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62화 (62/248)

62. 추적

나에 대한 암살 시도는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위험도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전에 예비 약혼자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그 중 실패로 끝난 암살 시도에 대해서는 중간에 내가 난입해서 현장을 정리해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암살 시도 정도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고, 어쩌면 역으로 제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졌었다.

건방진 생각이었다.

상태창을 너무 믿은 것도 문제였다.

두 번의 암살 시도가 모두 물리적인 공격이어서 몰래 숨어들어와서 칼질을 하는 암살자를 연상했던 것이다.

미니맵을 잘 보면서 위험 요소를 걸러내면 된다는 안이한 대처라니!.

그 결과 나는 독살로 죽을 뻔했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드디어 상태창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스킬 : 독저항, LOCKED]

죽을 뻔한 대가로 얻은 스킬이라기에는 뭔가 허접해 보이지만 그래도 스킬이 하나 생겼다.

이제 독 먹고 죽을 일은 확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LOCKED 없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앞으로도 스킬을 더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근사하게 [만독불침] 같은 것이 주어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상태창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독저항이나 해독이 나오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다.

독저항은 아마 [체력 : MAX] 와 연관되어 나온 스킬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람마다 독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

실록에도 보면 사약을 마시고 그냥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그릇씩 마셔도 안 죽어서 결국은 목을 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것은 사람마다 주량이 천차만별인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인간이 독에 저항할 수 있는 정도도 역시 다른데 내가 [체력 : MAX] 라서 독에 저항할 수 있는 한계점도 MAX 인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살아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스킬 : 독저항] 일 것이다.

그렇다면 만독불침 같이 간지나면서도 편리한 스킬이 주어지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내게 상태창을 준 어떤 존재의 능력과 상관없이, 내가 버틸 수 있는 독의 상한선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상한선이기도 하다.

내게 독살을 시도한 자들은 운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자가 독을 먹었음에도 멀쩡하게 살아났으니 신뢰를 많이 잃었을 것이 뻔했다.

의뢰주에 대한 신뢰 뿐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 대한 신뢰도 같이 말이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 쌓기는 어려워도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의뢰주인 글렌 공작도, 암살 하청을 맡은 아크후도 이번 실패로 제법 타격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의뢰주도, 암살 하청을 맡은 단체도 전혀 다른 곳 일 수 있다.

내게 숙청당한 칼마르 유력가의 가족이 의뢰를 넣었다든가, 아니면 패트슨 남작이 혹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남작가의 비선(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을 동원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곳 일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감은 글렌 공작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 하나만으로 글렌 공작을 원흉으로 규정하고 복수에 나설 수는 없다.

그 감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다.

구태여 증거로 다른 사람까지 설득할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가 확신을 가질 정도면 되어도 충분하다.

그러면 나 자신을 보증삼아 다른 사람을 설득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라그닐드가 잡아놓은 3명의 포로가 중요했다.

그들을 잘 이용해서 점조직을 잡아내는 방식으로 따라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은거지를 뒤지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아쉬운 것은 모습을 감춰버린 하녀복의 여자다.

이번 독살 시도의 중심이었으니 아는 것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이 여자를 놓치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낼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하녀복의 암살자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존재였다.

라그닐드에게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것을 보면 개인적인 전투력은 별 것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위험도 만큼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자들 중 누구보다도 더 높게 쳐야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신비 때문이다.

라그닐드에 의하면 이 여자는 바로 눈 앞에서 봐도 인식을 하지 못 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고 한다.

그냥 풍경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작정을 하고 찾지 않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라고 한다.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이라니!

이거 암살이나 첩보 쪽에서는 투명인간 못지 않은 치트키 아닌가?

그냥 눈 앞에서 돌아다녀도 인식범위 밖에 있다니 뭐 이런 어이없는 신비가 있을 수 있나?

슬슬 돌아다니다가 음식에 독을 넣어도 아무도 모른다는 말 아닌가?

이번에 내가 당한 방식이 그거였지.

그거 무섭네.

그래도 고도로 수련을 쌓거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자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잡을 수 있는 모양이니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겠다.

실제로 라그닐드의 기사들은 냄새로 찾았다고 하니 최소한 수인족 한정으로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수색이 성공해서 저들의 은신처를 찾게되면 각별히 조심해서 찾아봐야 겠다.

독저항이 생겼어도 또 독을 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

밤이 되었다.

하루 종일 고문과 취조를 반복했던 간수들이 떠난 감옥에는 적막함만이 흘렀다.

감옥 한 구석에는 며칠 째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은 포로가 비몽사몽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퍽! 큭!

현실에 한 발 걸친 그의 신경이 꿈 속으로 도피해가는 그의 절반을 잡아끌었다.

포로는 눈을 퍼뜩 떴다.

순간 감옥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옷에 두 눈만 내놓은 두건을 쓴 사람이었다.

그는 미끄러지듯 감옥으로 다가오더니 두건으로 가린 입술에 세로로 검지를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고문을 당할 때만 열리던 감옥문이 열린 것이다.

포로는 부들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직은 움직일 수 있었다.

며칠 더 감옥에 갇힌 채 취조를 빙자한 고문을 당한다면 이렇게 서 있을 수조차 없겠지만 아직은 걸을 수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포로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자신을 따라오라는 수신호를 한 후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계단 입구로 향했다.

포로는 검은 옷의 남자를 따라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계단 입구에는 간수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 아래로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두 명의 병사가 겹쳐서 쓰러져 있었다.

둘 다 목에 있는 상처가 나 있었다.

포로는 병사들을 지나치며 슬쩍 만져보았다.

맥박이 뛰지 않는다.

혹시나 했지만 쓰러져 있는 병사들은 시체가 맞았다.

검은 옷의 남자는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포로는 검은 옷을 남자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내부인이다!

몸놀림으로 보면 기사로 보인다.

왜 나를 탈출시키는 것일까?

형제들은 나를 포기했을 텐데?

함정은 아닐까?

간수도 병사도 죽였는데?

포로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사로잡혔을 때 이미 생명을 포기했지만 다시 살아날 길이 보이자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마른 갈대숲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보다 진짜 구출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영주성의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커졌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포로는 검은 옷의 남자를 따라 걷고, 숨고, 다시 걷고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까 영주성 구석의 쪽문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평상시라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 곳인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저 구석에 쓰러져 있는 다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이곳에 있던 자도 처리한 모양이다.

포로는 이 과감하고 거침없는 손속에 점점 의심이 사라져갔다.

자기 편을 죽여가며 연극을 한다는 것이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옷의 남자는 쪽문을 열고 포로를 내보내며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당신은 운이 좋았다. 경비대의 알력 다툼 때문에 당신을 수단으로 쓴 것 뿐이니 이 이후로 더 이상의 조력은 없다. 조금 후면 교대시간이라서 시끄러워 질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되도록 멀리 가라."

포로의 눈앞에서 쪽문이 닫혔다.

포로는 몸을 돌렸다.

어둡고 조용한 거리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포로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가는 모양이군."

"이번에는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둘이나 실패를 해서 다들 실망이 큽니다. 윌리엄 경."

"암살단 출신답게 눈치가 빠른 자들일세.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야."

구석에 쓰러져서 시체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경비대의 기사가 내게 툴툴 거렸다.

벌써 3일째 밤을 새며 탈옥한 포로를 쫓고 있으니 불만이 나올 만도 했다.

게다가 포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연극까지 하는 터라 더욱 그랬다.

죽은 척 엎어져 있던 간수도, 그 아래의 피웅덩이도 모두 가짜였다.

어제까지는 겹쳐서 죽어 있던 병사들도 가짜였지만 오늘은 마지막이라고 시체까지 수배해서 진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오늘은 진짜 성공해야 했다.

나는 성벽을 발로 박차며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성벽 중간중간 살짝 튀어나온 부분이나 석재 사이의 틈을 디딤대나 손잡이로 이용하며 뛰는 것처럼 빠르게 성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경비대의 기사는 내가 성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성벽 위에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포로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낮과 비슷할 정도로 별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가끔 뒤를 살펴보는 모습까지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횃불이 움직였다.

잠시 후 성벽 위에도 횃불이 올라왔다.

멀리서도 잘 보라는 일부러 올라온 것이다.

뒤를 살펴보며 도망치던 포로는 횃불이 성벽 위에 오르자 절룩거리며 서도 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는 추적을 할 시간이었다.

*

미니맵의 붉은 점은 꾸준히 이동하고 있었다.

나 역시 붉은 점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중이다.

밤은 내게 유리한 환경이다.

야행성 동물처럼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는 나와 다르게 보통의 사람들은 밤에 장님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서 도망치는 포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물 사이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도망치는 중이지만 막상 자기 머리 위에서 건물을 타고 따라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포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신경을 쓰면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목적지를 가진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평범한 주택이었다.

주변도 서민의 주택이 밀집한 곳이라서 조금의 특색도 없었다.

포로는 주택의 입구에 붙어서 조용하게 노크를 했다.

똑 똑 똑똑 똑.

반응이 없자 같은 리듬으로 다시 한 번 노크를 반복했다.

그러자 조용히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길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 주택의 지붕 위에 있던 나는 멀리서 대기하고 있을 경비대의 기사들에게 작은 불빛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멀리서 주변을 포위하고 대기하라는 신호였다.

이제 불꽃을 쏘아 올리면 한꺼번에 몰려올 것이다.

그 전에 저 안에서 뭣들을 하고 있을지 좀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상태창의 붉은 점이 3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한 후 암살단의 아지트로 의심되는 곳을 향해 천천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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