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30화 (30/248)

30. 의심받은 자는 의심을 풀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의뢰를 할 일이 있으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접수가 가능할지 물어야 하는 법이다.

대뜸 칼질부터 하고 난 후 의뢰가 있다고?

이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리네아 공녀. 제 정신입니까? 따귀를 때리고 악수를 청하면 그게 정상적인 예의입니까? 상대방이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더라도 이런 무례에는 앙심을 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내 어조가 좀 더 무거워졌다.

말에 살기가 실렸다.

"그리고 만약 그 상대방이 웅크리고 있던 곰이라면, 그 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만약 곰이 아니라 오우거라면 어떻습니까? 그 앞에서 이렇게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리네아 공녀. 누구나 목숨은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항의로 들렸을 거다.

다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충고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살짝 늘어지던 분위기가 시퍼렇게 다시 날이 섰다.

건드리면 베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리네아 공녀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즐기며 옆구리의 칼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댔다.

모두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이동했지만, 막상 움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손에 칼이 닿는 순간 이들은 모두 나를 찌르기 위해 튀어나올 것이다.

1대3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저들이 내 피부에 흠집 하나라도 낼 것 같은가?

시녀는 하녀와 다르게 귀족가의 영애들이다.

실제로 몸 쓰는 일은 하녀들이 다 한다.

시녀들은 그냥 말동무나 놀이친구인 셈이다.

이곳 칼마르 백작가에서는 그 놀이가 무술 훈련이었던 같지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귀족가의 영애들치고는 제법 무술을 익힌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그것은 무술이 아니다.

죽음과 얼굴을 맞대며 익히지 않는 무술은 교양일 뿐이다.

교양으로는 전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손이 칼에 닿으려던 그 순간.

가장 먼저 나를 찌른 것은 리네아 공녀였다.

"의뢰에 대한 보수는 남작위와 그에 딸린 영지다."

그녀의 한마디 말은 일단 위력과시를 하고 난 후 거래를 하든지 이곳을 떠나든지 하려던 나를 주저앉혔다.

적절한 한 수였다.

그녀의 말이 없었으면 이 자리에서 서 있을 시녀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위력도 확실했다.

나로 하여금 먼저 그녀의 말을 들어볼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리고 보수는 선불이다."

아니, 잠깐.

이건 지나친데.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데.

지나친 보수는 위험 수당이 포함되는 법이다.

위험 수당일지 생명 수당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제대로 설명을 듣지 않고 Go를 외칠 수는 없었다.

"칼마르의 백작님. 설명이 필요합니다."

리네아 여백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이러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백작님. 이런 것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되지 않지요."

중년의 시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그게 뭐요?

당신들끼리만 알고 있는 이야기는 별로 재미가 없어요.

"미안하다. 윌리엄 경.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서 그렇다. 경은 선친에게서 기사 교육을 받은 것이 다지? 따로 선생을 들여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이 맞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시골이고, 그렇게 부유한 집안도 아니어서 개인교사를 따로 들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칭호를 다르게 부르면서 불만을 표시하는 법을 어디서 배운 건가? 예법 선생을 따로 들이는 것은 귀족 가문에서도 흔하지 않다. 상단을 설립할 때를 알아보니 회계라든가 사람다루는 법도 능숙하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배운 건가? 무기술이나 기마술도 전문 교사가 따로 붙어서 몇 년씩 배워야 할 정도의 실력이던데 그건 또 어떻게 된 건가?"

어! 그게 이상한 거였나?

생각해보니 이상할 수도 있겠는데.

지구에서 배운 것도 있고, 지난 생에서 몸으로 배운 것도 있고,

원래 내가 좀 잘 난 것도 있고.

역시 천재 컨셉으로 가야 하나?

"우리는 윌리엄 경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내가 의심받을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생에서는 오늘까지 깨끗하고 모범적인 기사 지망생으로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진짜 윌리엄 경은 샌드 호그 장원과 칼마르 시 사이의 어느 곳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지. 샌드 호그 장원의 촌장과 그의 부하들이 행방불명 된 것도 의심을 부추켰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의심을 한 겁니까? 저는 일개 용병 기사에 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칼마르라는 거대 상업 도시의 군주가 이제 막 고향을 떠난 젊은 기사지망생에게 흥미를 갖고 뒷조사를 한 것이다.

아니 왜?

무슨 이유로?

내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살아온 행적이 명확한 사람이니까 나에 대한 조사 자체는 충실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모두 그 조사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틀림없다.

칼마르의 여백작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되는 말이 많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무리한 짓을 한 것일까?

스스로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칫하면 전망있는 기사가 원한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시골 장원의 경험없는, 심지어 종자 수행 경험조차 없는 기사 지망생이자 자칭 용병 기사인 젊은이가 갑자기 도시에 등장한다.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는 장원을 버린 채로 말이지. 그는 백작에게 영향력이 강한 자문관과 한 집안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며 접근한다. 그리고 깊은 인상을 준다. 실력도 뛰어나서 용병들도 인정할 정도로 야전 생활에 능숙하고 무술 실력은 정식으로 서임받은 기사 몇 명을 이겨낼 정도다. 그런 그가 칼마르 시에 정착하려고 한다. 관리로 추천을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갑자기 큰 돈이 생겨서 상단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야망이 큰 대귀족들이 칼마르 시를 기웃거리는 이런 시기에 말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듣고 보니 그 놈 참 의심스럽기는 하네.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칼질은 과하지.

"샌드 호그에서 사람이라도 데려와서 확인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랬다면 내가 윌리엄 버로스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을텐데요."

"그렇지 않아도 데려와서 확인했다. 윌리엄 버로스 본인이 맞다는 복수의 증언을 얻을 수 있었지. 그래서 마스터 요한이 아니라 내가 온 것이다."

"그러면 내게 왜 공격을 한 겁니까? 공격에 살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내가 실력이 없는 자였다면 죽었을 겁니다."

"그 정도의 공격에도 죽을 정도로 실력이 없는 자였다면 내 가신들에게 내가 속았다는 의미였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누구를 신뢰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을 거다. 그러나 내가 받은 보고대로라면 윌리엄 경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뢰의 완수를 위해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실력을 시험한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시험을 했는데 죽었다면 뭔가 수작을 부린 상황이니 죽어 마땅한 놈이고,

죽지 않는다면 작위와 영지를 내밀고 달랜다.

대귀족이나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저게 먹힌다는 것이 또 무서운 점이고.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변명은 충분히 들었다. 미진한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납득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 이상 변명을 더 들어 보았자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기서 엎어버릴 것이 아니라면 적당히 져 줄 필요도 있다.

사실 보수가 너무 커서 엎어버릴 엄두도 안 난다.

나는 리네아 여백작의 의뢰가 궁금했다.

선불로 작위와 영지를 지급하겠다니 도대체 무슨 의뢰인 걸까?

"좋습니다. 작위와 영지라면 목숨이라도 걸어볼 만합니다. 뭡니까? 가신들의 눈까지 피해가면서 내게 의뢰하려고 한다는 일이."

그러나 막상 의뢰를 해야 할 마지막 순간이 되자 리네아 여백작은 망설였다.

말이 없이 찻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도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5년 기한으로 내 약혼자가 되어 달라."

내 머리에 벼락이 쳤다.

비상사태다.

혹시나 하기는 했다.

비슷한 사례가 좀 있기 때문이다.

영주가 갑자기 죽고, 영주의 아내만 남았을 때,

어쩌다가 젊은 기사가 갑툭튀해서 영주의 아내를 낚아채고 영주직까지 차지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혼란기에는 고용된 용병 대장이 눌러앉아서 영지와 아내까지 한꺼번에 얻어내는 사례도 실제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겉으로 보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난 일일까?

전혀.

알고 보면 속사정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다.

젊은 기사나 용병 대장은 알고 보면 주변 영지의 영주나 고위 귀족의 계승권이 없는 아들이라고 보면 된다. 애초에 평범한 신분이 아니다.

영주 부인 역시 자신의 권리와 영지의 안정을 담보하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것이다.

영지의 가신들도 어디서 이상한 놈이 죽은 영주의 먼 친척이라고 나타나서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로맨틱?

그런 사례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것을 영지의 가신들이 용납 할까?

대영주나 주변 영지와의 피로 인한 연결이 영지의 안정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아는 사람들이 순순히 사랑의 응원이나 보내고 말까?

사실 애초에 그 로맨틱하다는 기사부터가 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 젊은 처녀도 마다하고 나이많은 미망인이라니.

그래서 로맨틱한 젊은 기사는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나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로맨틱한 젊은 기사 꼴이 되기 십상이다.

당장 여백작부터가 가신들의 눈을 피해 내게 왔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그래도 작위와 영지인데.

그냥 작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지까지 딸린 것인데 말이지.

이거 진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치?

5년 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 남기만 하면 대박이기는 한데.

"왜 하필 5년이라는 시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5년이면 선제후들간의 경쟁이 끝나리라고 본다. 선대 백작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

5년 후에는 전쟁이 너무 격렬해져서 귀족들도 죽어나가는 판이었으니까. 거기다 약탈로 황폐화된 지역이 너무 많아서 전쟁 유지가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었지.

무리한 예측이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변수라도?

그래도 선대 백작님이 능력은 뛰어난 분이셨다고 하니까 일단 5년이 맞다고 치고.

"그때까지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아무것도 없다.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왕이면 몇몇 문제거리들을 처리해주면 더 좋고."

"문제거리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은 모건 경에 대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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