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51화 (51/248)

51. 칼마르는 싸워야 한다.

쉽게 안 죽는다는 내 말에 리네아 여백작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영지에서 나 말고는 오직 1명 밖에 모른다. 그러니 그대도 조심했으면 한다."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면 안 듣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대의 생명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렇다면 들어야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글렌 공작은 이미 한참 전에 그대에 대한 암살 의뢰를 넣었다. 의뢰를 맡은 자들은 아크후라는 암살단이라고 한다."

아니, 잠깐.

암살 의뢰?

글렌 공작, 이 새끼는 나한테 무슨 개인 감정이라도 있나?

책임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려서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암살의뢰까지 해!

······아마 백작의 약혼자라는 타이클 때문이겠지.

그러면 이전 백작의 약혼자들에 대한 암살시도도 글렌 공작의 작품이었을까?

"그대도 알겠지만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에는 특권을 가진 단체가 여럿 있다. 황제나 선제후에게 아예 도시를 받고 영주 노릇을 하는 단체도 제법 된다.  그리고 한 때는 강력했으나 지금은 몰락해서 이름만 남은 곳도 적지 않다. 아크후는 그런 단체들 중의 하나다."

아크후.

암살로 유명한 곳이다.

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다.

산상노인의 암살단과 비슷한 단체가 이쪽 세상에도 실제로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그게 이렇게 엮이냐.

이거 진짜 위험한 것 아닐까?

심지어 이 놈들은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놈들이잖아.

미니맵으로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암살을 업으로 삼은 곳이기는 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곳이고 그들 나름의 명분도 주장하는 곳이다. 한 때는 백작령에 버금가는 땅을 봉토로 받아서 성세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 나름의 명분이 있다고 해도 암살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 양지에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100년 전에 당시 황제께서 그들의 특권을 회수하실 때 원한을 산 귀족들의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흩어졌다. 다만 그 때 당시 황제께서 서거하셔서 그 자들의 짓이라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돌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들을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글렌 공작은 그런 자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나는 리네아 여백작의 눈을 보았다.

아닌 척,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걱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적에게는 단호하지만 내 편에게는 부드러운?

설마.

이 아가씨가 목을 날린 유력자가 몇인데.

속지 맙시다.

"글렌 공작은 이름부터가 미끌미끌하게 들리는 것이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던 자였습니다. 암살자 따위를 보내면서 자꾸 거치적거리면 제가 가서 쓱싹하겠습니다. 이름값만 거창한 전통있는 암살단 따위보다는 백작님의 기사가 실력은 더 나을 겁니다."

"윌리엄. 그대는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사람 같군.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냥 깨부수고 막 달려가는 사람 같아."

"뭐,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지위나 책임에 따라 걱정거리의 종류가 다르고 크기도 다를 뿐 이겠지요. 아무래도 제 것이 백작님 것보다는 작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확실히 이전보다는 나으니까요,."

이전보다는 낫다.

진정한 의미는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돌아오기 전 이 시기의 나라면 샌드호그 장원에서 나름의 힐링 라이프를 즐길 때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확실히 지금이 더 낫다.

"걱정거리는 모르겠지만 위험은 윌리엄 그대가 더 클 것 같군. 그대가 내 약혼자로 알려지면서 원래라면 나나 영지의 유력자들에게 향했을 외부의 손길이 다 그대에게 향하는 느낌이다. 만약 그대가 이미 받은 대가로도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말하라. 그대가 만족할만한 대가를 지불하겠다. 이것은 칼마르의 백작, 르네아의 맹세다."

"계승 남작이라는 작위와 상속 가능한 영지는 백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큰 보상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백작님의 약속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나는 고용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돈이 많고 손이 큰 고용주는 귀중한 존재다.

미래의 나를 위해서라도 잘 지켜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칼마르 백작령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기는 하다.

글렌 공작이 세운 암살 계획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글렌 공작의 최측근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이니까.

상인들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 두려울 정도다.

만약 이런 자들이 충분한 무력까지 가진다면?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

베르그렌 남작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 있는 촌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영지 가장 끝에 있었던 촌락이었다.

촌락에 살고 있던 영지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미처 치우지 못한 시신 몇 구가 해골이 되어서 뒹굴고 있을 뿐.

그들이 경작하던 토지 역시 더 이상 농토가 아니었다.

'한 때는 농토였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어디부터가 잘못 된 일일까?

베르그렌 남작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글렌 공작의 제안에 따라 영지전을 시작한 것?

영지전이 격화될 때 발을 빼지 못한 것?

그리고 지금도 어쩔 수 없다며 글렌 공작의 제안에 따라 남은 병력을 이끌고 칼마르 백작령의 경계까지 온 것?

잘 모르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베르그렌 남작은 원래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두드러지는 존재는 아니었다.

단지 상업 중심지인 칼마르 백작령 가까운 곳에 그의 남작령이 있기에 보통의 남작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달라벤 강이나 소금길과는 떨어져 있는 영지지만 그래도 칼마르 백작령 과는 가깝기에 상업 작물을 재배하며 제법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막시밀리안 공작의 도발은 꽤나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 도발은 적당히 글렌 공작에게 한 방 먹이고, 위신을 세우겠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베르그렌 남작령을 확보함으로 글렌 공작이 칼마르 백작령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르그렌 남작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지를 일부라도 상실하느니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파벌의 수장인 글렌 공작이 손을 내민 것이다.

글렌 공작은 영지전을 제의했다.

물론 막시밀리안 공작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의도에 따라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노골적인 도발을 일삼는 스트랜드버그 남작을 향한 것이었다.

공작이자 선제후인 글렌과 막시밀리안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이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도 비밀은 아니었고.

황제가 10년이나 궐위된 상황이었다.

두 공작 간의 충돌을 중재할 권력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두 공작의 중간에 끼어 있는 귀족들은 점점 격화되는 둘 사이의 갈등을 보며 조만간 어디서든 영지전이 발발하리라는 예측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영지전이 서로 이웃한 스트랜드버그 남작과 자신, 베르그렌 남작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공작 모두 칼마르 백작령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베르그렌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지전 제의를 받아들였다.

영지민에게서 전쟁세를 걷었고, 용병을 고용했다.

기사와 영지군을 소집했고, 창고에 쌓아둔 물자를 방출했다.

글렌 공작에게서 기사와 병사가 지원을 왔다.

영지전의 준비는 차질이 없었다.

그동안 쌓아놓은 부 덕분에 영지전 정도는 몇 번이라도 감당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믿음이었다.

그가 말려들어간 영지전은 그가 생각한 영지전이 아니었다.

원래 영지전은 그렇게까지 사람과 돈을 잡아먹는 전투가 아니다.

정해진 형식이 있어서 그 흐름을 대충 예측할 수 있을 정도다.

양측 다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다 끌어모아서 세를 과시한 후 기사들이 나서서 결투를 몇 번 하다보면 대충 어느 쪽이 유리한지 판가름이 난다.

그래도 승복이 되지 않으면 병사들을 내세워 전투를 벌이지만 그것도 방진을 짜고 서로 전진해서 투덕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밀리는 쪽이 후퇴하면서 끝나는 식이다.

물론 걸린 이익이 크거나 선제후들과 얽혀서 끝장을 봐야 할 경우는 전투가 격렬해 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승패가 결정나면 적당히 물러서는 것이 관례였다.

그 이후는 관련된 귀족들이 모여서 협상을 하고 합의가 끝나면 각자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웬만한 영지라면 영지전으로 입는 피해 역시 감당할 만했다.

기사 몇 명, 병사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명, 그리고 무기와 식량.

잃는 것은 그 정도였다.

승리한다면 오히려 이익이 되는 것이 영지전이었다.

그러나 베르그렌 남작이 말려들어간 영지전은 그가 상상하던 영지전이 아니었다.

다 같이 모여서 약속된 전투를 벌이는 영지전 따위는 없었다.

스트랜드버그 남작의 군대는 전투를 회피하면서 베르그렌 남작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고용한 용병대 여러 부대를 따로 보내서 남작령 곳곳을 기습하고 약탈했다.

심지어 어떤 대담한 용병대는 영주성이 있는 주도를 기습하기도 했다. 영주성은 간신히 지켰지만 성아래마을은 철저히 약탈당했다.

영주인 베르그렌 남작의 얼굴을 똥통에 처박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스트랜드버그 남작의 군대는 관습적으로 지키던 영지전의 규칙을 모조리 깼다.

촌락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영지민을 죽였다. 인부로 삼는다며 강제로 끌고 가기도 했다.

심지어 징병까지 했다!

베르그렌 남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징병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트랜드버그 남작이 베르그렌 남작령에서 징병했다는 이야기다.

베르그렌 남작이 이리저리 도망치듯 이동하는 스트랜드버그 남작의 본대를 추적하는 동안 베르그렌 남작령은 쑥대밭이 되었다 .

베르그렌 남작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지만 병사에게 식량도 제대로 주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려서 글렌 공작을 향해 손을 벌려야 했다.

결국 올보르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나머지 남작 하나와 백작 하나가 더 영지전에 뛰어들고 나서야 전쟁의 균형이 잡혔다.

올보르그 전 지역이 똑같이 쑥대밭이 된 것이다.

그 이후는 엉망진창이였다.

전투는 이곳저곳에서 벌어졌고, 그 때마다 기사도 병사도 죽어갔다.

기사는 금방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훈련을 해야 한 사람의 기사로 제 몫을 할 수 있다.

그런 기사가 죽어나가니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급한 대로 병사를 강제로라도 징병하고 용병을 추가로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돈이, 식량이 부족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글렌 공작에게 손을 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징발을 거듭하고 나중에는 약탈까지 했다.

자신의 영지 뿐 아니라 올보르그 전 지역이 황폐화 되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 피난민이 되었다.

많은 자들이 길에서 죽었고, 더 많은 자들이 전쟁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불과 몇 개월만에 자신의 영지는 더 이상 영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 되어 버렸다.

듣기로는 8명의 선체후가 성립하기 전에 벌어지던 황제 계승전이 이랬다고 한다.

역사서는 그것을 내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벌어진 이 작은 내전에서 글렌 공작 편에 선 자신과 남손 남작이 결국은 승리했다.

막시밀리안 공작과 달리 글렌 공작이 그들을 꾸준히 지원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그들에게 글렌 공작은 추가적인 지원과 칼마르 백작령에서의 권리를 약속했다.

대신 지금까지 싸워온 것처럼 칼마르 백작령에서도 싸워줄 것을 요구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실전에 익숙하고 배고픈 군대 뿐인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바로 여기, 칼마르 백작령의 경계에 베르그렌 남작, 그가 온 것이다.

멀리서 먼지가 솟았다.

그와 처지가 다를 바가 없는 남손 남작의 군대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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