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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29화 (29/248)

29. 용병 기사는 의뢰를 받는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나는 여백작의 일행을 별도로 만들어 둔 상담실로 안내했다.

대량 거래를 원하는 상인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첫 손님으로 여백작이 와 버린 것이다.

이게 흉조인지 길조인지 모르겠다.

여백작을 자리에 앉히자 그녀를 수행해온 중년의 시녀가 옆에 시립했다. 그리고 젊은 시녀 두 명은 여백작의 뒤와 상담실의 문 앞에 자리했다.

경호원들이 자리를 정하고 내가 차와 다과를 대령하고 나서야 대화를 할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여백작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평민으로 변복을 하고 있는 리네아 여백작의 정체를 알아본 것인지 말이다.

사실 리네아 여백작을 알아본 것은 간단하다.

본 적이 있으니까.

한 2년 전 쯤이 되나?

이제는 경험하지 못할 미래에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

칼마르 시에서 나온 토벌군에 의해 강에 있던 수적떼들이 차례로 박살이 날 때,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보고 남아준 사람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세에 각자 제 갈길을 가자며 해산을 선언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했다. 그것은 가서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정말 몇 가지 없었다.

멀리 다른 지방으로 피난을 간다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해야 했다.

달라벤 강이라는 물길을 끼고 앉아 있다보니까 다른 지방의 소문이 종종 귀에 들려오는데 별로 희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이미 지옥이 되었거나 조만간 지옥이 될 것이 뻔히 보였다.

설사 평온한 지역이 있다고 해도 그곳까지 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재어 봐도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2가지 뿐이었다.

강에서 어떻게든 삐대면서 다시 기회를 보거나,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알고 싶었다.

칼마르 시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가 어떤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할 것인지,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특별히 비밀리에 수집할 정보는 아니다.

그냥 가서 칼마르 번화가의 술집에 자리잡고 앉아서 하루 저녁만 떠들다보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칼마르 시에 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리네아 여백작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기사들을 거느리고 이동 중이었다.

중무장한 기사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투구를 벗은 모습이라서 더 눈에 띄였다.

그녀는 칼마르 시의 중심가를 돌아다니며 시민들로부터 청원을 듣고 즉석에서 해결해 주기도 하고, 전사한 병사의 가족에게 조의금을 전하기도 했다.

술집에서 겪은 분위기도 긍정적이었다.

심지어 곧 시민군을 모병하리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마비되었던 달라벤 강의 수운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마르 시의 질서도, 리네아 여백작에 대한 지지도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판단을 내렸다.

강에서 버티면 죽겠구나.

이 자들은 달라벤 강에 수적이 다시 자리잡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구나.

그래서 산으로 갔다.

끝은 안 좋았지만.

*

그러나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2년 전인지 후인지 말하기도 애매하기는 하지만 본 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나.

내가 미친 놈 취급을 받을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여백작의 옆에서 시립하고 있는 시녀 아줌마의 뜨악한 시선이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는데 헛소리로 들릴 말을 할 수는 없다.

"본 적이 있습니다. 백작님."

"나를? 어디서?"

"시장에 종종 다니시더군요. 평복을 입으시고. 처음에는 몰랐습니다만 혹시라도 무례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상인들이 알려주었습니다."

"내 정체는 주변의 몇몇 상인들에게만 밝힌 것인데. 어떻게?"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저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은 모르겠지만 시장에 터 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백작은 약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라. 사라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어?"

"마스터 요한이 백작님의 경호 문제 때문에 1년 전에 시장의 원로들에게 귀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안 알려 준거야?"

"마스터 요한은 백작님께서도 숨을 쉬실 공간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백작님이 상인들 사이에서 장을 보고 대화를 할 때 행복해 보이셔서 당분간은 그냥 있자고 했는데, 어느새 그게 1년이 넘었네요."

"사라. 곤란해. 이런 것은 진작에 내게 알려줘야 했어. 성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지."

리네아 여백작은 이야기를 마치자 뒤에 있던 시녀에게 손을 내밀어 서류를 하나 받았다.

그리고 그 서류를 내 앞에 놓았다.

내가 시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였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어져서 지루했을텐데 미안하군. 나는 시의회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한 편으로는 그대의 조언도 필요해서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개인적인 의뢰도 하나 하고 싶다."

"의뢰에 대한 보수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사한 내용은 모두 문서로 정리해서 시의회의 고프리 의원에게 제출했습니다."

내 대답에 실린 거부감은 눈치가 없는 자라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순간 시녀 아줌마의 눈꼬리가 씰룩 거렸다.

"정리한 문서는 나도 봤네. 윌리엄."

"결론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셨겠군요."

"그래. 경비대 서열 3위 이내에서 반역자가 있다는 주장이니까 좋아할 사람이 없겠지."

"저는 용병 기사로 칼마르에 정착했지만 우연히 기회가 닿아서 상단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이고 예민한 시기지요. 여러 사람의 호구가 달린 일이라서 제 책임이 큼니다.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이셨던 제 선친의 명예를 걸고 단언하는데 저는 칼마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이상을 요구하시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여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압력을 가한 사람이 있었나?"

"증거도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까지 보고서에 실었다고 하더군요."

"설마 아렉슨이?"

"아렉슨 경의 전임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여백작은 예상 외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태도도 좀 섞여 있는 미묘한 반응이 뒤따라 나왔을 정도였다.

"모건 경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모건 경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칼마르 시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는 외지인이니까요. 단지 체포된 용병들을 심문해보니 경비대의 운용과 배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가 있어야 말이 되는 부분이 여럿 있어서 그대로 보고했을 뿐입니다."

"아렉슨 경은 아니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고서를 제출할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그냥 단순히 무능하고 눈치가 없는 남자에 지나지 않더군요."

"눈치가 없는 것은 맞지. 그리고 사무 담당도 아니야."

"지시를 받아서 배치를 바꿀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지시를 내릴 인물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경비대의 조장들 역시 아니지."

"지시에 따르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달 나오는 월급, 매일의 평온한 생활이 중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역시 모건 경인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증거는 없습니다. 음모를 꾸민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영리한 놈입니다. 꼬리를 너무 잘 잘라 놓아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중간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터에서 10년 넘게 굴렀다는 놈들이 자기 의뢰주가 누군지도 모르더군요. 단지 그들이 약속받은 지원이나 실제로 지원이 일어난 일로 유추해보았을 뿐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윌리엄. 나는 재판관이 아니다. 물증과 증인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이 부족해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존재다. 그에 따른 책임 역시 나 자신이 진다."

18살이다.

지구였다면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자다.

그런데 벌써 부터 이런 태도라니.

이건 타고난 군주 아닌가?

도대체 전대 칼마르 백작은 자기 자식에게 어떤 엘리트 교육을 시킨 걸까?

"윌리엄. 그대의 노고에 대해 따로 보답하고 싶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뭐든지 자기가 한 일에 비해 과하게 받으면 빚이 되는 법입니다. 저는 충분한 보수를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이 일은 이것으로 마무리를 하겠다. 윌리엄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나머지는 내 일이다."

"신께서 백작님을 축복하시길."

그만 가라는 말이다.

한 가지  더 남아 있는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랫 사람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여백작이 직접 와서 의뢰를 하는 일이라니!

들으면 무조건 해야 하잖아!

그건 진짜 골치아픈 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앞에 앉아 있는 칼마르의 여백작은 그냥 18살짜리 여자가 아니다.

잘 훈련된 정치인이자 전제 권력을 쥔 영주다.

그런 자의 의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잘 가라는 내 인사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호가 된 모양이었다.

여백작의 옆에 시립하고 서 있던 중년의 시녀에게서 흰빛이 튀어나왔다.

옆구리를 두르고 있던 허리띠가 마치 화살처럼 날아온 것이다.

죽일 셈인가!

명백하게 살기가 섞인 공격이 내 이마를 향했다.

나는 상체를 비틀며 의자를 박차고 뒤로 물러섰다.

탁자 너머 나를 따라온 허리띠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이번에는 내 목을 노리고 낭창댔다.

나는 양쪽 아래팔로 허리띠를 쳐내며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 짧은 사이에도 허리띠는 연달아 나를 타격해대서 양쪽팔을 그대로 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허리띠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님을 맞이한답시고 맞춰입은 장옷과 그 안쪽 옷의 팔이 완전히 찢겨서 너덜너덜해졌다.

그 사이로 내 팔을 보호해 준 가죽 완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완갑도 무사하지 않아서 곳곳에 긁히고 파인 자국이 역력했다.

나를 한바탕 두드려 댄 중년의 시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허리띠를 툭툭 두르렸다.

축 늘어져 있던 허리띠가 차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빳빳하게 일어섰다.

이제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허리띠가 아니라 검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살기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이것들이 권력을 가졌다고 지들 멋대로 굴어?

그냥 다 죽여 버려?

내가 피워올리는 살기를 모두 눈치챌 정도가 되었을 때,

중년의 시녀는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다시 축 늘어진 뱀처럼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검을 허리에 감으며 여백작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비명횡사 할 일은 없겠습니다. 백작님."

시녀의 말에 여백작은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천천히 마셨다.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는 여백작을 보며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대화가 가능한 분위기가 되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여백작은 조금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윌리엄. 당신에게 할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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