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50화 (50/248)

50. 명단의 첫 번째는 나.

글렌 공작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에릭 칼마르.

칼마르 백작가에서 리네아 여백작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계승 후보자였다.

비록 리네아 여백작에 비해 터무니없이 정통성이 떨어지지만 그나마 그런 정도의 정통성이라도 있는 자가 에릭 칼마르를 제외한다면 아예 없었다.

칼마르 백작가는 손이 귀한 집안인 것이다.

그래서 에릭 칼마르를 자신의 바구니에 고이 담아 놓았다.

용병 일거리도 주고,

칼마르 시의 유력자와 연결할 수 있게 다리도 놓아주고,

내가 당신의 배경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점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다.

에릭 칼마르가 칼마르 백작령 근처에 자리잡고, 리네아 여백작의 골칫거리가 되어 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엄청난 행운이 떨어지면 더 좋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무조건 중립을 외치는 소리가 좀 낮아지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데 자기 멋대로 칼마르 시로 돌격해 가더니 죽어버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물론 글렌 공작의 보좌관들은 에릭 칼마르의 행동이 아예 터무니 없는 짓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의 행동이 나름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그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에릭 칼마르의 행동은 리네아 여백작이 자신의 가신과의 결혼을 선언할 정도로 강수를 두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늦던 빠르던 후계자가 태어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에릭의 계승가능성은 사실상 0에 수렴하게 된다.

게다가 글렌 공작이 연결해 준다던 칼마르 시의 유력자도 눈치빠른 리네아 여백작의 가신들에 의해 숙청당해 버렸다.

15년 전에 칼마르를 떠났던 에릭의 입장에서는 내부에서 호응해 줄 최소한의 세력조차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이라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아예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이제 에릭 칼마르에게는 오직 한가지 가능성만이 남는다.

리네아 칼마르가 죽는 것.

글렌 공작의 지원을 업으면 칼마르 백작령의 일부라도 장악할 수 있고, 그렇게 시간을 끌다보면 백작령 전체를 삼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혼란이 계속되는 것을 좋아할 상인은 없으니까 타협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 리네아 칼마르가 죽어줘야겠군.

누가? 없다고?

없다면 내가 죽이지.

아마도 그런 생각에서 움직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올보르그 지역의 난민이 갑자기 몰려들어서 생긴 백작령의 혼란함을 보고,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자들이 흔히 가지는 모험주의, 한탕주의가 발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것이 보좌관들의 결론이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난민을 통제한답시고 백작령의 병력이 흩어졌으니 실전에 능한 사람이라면 찔러볼 만한 틈을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영주성 바로 앞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글렌 공작은 이런 일탈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의 밑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이것이 집착이고 가끔은 억지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도 알지만 누가 되었던지 그가 정한 틀을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밑의 사람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싫어서 이름도 밝힐 수 없는 자들을 활용해 왔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 그리고 그의 파벌의 귀족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언제나 그의 기분을 살피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목이 뻣뻣한 놈, 목소리가 큰 놈은 진작에 파묻어 버렸다.

그렇게 그를 정점으로하는 일사분란한 체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 놈이 나와?

그리고 멋대로 실패해서 내 계획을 망쳐?

다른 자들도 어리석은 일을 하기 전에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대가리를 쳐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놈이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나를 두려워하고 내 지시만을 기다리게 만들 수 있을까?

······누구의 목을 매달아야 할까?

글렌 공작의 눈에 올보르그 지역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올보르그 지역을 이탈한 영지민들이 칼마르 백작령으로 피난을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글렌 공작은 칼마르 백작령을 담당하는 보좌관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릭 칼마르를 죽인 자가 윌리엄이라고 했지?"

"예. 윌리엄 버로스라고 합니다. 이제는 르하베트의 남작입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소도시 하나와 몇 개의 시골 마을을 포함하는 백작령의 일부를 독립시킨 후 그를 아예 계승 남작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시끄러웠겠군."

"특히 상단 쪽에서 불만이 많았다고 하는데 금방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리네아 여백작을 보호하는 가신들에게서는 처음부터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글렌 공작은 보좌관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칼마르 백작과 가신들 사이의 유대를 생각해보면 윌리엄에 대한 무반응은 확실히 이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단 쪽에서도 금방 불만이 수그러들었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윌리엄 버로스는 우리가 아는 윌리엄 버로스가 아니다.

"역시. 아무래도 칼마르 백작가에서 키운 자겠지?"

"예.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마스터 요한이 비밀리에 키운 제자이거나 아니면 마스터 요한의 스승과 관련된 자가 아닐까 합니다. 리네아 여백작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그냥 불러올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약혼자들을 연달아 잃었으니 실력이 있으면서도 믿을만한 자가 필요했을 겁니다."

"윌리엄 버로스라는 신분도 급조한 거겠군."

"진짜 윌리엄 버로스는 죽었을 겁니다. 가족도 없으니 본인인지 아닌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신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외의의 말을 들은 글렌 공작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 윌리엄 버로스의 선친이 장원을 소유한 기사였음을 기억해냈다.

"아니 그럴 리가? 무슨 장원에서 자라지 않았나? 장원 사람들이 확인해 줄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입막음을 당한 것 같습니다. 산적이 습격해서 일부는 죽이고 나머지는  끌고 갔다고 합니다. 원체 작은 규모의 장원이라서 생존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글렌 공작은 리네아 여백작에 대한 평가를 한단계 더 높였다.

이제는 갑자기 백작이 된 여자애가 아니라 한 명의 귀족으로 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백작이 된 어린 여자애치고는 제법이군. 마스터 요한 아니면 린드스톰의 작품이겠지만 승인은 여자애가 했을테니. 그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는군 그래."

"그냥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애쉬 남작령의 상황이 안 좋아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되었어. 나는 결정했네. 어쨌든 우리가 윌리엄이라고 알고 있는 이 자는 내 용병대장을 죽였고, 내 휘하 귀족의 영지민을 납치해 갔다. 죽일 명분은 충분해. 게다가 이 놈은 이름값이 높지. 이 놈을 죽여서 내 것에 함부로 손대면 안된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겠어."

글렌 공작의 억지에 그의 보좌관은 다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자신이 정한 틀이 망가졌다고 확신했을 때, 글렌 공작은 무리한 짓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럴 모양이었다.

그러나 파벌 내의 귀족을 대하는 것과 외부의 귀족을 대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막시밀리안 공작이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왜 칼마르에게 무르게 대한 것인데!

압박을 심하게 하면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가 버릴까봐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좌관은 지적할 점은 지적해야 했다.

"공작님. 에릭 대장은 칼마르 시를 공격하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우리 사람이기에 백작측에서 오히려 문제를 제기해 올겁니다."

"무슨 소리인가? 에릭은 납치된 영지민들을 구출하려다가 죽은 거야. 잘 못은 다른 영지의 영지민들을 납치한 칼마르 백작령의 귀족들에게 있네. 이를테면 윌리엄 같은 자 말이지."

"그리고 막시밀리안 공작을 잊지 마십시오. 칼마르 백작가에서 그의 손을 잡으면 곤란해 집니다."

"걱정마. 당분간은 괜찮네. 올보르그에서 그렇게 밀리면서도 그 자가 왜 안 튀어나왔는데! 지금 그 자는 이쪽에 관심을 기울일 상황이 아니야."

글렌 공작의 집착은 억지를 합리화했다.

그의 이번 목표는 윌리엄 버로스였다.

*

전투의 뒷처리는 간단하지 않았다.

에릭이 이끈 용병대가 워낙에 독종들이어서 영지군이고 경비대고 할 것 없이 피해가 극심했다.

용병들이 영지성을 향해 무지성으로 달리다가 중간중간 낙오병을 많이 발생시켰다.

덕분에 숫자로 압도하는 영지군과 경비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용병들을 각개격파 할 수 있었다.

만약 에릭의 용병대가 한 곳에 모여서 각잡고 제대로 싸웠으면 우리가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지만, 승리자는 우리였다.

중간에 낙오한 용병들이 미친 듯이 싸운 것에 비해, 영주성까지 돌격해 들어간 용병들은 쉽게 무너졌다.

내가 워낙에 한 순간에 많이 죽였고, 결정적으로 에릭 칼마르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살아남은 용병들은 대부분 손을 들고 항복했다.

백작령의 경계에서 영주성까지 내달린 것을 보면 반쯤은 미친 놈 같기는 했지만 용병들 사이에서 그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죽은 이상 살아남은 용병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살아남은 용병들 중 일부는 처형하고 일부는 노 젓는 노예로 삼은 후 아예 칼마르 시에서 떠나보냈다.

백작의 가신들 사이에서 엘릭 칼마르와 관련된 것은 싹 다 지워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칼마르의 사람들이 실전을 많이 겪은 용병대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경험한 이후로 영지군에 주어진 예산이 확 늘어난 것이 유일하게 좋은 일이었다.

대충 전투 후 처리가 끝났을 때,

베르그렌 남작과 남손 남작이 연명으로 작성한 항의 서한이 도착했다.

그리고 글렌 공작의 항의 서한도 함께 도착했다.

그들의 항의 서한을 읽어 본 나는 어이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들은 난민을 영지를 이탈한 도망자로 정의했고, 칼마르 백작령에서  난민을 구호하고 재정착시키는 것을 영지민에 대한 납치로 규정했다.

심지어 에릭이 비스트 용병대를 공격해서 전멸시키고, 영주성까지 공격을 시도한 것을 영지를 이탈한 도망자를 쫓던 중에 발생한 충돌로 주장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관련자에 대한 처벌과 보상을 요구했다.

명단의 가장 위에는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이것들이 장난을 하나?"

"장난이 아니라 명분을 세우는 것이다. 윌리엄."

"그래도 이런 억지가 명분이 된다니 말도 안 됩니다. 백작님. 이것은 힘 있는 자가 자기 멋대로 하겠다고 대놓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까? 글렌 공작은 우리가 막시밀리안 공작의 편에 들면 어쩌려고 이러는 겁니까?"

"글쎄. 무엇인가 이유가 있겠지.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까. 그나저나 걱정이다. 그대의 이름이 명단의 가장 첫 번째에 있다. 그것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저 쉽게 안 죽습니다. 의뢰주 님."

아무래도 지금부터 미니맵을 켜 두고 생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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