국으로 보내면 그만입니다. 암염은 황금과 다를 것이 없으니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고 용병을 고용하는데 사용하면 되겠군요. 식량과 용병이 충분하다면 난민을 통제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칼마르가 중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칼마르가 아닌 다른 곳에 식량과 돈을 쓸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르보그 공작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남작쯤만 되어도 자신의 말을 눈앞에서 대놓고 반박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니 선제후는 어떻겠나.

선제후는 예스맨으로 둘러싸여 지내기 십상이다.

예스맨 중 절반은 아첨하는 자들이고 절반은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다행히 아르보그 공작은 그런 상황까지는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리네아 백작처럼 대놓고 반박하는 사람을 접하는 일은 드문 모양이었다.

결국 그는 협박을 하고 말았다.

"백작. 다시 잘 생각해 보시오. 제국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오. 칼마르는 혼자 있기에는 너무 부유하고 값어치 있는 영지요."

"칼마르가 감히 선제후를 이길 수 있다고는 자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같이 죽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윌리엄 경도 같은 생각이오?"

아르보그 공작은 갑갑하다는 듯 내게 질문을 해 왔다.

그래서 나는 명백하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다만 한 가지 다른 의견은 있습니다. 같이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군무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확언드립니다만 확실히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음. 부디 백작의 생각이 바뀌길 바라오."

결국 면담은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은 예상한 범위 내였다.

리네아 여백작은 마지막에 들은 협박 때문에 솟아오른 분기를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헀다.

"아르보그 공작이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는군."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겁니다.."

"윌리엄. 역시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칼마르가 중립이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전란에 휩쓸려 들어갈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은 반대 아닌가?"

"그렇습니다. 리네아가 제대로 반박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되겠습니다. 선제후들이 다 그렇겠지만 이 자 역시 위험해 보입니다."

"그런데 아르보그 공작은 진짜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일까? 그런 것 치고는 10년 동안이나 조용히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서다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윌리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

보이는 것, 말하는 것은 대인배다.

체격답게 마음 씀씀이도 넓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란, 특히 정치가란 종족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특히, 마음대로 되지 않자 마지막에 협박을 한 것을 생각하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가 보기에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다.

당장 애쉬 남작 문제가 있다.

애쉬 남작은 막시밀리안 공작의 봉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르보그 공작과 손을 잡고 암염광산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바르거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30여 명의 귀족들 사이에 있었지만, 진짜로 충성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다.

처음에는 어떤 관계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금전 거래 뿐 아니라 실험체 공급, 광산의 개폐까지 연관이 있다.

이 정도면 아르보그 공작에게 단단히 목줄이 잡혔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귀족들 중 얼마나 많은 자들이 아르보그 공작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까?

애쉬 남작과 같은 자가 과연 그 사람 하나일까?

그리고 개조된 사람들에 대한 문제도 무시 못한다.

패트슨 남작의 영지에서, 애쉬 남작의 광산에서, 그리고 내전으로 망가졌던 올보르그 지역에서 벌어졌던 사람 사냥에 아르보그는 얼마나 관여한 것일까?

혹시 아르보그 공작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더라고 그 수상한 무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막시밀리안 공작에 대한 문제다.

4개의 선제후 가문이 다른 4개의 선제후 가문에 비해 격이 다른 위치에 있다고 해도 어쨌든 동등한 선제후 가문이다.

그런데 암중으로 손을 써서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집어삼켰다.

바르거 막시밀리안과 그의 가신들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만 궁정 쿠데타를 위해 아르보그 공작과 손을 잡은 시점에서 이미 벗어나지 못할 덫에 걸렸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가 가리키는 것은 자명하다.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은 황제가 되지 못하면 왕이라도 되려는 것 같습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두 눈을 치켜 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