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72화 (72/248)

72. 선제후 오르보그

바르거의 막시밀리안 공작위 계승식은 영주성 앞의 넓은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이 오십 명 단위의 방진을 짜고 영주성을 지키듯 죽 늘어섰다.

그 숫자만 해도 2천 명.

모두 동일한 갑옷과 동일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재력에 새삼 감탄하며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자금이 말랐다는 세간의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속사정을 아는 우리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은연 중에 조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칼마르를 먹어보겠다고 온갖 무리수를 두었고, 휘하 파벌 귀족의 영지전에 지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해서 패배하게 만든 자가 전대 막시밀리안 공작이다.

그러니 불과 얼마 전에서야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장악한 바르거에게 돈이 있을 리가 있나.

지금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 들고 있는 무기가 다 빚이다.

우리가 건너건너 듣기로는 은행업을 하는 거상에게 영지를 담보로 막대한 돈을 빌렸다고 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계획대로 안 굴러가서 상환이 늦어지만 은행업자들이 와서 속옷까지 벗겨갈 거다.

아니면 담보로 잡은 영지를 처분해야 하는데 바르거 같이 권력 기반이 약한 사람이 버텨낼 수 있을까?

어쩌면 하극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도 병사들에게 새로 맞추어 입힌 갑옷이 보기에는 좋았다.

선제후로서의 위신을 생각한다면 투자할 가치는 있다.

그렇지 않아도 파벌 내의 귀족들 사이에서 바르거 공은 너무 유약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와서 더욱 그렇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공작가에서 부리는 하인들이 거대한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2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천으로 된 지붕을 씌운 천막이었다.

안에는 커다란 원탁을 가져다 놓았다.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천막이라서 멀리서도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천막을 세우자마자 바르거 막시밀리안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같이 온 기사들까지 합한다면 2백 명은 넘겠지만 중요한 귀족만 따진다면 30명쯤 되는 규모였다.

하나하나가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계승 귀족이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는 단체의 수장이다.

다들 투구를 쓰지 않았을 뿐 제대로 갑옷을 입고 장검을 찬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설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은 천막 옆에 말을 세우고 한 명씩 원탁 앞으로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원탁에 합류했다.

"함리의 백작 고피!"

"계약에 따라 나의 검을 들고 막시밀리안 공작 각하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흐레디의 백작 올브욜프!"

"계약에 따라 나의 병사들과 함께 막시밀라안 공작 각하의 호출에 응합니다."

"베르시달드의 백작 힐데!"

"계약에 따라 나의 기사들과 함께 막시밀리안 공작 각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30명에 달하는 남녀귀족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렀다.

그 때마다 해당하는 귀족은 자신의 검을 보이며 계약에 따라 막시밀리안 공작의 부름에 응했음을 선언했다.

지금 바르거 막시밀리안과 귀족들이 주고받는 문답은 파벌의 수장이 전쟁을 결심하고 휘하의 귀족들에게 종군할 것을 명령하고, 소집된 귀족들은 명령에 따라 모였음을 보고하는 것을 의례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파벌에 속한 귀족 중 제대로 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귀족은 저 천막 안의 원탁에 둘러 서서 문답을 주고 받고 있는 30여 명의 귀족이 전부였다.

작위계승식에 초대받거나 축하를 위해 모인 귀족들은 그 주변에서 이 의식의 증인 노릇을 해 주면 된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마지막 귀족의 이름까지 호출하고 그 귀족이 계약에 따라 여기 왔음을 선언하자 출진을 명령했다.

"나,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정당한 계승자인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계약에 따라 나를 따르기로 맹세한 귀족들과 함께 나의 권리를 쟁취할 것이다.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깃발 아래에 선 명예스러운 귀족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검을 들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첫 줄에 설 것이고, 물러날 때는 마지막 줄에 설 것이다. 용기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가장 앞에 서서 영주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귀족과 기사들이 따라갔다.

영주성 입구에 도착하자 공작가의 가신들과 나머지 귀족들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가신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귀족이 도시의 열쇠와 막시밀리안 공작의 인장을 바쳤고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양손에 열쇠와 인장을 든 채 귀족들을 거느리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영지의 실무를 맡은 궁전 귀족들과 가신 집단의 충성 맹세를 받을 차례였다.

밖에 있던 귀족들 역시 따라들어와서 이번에도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막시밀리안 공작의 작위계승식이 끝나갈 때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의 부름이 있었던 것이다.

*

선제후 아르보그는 거인을 방불케 하는 자였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법한 손, 머리 두 개는 더 클 것 같은 키, 일반적인 사람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덩치.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풍겼다.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르보그 공작 각하."

"남작 윌리엄입니다. 리네아 백작의 수행원입니다."

선제후는 제국 귀족의 정점에 서 있는 자다.

그 중에서도 4명의 선제후는 격을 달리한다.

우리는 지금 제국의 황제 후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대들을 만나서 반갑소. 특히 소문의 윌리엄 경을 만난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군. 경 같은 유명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오."

글렌 공작의 사냥개가 떠들던 낯부끄러운 칭호들이 생각났다.

음악과 이야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자들이 나를 로망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현대 지구처럼 유명세가 권력이 되고 돈이 된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관심은 역시나 곤란하다.

거인족 혼혈 따위의 과대평가 때문에 화살로 맞을 것을 발리스타에 맞는 경우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정말 억울할 테니까 말이다.

"그 소문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흘려들으십시오. 과장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짓말입니다."

내 불퉁한 반응을 선제후 아르보그는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그는 리네아 여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윌리엄 경은 수행원이라고 하니까 나는 리네아 백작과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아르보그 공작 각하."

"일단은?"

"윌리엄 경은 제 보좌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가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과 동일한 권위를 갖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냥 다 털어놓고 이야기해도 되겠군. 고문 노릇을 해줄 늙은 가신들이 왜 따라 오지 않았나 했더니 꿰뚫어 보는 시선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유능한 보좌역이 같이 왔기 때문이었어."

이 사람 보기보다 농담을 좋아하는 자일지도.

"일단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소. 라그닐드를 통해 칼마르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엉뚱한 이야기가 나와서 윌리엄 남작이 화를 낸 모양이더군. 그럴 만해. 나라도 그런 경우에는 화를 냈을 거요. 그래도 변명을 좀 하자면 고디는 인간 사이의 정치에 대해 모르는 편이요.  부족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거든. 나이도 어리고."

"공작 각하의 기사들에게 해를 끼친 것은 저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니오. 죽은 자들은 원래부터 고디의 호위 기사로 나와는 관련이 없소. 그리고 고디는 며칠 더 쉬면 다시 멀쩡해 질 거라고 하더군. 수인족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튼튼하오."

고디만 살아 있으면 공작이 문제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중년 기사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바르거 공의 작위계승식에 참가한 외부의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편으로 인식된다는 말을 고디가 어디서 주워듣고 이곳에 온 귀족들이 모두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같은 편인 것과 같은 편으로 보인다는 것은 다르지요."

"경이 말이 맞소. 고디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더군. 사실 나는 다른 선제후들이 보기에 이곳에 모인 귀족들, 그 중에서 칼마르 정도는 내 편으로 보이도록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었소. 누군가가 고디를 이용해서 그렇지 않다고 고함을 질러 버려서 말이오."

여기서 뭐라고 대답을 해도 자기 자랑 아니면 염장 지르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나와 리네아 여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보그 공작 역시 이 주제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다른 주제를 꺼냈다.

"백작은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아시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선제후와 투표 관리를 맡은 귀족만 모여서 공개적으로 호선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내용이기는 한데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요.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지.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이를테면 선제후들이 모여서 투표를 하기 전에 누구를 황제로 삼을지는 이미 정해진 후라든가. 투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소."

그럴 수도 있다.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다 보면 대세가 결정되는 법이다.

대세를 거부하고 싶어도 선제후가 8명이니 한둘로는 답이 안 나온다.

지금 당장 사생결단을 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지 황제가 선출되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황제가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 질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아르보그 공작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거인을 방불케하는 사람이 인상을 쓰니까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백작은 혹시 뱅트손이 누구를 황제 후보로 내세웠는지 아시오?"

"손자를 내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칼마르는 소식이 빠르군. 아직 공표를 안 해서 알고 있는 귀족이 얼마 안 될 텐데. 그런데 백작. 백작은 뱅트손의 손자가 몇 살인지는 알고 있소?"

"다섯 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다섯 살이지. 그러면 뱅트손과 대립하고 있는 스케티 녀석은 누구를 황제 후보로 내세웠는지 아시오?"

"아직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스케티 역시 손자를 내세웠소이다. 2살 짜리 손자를."

5살 짜리와 2살 짜리 황제 후보의 대결이라.

의도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다 늙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봐야 얼마나 황제 노릇을 하겠나. 장례식 날짜나 알아봐야 겠지.

얼마 있다가 다시 황제선출을 위한 투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적당한 나이대의 능력있는 사람을 세운다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것 뿐이다.

정작 수고한 늙은 사람은 감사 인사와 함께 황제직 수행을 위한 뒷받침이나 요구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애가 황제가 된다면?

정상적이라면 두 번 아니면 세 번쯤 투표할 기간 동안 투표를 하지 않고 계속 황제위를 가문에서 독점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권을 쥐고 흔들 수도 있다.

어린애가 어른이 된 후에는 알게 뭔가. 늙은 사람은 관에 누운 후일 텐데.

어른이 된 어린애가 알아서 해야지.

그래. 의도는 이해가 간다. 의도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맞나?

중재자에 가까운, 힘이 약한 황제가 아예 허수아비가 되어 버리면 무슨 권위가 있을까?

"이 권력에 미친 놈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챙기고 있소. 만약 이런 웃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제국은 해체되고 말 거요."

그래. 제국해체.

이 말이 벌써 나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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