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복귀하다. 그리고
물론 비스뷔의 내전이 끝났다고 해서 도시가 크게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화재가 몇 군데 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는 하지만 거대한 도시의 경관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비스뷔의 내부는 많이 바뀌었다.
특히, 비스뷔의 권력구도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스뷔의 서열 1, 2위 권력자가 나란히 반역 혐의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서열 3위인 마그누손은 내전을 승리함으로써 권력 서열 1위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마그누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졌는데 내전 중에 의원들까지 여러 명 전사했으니 권력 집중이 발생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친글렌파 의원들은 반역 혐의를 피하기 위해 마그누손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아버리기까지 했다.
덕분에 마그누손의 권력은 독재관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비스뷔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마그누손이 글렌 공작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대기상태였다.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외부세력임이 명백한 칼마르의 귀족이 비스뷔의 정치에 끼어들어서 간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바디슨이 사용했던 쇠뇌를 살펴보고 있었다.
3연발로 쏠 수 있는 휴대용 쇠뇌라니!
기병이나 기사의 제식 장비로 채택할 수 있다면 위력이 무시무시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기대는 곧 배반당했다.
아무래도 이 쇠뇌는 비싼 쓰레기로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정밀하게 만들어진 작품으로 위력도 상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작품]이라는 거다.
실력이 뛰어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했고, 유지보수를 하려면 다시 분해해서 조립해야 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간다.
즉, 너무 비싸고 고장이 잘 나게 생겼다.
대량 생산해서 보급하기에는 별로 효용성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걸까?
냉병기는 개인의 실력에 따라 너무 좌우되는데.
기술과 역사 발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
시민군의 징병을 상상하던 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때 마그누손이 내 거처로 들어왔다.
"뭐 하십니까? 윌리엄 경."
"이 쇠뇌의 구조가 재미있어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아! 바디슨이 사용한 쇠뇌 말이군요."
나는 바디슨의 쇠뇌를 마그누손도 살펴볼 수 있게 내밀었다.
"쇠뇌줄이 3개로군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하나씩 발사됩니다. 구조는 복잡하지만 위력적이지요. 쇠뇌로 연달아 3발이라니 가까운 거리라면 피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걸 윌리엄 경이 해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 운이 저한테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무엇인가 고민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글렌 공작 측과의 협상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비스뷔를 황금 나오는 주머니 취급을 하다가 깔끔하게 손을 떼겠다고 하니 오히려 불안합니다. 글렌 공작 성향상 이럴 때는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디로 암수가 뻗어올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글렌 공작.
린치와 공개적인 처형, 암살을 통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자다.
이런 종류의 인간이 하는 말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니 마그누손의 고민이 이해가 간다.
애초에 나와 마그누손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비스뷔 시를 장악하는 것.
이것은 아누트와 오스테르를 제거하고 글렌 공작의 비스뷔 주둔군을 격파하는 것으로 성공했다.
또 다른 하나는 비스뷔를 잃은 글렌 공작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
일단 한 번만 막으면 선제후들간의 균형상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마그누손이 진짜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글렌 공작이 비스뷔를 다시 영향권에 넣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을 당연시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는데 엉뚱하게도 군대 대신 협상 사절이 온 것이다.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포로로 잡힌 글렌 공작 측 병사들을 반환하고, 비스뷔 측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용병대의 계약을 1년 연장하는 것으로 모든 다툼을 끝내자는 제안이었다.
글렌 공작과의 전투를 각오하고 있던 비스뷔로는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다.
그러나 문제는 글렌 공작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도 비스뷔의 재정 문제가 심각한데 글렌 공작이 사용하는 용병대에게 1년씩이나 계속 봉급을 지불한다면 비스뷔의 방어를 위해 쓸 자금이 심각하게 부족해진다.
자칫하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가 머리 위에서 칼날이 떨어지는 꼴을 보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다고 사절단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투를 준비하는 것은 그것대로 내부 반발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글렌 공작 휘하에 있는 용병대의 일부가 비브뷔 사람이라는 것도 걸리는 문제다.
마그누손은 의원들과 격론을 벌였지만 이틀째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나 역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판단을 내리기에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그누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게 그의 위치가 가지는 의무다.
나와 마그누손이 글렌 공작의 속마음을 짐작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새로운 방문객이 등장했다.
용병대장인 노렌과 안면이 있는 기사였다.
어! 칼마르에서 전령이 온 것인가?
"윌리엄 남작님. 노렌입니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칼마르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역시!
기사는 내게 봉인된 편지를 건네 주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했다.
파견한 용병대와 함께 즉시 칼마르로 복귀할 것.
글렌 공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배경설명은 없었다.
칼마르에서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배경으로 있다는 의미다.
"즉시 칼마르로 복귀하라는 전언이군요."
"즉시 말입니까??"
"예. 글렌 공작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진행되는 모양입니다."
마그누손에게 칼마르에서 보낸 전언에 대해 설명해 준 후 전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돌고 있는 소문이 있을 텐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정확도는 상관없네."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 의식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어! 이거.
나는 마그누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그누손 역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담하는데 지금 우리는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마그누손 경. 정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 의식이라면 말이 됩니다. 비스뷔에 따로 신경 쓸 여유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마그누손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마그누손의 본질이 상인인 이상 어떤 결론이 날 것인지는 자명했다.
상인은 체면이나 명예에 목숨을 거는 귀족과는 다르다.
그들은 돈에 목숨을 건다.
"목에다 칼을 들이민 것도 아닌데 돈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포로들을 송환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의원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역시나.
만약 글렌 공작이 황제로 선출된다면 이번 결정은 뒤탈이 심대할 것이다.
그러나 설마 글렌 공작이 황제로 선출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4강 2중 2약으로 불리는 선제후 중 2중에 해당한다.
글렌 공작 위로 최소 4명의 황제 후보가 있다는 소리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그누손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칼마르 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칼마르 시에 붙어서 건설되던 난민촌이 완성되어서 도시의 규모가 확장되었고, 둔전 역시 제법 자리를 잡아서 농토의 개간과 파종이 한참이었다.
얼마 전에 영지전을 치렀고 난민을 수용하면서 여러모로 고생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보면 그냥 활기 넘치는 상업 도시 그 자체였다.
물론 자세히 보면 내전의 여파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도 있다.
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대개 여자나 아이들이라는 것.
물론 남자도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불편한 사람이 많았고 젊은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몸성한 젊은 남자는 둔전병으로 징병되어서 이웃 영지에 파견을 나갔기 때문이다.
이웃의 일부 영지에는 우리가 군대를 보내서 치안을 유지하고 세금까지 걷는 상황이라서 아직 제대로 된 병사라고 할 수 없는 둔전병까지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칼마르 백작령은 이제 본래 영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지역에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전에는 단순히 경제적 영향으로 제한되었다면 이제는 군사적, 정치적 영향까지 포함하고 있다.
내 기억의 칼마르 백작령과는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 내 기억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약식으로 약혼식부터 치렀다.
얼마 후면 이곳저곳에 리네아 여백작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라서 내 신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대한 연회는 결혼식 때로 미룬다는 핑계를 대고 가족처럼 가까운 가신들과 영지의 유력자들만 참석한 간소한 예식으로 대신했다.
사실 예비 약혼자의 신분으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약혼식 자체는 별 감흥이 없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처음도 아니었고.
그러나 리네아 여백작은 긴장해서 실수 연발이었다.
아직 어리니까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평소에는 권력자답게 차갑고 단호한 정치기계처럼 행동하다가 이렇게 자기 나이 또래의 영애다운 모습을 보이니 그 갭이 꽤 귀여웠다.
마스터 요한이나 사라 남작 부인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의견일 것 같았다.
그러나 마스터 요한이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약혼식장이 끝이었다.
"윌리엄 경. 자네가 백작님과 계약한 기간이 5년이라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마스터 요한. 5년 동안 살아남으면 됩니다."
"5년 이후에는 따로 계획이 있나?"
"아직은 따로 세운 계획은 없습니다. 5년은 상당히 긴 기간이니까요. 일단은 의뢰를 완료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내 약혼은 용병 계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나와 리네아 여백작 뿐 아니라 가까운 가신들도 안다.
이미 리네아 여백작의 가신집단 사이에서 공유된 이야기를 왜 다시 상기시키는 걸까?
왜 내게 다른 생각은 없는지 궁금해 할까?
"백작님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건가?"
역시나.
이런 종류의 질문은 곤란하다.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으니까.
결혼조차 정치의 일부인 귀족들과 나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현재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지구에서의 경험 때문에 완전히 이곳의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만약 중세 유럽인이었다면 쉽게 적응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현대 한국인이다.
유교와 자본주의가 기본 OS로 깔려 있고, 효율과 경쟁, 눈치가 백그라운드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 세계를, 이 곳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억지로 맞추어서 살 생각도 없다.
"그거 안 될 거라는 것. 마스터 요한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마스터 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게 말했다.
"결혼까지 고려해 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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