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자유 도시의 선택
농사를 짓는 것은 땅만 있다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혼자 가꾸고, 혼자 거두고, 혼자 먹으며,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무인도에 혼자 조난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농사다.
그러나 장사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물건을 사거나 팔려면 거래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금방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상업 도시는?
개인이 장사를 하려고 해도 거래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도시는 말해 무엇할까.
도시 하나가 통째로 상업으로 먹고 살겠다고 한다면 믿을만한 거래 상대라는 것은 그 도시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상업 도시의 가장 좋은 거래 상대는 대개의 경우 상업 도시가 된다.
칼마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스뷔라는 상업도시가 있다.
제국 남부 제일의 상업 도시가 칼마르라면 비스뷔는 제국 남동부의 상업도시 중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간다는 말을 듣는 곳이다.
비스뷔 역시 칼마르처럼 항구 도시다.
짧은 강이 있지만 수량 문제로 수운에 적합하지 않아서 주로 마차로 상품을 운반한다.
주력 상품은 각종 식물성 기름과 식량.
비스뷔 주변이 토질은 좀 떨어지는 대신 일조량이 풍부하기에 사람들은 각종 상업 작물 재배를 시도해 왔고, 그 결과 식물성 기름을 얻을 수 있는 여러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뿐 아니라 토질이 좀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일조량도, 물도 부족하지 않아서 식량 역시 제법 생산량이 나온다.
그래서 현재 비스뷔는 단순한 유통거점이 아니라 자신 주변의 생산물을 밖으로 실어 내는 수출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비스뷔의 시의회 의원들 역시 비스뷔의 구조에 걸맞게 대부분 상단주와 대농장주를 겸하고 있다.
"윌리엄 경. 세금이 심각하게 오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내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자 역시 상단주와 대농장주를 겸하는 전형적인 비스뷔 시의회의 의원들 중 하나였다.
이름은 마그누손.
비스뷔 시의회의 의원들 중 서열3위 정도되는 거물이다.
칼마르와의 거래는 벌써 4대가 넘게 이어지고 있어서 소위 '믿을만한 거래상대'의 하나다.
상인에게 있어 상업적인 이익을 함께 한다는 것은 동맹이나 가까운 친척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마그누손의 대농장에서 생산하는 식물성 기름의 대부분을 100년 넘게 거래해 왔으니 그가 칼마르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맹 세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칼마르 백작가 역시 마찬가지 느낌일테고.
비스뷔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곳에 오면서 설명을 들었지만 그래도 오판을 피하기 위해서 현지인에게 다시 한 번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장사일이나 영지일에는 별다른 지식이 없는 전형적인 젊은 기사 흉내를 냈다.
"이해가 잘 안갑니다. 마그누손 경. 세금을 올리면 그것을 글렌 공작이 가져가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제가 자유 도시의 행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텐데요?"
"도시 방위를 목적으로 용병을 고용하고 그 용병을 글렌 공작이 데려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세금으로 글렌 공작의 전비를 댄 셈입니다. 그런데 시의회에서 용병을 더 고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말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런 꼼수를 자유 도시의 시의원들이 인정했다고?
아무리 비스뷔의 시의원 중 일부가 글렌 공작에게 매수되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막 나갈 수는 없다.
상업 도시의 시의원들은 자기 돈에 손을 대려는 자는 부모를 죽인 원수와 동격으로 취급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부의 강탈에 대해 민감하다.
그것은 비스뷔나 칼마르 뿐 아니라 상업 도시라면 어디나 공유하는 정서다.
"비스뷔 시의회에서 그런 부당한 처사를 두고 보고 있었습니까? 황제 폐하로부터 특권을 구입한 자유도시인데 글렌 공작이 주인처럼 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맞습니다. 윌리엄 경. 이런 일은 원래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고위 귀족이라도 감히 황제 폐하의 특허장을 부정할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황제 폐하가 안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글렌 공작은 선제후입니다. 그 분이 황제로 선출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상인이 아니라 농촌을 기반으로 한 귀족이라면.
그러나 상인이 가능성만으로 자신의 금고를 들어다가 바친다고?
칼마르의 시의원들이 알면 코웃음을 치겠네.
듣던 바대로 협박을 제대로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시의회의 유력 의원 중 2명이 글렌 공작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약속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충성심만 보면 비스뷔의 특허장까지 가져다 바칠 판입니다. 연달아 증세를 결의한 것도 그 자들이 주도한 일입니다."
마그누손은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술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시뻘건 것이 몇 잔 걸친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더 이상 시간낭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그누손 경. 저는 정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만, 비스뷔는 통치자가 따로 없는 자유도시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시의회의 결의가 곧 법이 되는 것인데, 불만이 있더라도 시의회에서 결의했다면 따르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원칙은 그렇지요. 원칙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비스뷔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증세에 반대하던 의원이 3명이나 죽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의회에서 발언하다가!"
마지막 말은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그의 울분이 느껴졌다.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며 술로 입술을 적셨다.
의회에서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찔려 죽은 의원의 이야기는 배에서 들었지만 앞의 두 건은 못들었다.
역시 거리가 있으니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
중세 시대라는 한계는 역시 어쩔 수 없나.
"글렌 공작이 저지른 짓입니다. 그는 암흑가의 길드장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하거나 죽입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의 파벌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그의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생각 없이 글렌 공작의 입만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렌 공작은 이제 우리 비스뷔의 자유민 역시 자신의 노예로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조상대대로 자유민으로 살아왔습니다. 자유도시 비스뷔의 일원인 나는 이런 모욕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습니다.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의원들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마그누손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탁자에 양 손을 깍지끼며 내려놓았다.
"윌리엄 경. 아니, 르하베트의 남작이자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 공의 부군인 윌리엄 경. 제발 도와주시오. 칼마르와 비스뷔는 수백년간 교류를 이어온 사이오."
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마그누손이 긴장을 못 이기고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올보르그 지역의 참상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건너건너 듣기는 했습니다만."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지역이 얼마나 황폐화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 지역은 적어도 10년 이상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 합니다. 인구가 회복하는 것은 시간이 더 필요해서 한 세대 이상을 잡아야 한다고 관리들이 그러더군요."
"왜 그 곳에 대한 이야기를?"
"선제후 둘이 작정하고 전투를 벌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의례에 따른 명예로운 전투 따위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곧 악마가 날뛰는 지옥으로 변해버렸지요."
나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에게 현실을 말해 주었다.
"글렌 공작에게 반기를 들고 비스뷔에서 그의 세력을 축출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최악의 경우 이 곳 비스뷔 일대가 올보르그 지역처럼 불타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설사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경이 증세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 하지만 세금을 매길 만한 것조차 안 남을 수 있습니다. 경이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에 분노하지만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사람조차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렌 공작에게 저항해서 들고 일어날 생각입니까?"
나는 그를 협박했다.
최악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불안감을 자극했다.
나와 함께 온 용병대는 2개 백인대에 지나지 않는다.
중간에 이들이 손을 들어버리면 나와 2백명의 용병은 그대로 사지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끝까지 갈 생각이 있는지 확인을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비스뷔는 황제에게서 특허장을 구입하기 위해 30년치 수입을 바쳤습니다. 그것으로 자유 도시의 자격을 산 것이지요. 만약 이대로 계속 우리가 글렌 공작의 손에서 놀아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앞으로 누가 황제가 되든 비스뷔의 특허장은 종이쪼가리가 되고 말 겁니다.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못난 후손으로 인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비스뷔가 자유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래. 자유도시로 남는 것이 중요하지.
면세 특권이 붙으니까.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이 진심이라면 나도 진심으로 나서야 한다.
목표는 두 가지.
먼저 비스뷔에서 글렌 공작의 세력을 말살하는 것,
그 후, 공격해 오는 글렌 공작의 군대를 격퇴하는 것이다.
둘 다 만만하지 않은 미션이다.
*
마그누손은 그의 열정만큼이나 행동력이 넘치는 자였다.
시의회의 의원들 중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을 소집하고 그들의 사병을 끌어모았다.
그는 불과 이틀만에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미리 어느 정도 말을 맞추어놓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즉시 출동할 수 있는 병력까지 준비해 놓은 것은 지금 싸움을 준비하는 자들이 유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매우 기꺼운 일이었다.
이제 곧 행동에 나설 사람들에게 희망섞인 전망을 해 줄 정도로 말이다.
"최악의 경우를 미리 생각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미리 결정해 놓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최악의 상황이 닥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윌리엄 경은 우리의 땅이 올보르그 지역처럼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예.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지요. 지난 10년 동안 황제가 뽑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선제후들 간의 세력다툼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팽팽하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글렌 공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증세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여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불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글렌 공작의 개들을 쓸어버린다면 더 이상 전투는 없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한 번 정도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만 이기면 됩니다. 그러면 글렌 공작은 이곳에 신경을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될 겁니다. 다른 선제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오늘밤 제대로 해 봅시다."
잠시 후 우리는 비스뷔에서 글렌 공작의 세력을 말소하기 위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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