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69화 (69/248)

69. 시간이 필요하다.

마스터 요한은 결혼까지 고려해보라는 제안을 하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하는 제안이라는 것이겠지?

"결혼까지 고려해 보라니······ 아실만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문제는 무슨!"

"문제가 없는데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갑자기 다시 꺼내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스터 요한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태도를 보니 이제 속에 있는 말을 할 모양이다.

"결혼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큰 사업으로 생각하지. 그러니 리네아 백작님의 결혼은 칼마르 백작령이 걸린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걸려 있지. 원래 우리는 자네와 우리 백작님과의 약혼을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시간을 버는 임시 조치 정도로 생각해 왔네."

"대귀족을 보좌하는 가신이라면 누구나 합리적이라고 할 겁니다."

"그래.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칼마르의 덩치가 갑자기 너무 커졌어. 그리고 자네도 너무 잘하고 있고. 그래서 문제가 생겼네."

막시밀리안 공작은 내부 반란으로 목이 잘렸고, 글렌 공작은 돈 나오는 큰 구멍 중의 하나가 막혀서 자기 앞가림 하기에도 급급하다.

선제후 2명의 탈락이 공식화 된 셈이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막시밀리안 공작이나 글렌 공작이 황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다.

칼마르가 대놓고 공작들에게 들이 박아버린 것도 설마 저 사람들이 황제가 될 리는 없겠지 하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 부정할 수 없다.

아마 4명의 선제후들 중 하나가 되겠지.

지금까지 황제 자리를 돌려가며 차지해온 가문들.

제국의 진짜 지배자들.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가 칼마르 백작가의 세불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어깃장을 놓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자.

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는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백작령.

최근에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고, 영지전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까지 확 늘어났다.

그런데 이곳의 통치자가 아직 미혼의 여자다.

약혼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는 평범한 기사였던 자로 이렇다 할 배경도 없다.

결국 칼마르 백작령이 좀 더 커지고 힘이 세졌다고는 하지만 처해 있는 상황이 변한 것은 없다.

덩치가 아주 큰 자들에게 칼마르 백작령은 여전히 맛있는 목표다.

걸리적 거리는 공작들을 백작령의 체급까지 키워가면서 치워버렸더니 전에는 바라만 보고 있던 선제후들이 본격적으로 손을 내밀어 온다는 말이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제후들간의 균형을 깰 정도로 커졌으니까.

그렇다면 결론 역시 간단하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백작님께 결혼 동맹을 전제로 한 제안이 왔습니까?"

"눈치가 없지는 않군."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대귀족들에게 결혼은 외교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니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황제와 맺은 혼약도 파기할 수 있는 것이 대귀족간의 암투인데 일개 남작과 얽힌 혼약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을 겁니다. 결혼 동맹을 제안한 선제후 쪽에서는 동맹의 조건이나 따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뭐가 문제가 생겼다는 겁니까?"

마스터 요한의 못 마땅해 하는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마치 이 놈의 자식을 일단 몇 대 패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유혹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냥 시선을 돌려 버렸다.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지. 자네가 잘 생겼다는 것도 문제고, 실력이 기사 몇 정도는 한 입에 씹어 먹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도 문제고, 백작님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험한 일이라도 해치우는 것도 문제고, 적당히 백작님과 거리를 두면서도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이 백작님을 위하는 티가 난다는 것도 문제고, 특히 독을 먹고 죽을 뻔 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어. 젠장. 약혼식에서 자네도 눈치를 챘을 텐데? 백작님이 자네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왜 막지 않으십니까? 가신들 입장에서는,"

"적당히 해 두게. 떠보는 것도 지나치면 화가 날 수 밖에 없네. 자네는 우리를 무슨 감정도 없는 냉혈한 취급을 하는데 우리는 백작님의 가신이기 이전에 가족일세. 선대 백작님은 내게 형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셨다고. 게다가 백작님까지 포함한 우리는 모두 같은 사문의 사형제이기도 하지. 나나 사라는 백작령의 안위보다는 백작님의 행복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마스터 요한과 시녀장 사라 남작 부인은 칼마르 출신이 아니다.

이들은 무밀 왕국 출신이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칼마르와 엮였을 뿐이다.

이들에게 칼마르 백작령보다 리네아 여백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의 생각은 어떨까?

그녀는 과연 결정적인 순간 칼마르 백작령의 이익보다 사랑의 명령을 더 따를까?

"시간이 필요합니다."

"차가운 녀석."

"저도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라서."

"젊은 기사라면 이럴 때 확 불타오르는 맛도 있어야지."

마스터 요한의 타박을 들은 나는 가볍게 웃었다.

마스터 요한도 방금 전보다는 한층 풀어진 표정이었다.

그는 리네아 여백작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 나는 아버지의 시험을 반쯤은 통과한 것일까?

"윌리엄. 자네에게서는 가끔 붕 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네. 다른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언제든 인사도 없이 떠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지. 그런 것은 안 좋아. 그래서 나는 자네를 얽어맬 생각이네."

"예?"

마스터 요한은 내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응접실의 벽에 주먹을 댔다.

그리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벽에서 주먹을 뗐다.

"잘 보게."

그의 주먹이 가볍게 벽을 끊어 쳤다.

순간 벽에 둥글게 한 뼘 정도의 직경으로 실금이 갔다.

"두 뼘 정도. 그 정도의 깊이로 벽을 부순 것이지. 내 스승께서는 내 두 배 깊이로 부술 수 있으셨다네."

나는 실금이 간 벽에 손을 댔다.

직경이 한 뼘, 깊이는 두 뼘.

가볍게 벽을 긁자 둥글게 실금이 간 곳이 콩알 정도 크기의 조각들로 무너졌다.

이것을 사람이 맞으면?

근육이고 내장이고 할 것 없이 모두 파열이다.

간이나 심장이 있는 위치에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봐야 한다.

"대련에서 저를 봐 주신 거였군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나중에는 자네가 너무 빨라져서 어차피 써먹지 못했을 걸세. 그리고 실제로 힘에서는 완전히 밀렸지. 버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허리가 꺾였을지도 몰라."

"이것을 보여준 의미는 제게 이것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까?"

"설마. 이것은 수준이 꽤 높은 거라네. 직계 제자가 아니면 가르치지도 않아. 그리고 가르치고 싶어도 단계를 밟아서 가야 하니까 10년을 잡아도 길다고 하기 어렵지. 그래서 자네가 내게서 배울 것은 오르벤 강체술의 기초일세. 이런 주먹에 맞아도 죽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오르벤 강체술.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글렌 공작의 사냥개가 떠들던 내 칭호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낯선 명칭에 무심코 그냥 지나갔는데 이게 마스터 요한이 익힌 무술인 모양이다.

"일찍 죽고 싶지 않다면 잘 배워둬야 할 걸세. 칼마르에 제안을 건넨 선제후들은 막시밀리안이나 글렌과는 격이 다른 자들이니까. 그 자들의 휘하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두게."

"막시밀리안이나 글렌 쪽에서도 이상한 자들이 있었지요. 피부가 가죽 갑옷 같은 자라든가, 철판 같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쳐다보지도 말게. 인간의 타고난 형상을 개조하는 방식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어리석은 짓이니까 절대 성공할 수 없어. 신비와 함께 호흡하는 강체술이야말로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산을 올라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냥 산길을 따라 가도 되고, 절벽을 기어 올라가도 되고, 길 없는 나무 사이를 헤치고 기어 올라가도 된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정상에 떨구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러나 길을 안내하시는 분이 등산로를 따라 가시겠다는데 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다른 말을 보태는 것은 좀 멍청한 짓 아닐까?

그래서 나는 군말하지 않고 마스터 요한의 주장에 동의했다.

"이 세상에는 신비가 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과 규칙이지. 신비는 인간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래서 신비의 편린에 닿은 자부터 신비 그 자체 매료된 자들까지 신비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노력해 왔다. 그리고 약간의 성과가 있었지."

마스터 요한은 벽에 대고 다시 주먹질을 했다.

이번에는 벽에서 약간 거리를 둔 상태로 직접 벽을 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벽에서 퍽퍽 소리가 나며 주먹에 맞은 것처럼 흔적이 남았다.

주먹과 벽과의 사이가 두 뼘은 되는데도 말이다.

"그런 성과 중의 하나가 오르벤 강체술이다. 신비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비슷하게나마 신비 중의 하나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수련법이지. 나까지 3대에 걸쳐 수련하고 보충해 왔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익히는 사람마다 편차가 너무 심해서 어떤 사람은 맨손 체조를 배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신비를 접하고 사용하는 것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강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윌리엄 자네가 무엇을 얻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배우게. 오르벤 강체술의 수련이 그대와 잘 맞는다면 그대는 신비를 가진 자들과 다르지 않게 될 걸세. 그렇게 되면 설사 선제후들이 가진 비밀과 부딪친다고 해도 헤쳐 나올 수 있을 거네."

그렇게 나는 오르벤 강체술 유파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칼마르와 엮인 인연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이 세워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이 출발한 것은 내가 복귀한 뒤로 두 달이나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선제후들간의 회합이 이루어질 것처럼 분위기를 잡기는 했지만 여러 명의 높으신 분들이 엮인 행사가 그렇듯 사소한 일로 질질 시간을 끌기만 했다.

결국, 결원이 있는 상태에서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를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고 막시밀리안 공작의 작위 수여식을 먼저 하기로 한 것이다.

작위 수여식에는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 뿐 아니라 칼마르 같이 중립적인 귀족들이나 자유시의 사절들 역시 참석한다고 한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사절이나 대리인을 보냈을 뿐 직접 가기로 한 사람은 아르보그 선제후가 유일했다.

원래 이런 작위수여식에는 거리나 친소를 따져서 적어도 2~3명의 선제후는 참석을 하는데 단 한 명만 참석하다니 어떻게 보면 굴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이 아르보그 선제후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이 상당히 빠르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후라서 더욱 그렇다.

아르보그 선제후가 대놓고 후견인처럼만 굴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면피가 되었을 텐데 지금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올 정도니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인 바르거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인 바르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표가 갈 곳은 아르보그 선제후 뿐이라고 주변에 흘리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을 믿지 못하기에 외부에서 권위를 빌려오는 것인데 이런 식이면 작위를 계승한다고 해도 누가 따를지 의문이다.

오히려 반란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공작의 작위수여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와 칼마르의 사절단 역시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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