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불꽃 (4)
‘여기가 끝인가? 진짜 정신없이 움직였네.’
강현수가 뻑뻑해진 눈두덩이를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강현수라고 해도.
사람은 사람이다.
이렇게 긴 시간 휴식 없이 움직이면.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비교적 빠르게 마무리해서 다행이네.’
아시아 대다수의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차원 게이트 사태는.
일주일이라는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가 되었다.
당연히 강현수 덕이 컸다.
만약 강현수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못해도 수억 명은 죽었겠지.’
또 나라 4~5개 정도는 아예 멸망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강현수의 활약.
세계 플레이어 협회의 대비.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들과 강현수 소환수들의 환상적인 컬래버로 인해.
정말 믿기 힘들 정도의 적은 피해로 대규모 차원 게이트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과거 사례와 피해 규모를 대입해 보면?
침공 규모를 고려했을 때, 지금 입은 피해보다 최소 수백만 배의 피해를 입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이 정도의 피해는.
‘최소화라기보다는 기적에 가깝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예상보다 성과가 좋았다.
그간 해 온 준비들이 제대로 빛을 발한 것이다.
뭐, 아무리 그래도 이번 대규모 차원 게이트 사태를 막아 낸 활약도를 보면.
강현수와 소환수들의 비중이 90% 이상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10% 정도는 세계 플레이어 협회도 활약을 한 거니까.’
아직은 초기 단계다.
세계 플레이어 협회는 점점 강해질 것이고.
그럼 앞으로 활약하는 비율을 점점 늘려 나갈 수 있으리라.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일회용이라지만, 이 정도 숫자의 차원 게이트를 오픈할 수 있다니.’
마왕 그레모리의 공격을 받았던 아틀란티스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강현수가 마왕 그레모리를 소환했다.
“생전의 너였다면 이런 식의 대규모 침공이 가능했을까?”
“지금 시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강현수의 물음에 마왕 그레모리가 즉답했다.
“지금 시기에는 불가능이라? 마력 농도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마력 농도가 짙어지는 시기가 꽤 앞당겨졌다고 치면?”
“저라면 차라리 좀 더 기다렸다가, 더 적은 숫자의 영구적인 차원 게이트를 열었을 겁니다. 일회용 차원 게이트를 여는 건 웬만한 강자를 보내는 게 아닌 한 효율이 너무 떨어지니까요.”
그건 그랬다.
아틀란티스에서도 마왕 그레모리는 마계 귀족급을 투입하는 게 아니면, 일회용 차원 게이트를 열지 않았다.
“그럼 지구를 침공하는 놈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나?”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말해 봐.”
“첫 번째는 지구 전체를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일회용 차원 게이트를 대거 생성했을 경우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인류는 그리 약하지 않다.
강현수의 도움이 없었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기는 했겠지만, 결국 막아 내기는 했을 터였다.
“두 번째는 최대한 빨리 무리를 해서라도 지구를 빠르게 점령할 필요성이 있는 경우입니다.”
“너같이 다른 마왕에게 쫓기고 있는 경우겠군.”
“그렇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지구를 침공하는 마왕의 서열이 저보다 월등히 높을 경우입니다.”
“이 정도 대규모 차원 게이트를 오픈하는 걸 가벼운 잽 날리기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 서열 마왕이다?”
“그렇습니다. 굳이 효율을 따질 필요 없이 지구의 마력 농도에 맞춰 그때그때 최대치의 전력을 쏟아부으면.”
“효율은 최악이겠지만, 그에 비례해서 지구의 마력 농도가 빠르게 올라가겠군.”
강현수가 마왕 그레모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휘하 세력의 손실을 신경 쓸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그 무엇보다 창조의 권능을 모으는 게 최우선 목적이라면 이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으흠.”
마왕 그레모리의 대답을 들은 강현수가 고민에 빠졌다.
첫 번째나 두 번째 경우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느껴졌던 걸 생각하면.
‘세 번째일 확률이 꽤 높을 수도 있겠어.’
상대가 게임에서 치트키를 친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했다면?
병력의 손실 정도는 무의미할 정도의 강자라면?
효율이 최악이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속도만 우선시하면 그만이었다.
‘가이아가 가진 창조의 권능을 노리는 건가?’
한 차원을 점령한다는 건.
단순히 마기를 키우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마족들에게는 그렇지만, 마왕에게는 사정이 다르지.’
차원 하나를 점령하면.
그 차원의 만들어 내는 데 투여된 신의 권능을 먹어 치울 수 있다.
그 무엇보다 창조의 권능이 필요한 마왕 입장에서는.
많은 차원을 점령하면 점령할수록.
‘강해질 수 있지.’
다른 마왕을 잡아먹는 것보다는 효율이 극도로 떨어지겠지만.
반대로 위험도 역시 줄어든다.
‘답답하네.’
가이아 시스템이 플레이어들을 탄생시켜 마왕들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직접 강림하거나, 아니면 아예 마왕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는 없는 건가?’
그랬다면 이렇게 골치를 썩을 일도 없었다.
‘뭐, 그럴 여력 자체가 없어 보기는 하지만.’
그나마 가이아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플레이어를 탄생시키고.
확실한 보상을 준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 같았다.
강현수가 손을 휘저었고.
사라라락!
마왕 그레모리의 모습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첫 번째든 두 번째든 세 번째든.
지금의 강현수로서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지구의 전력을 최대치로 상승시키고.
언제든 한 몸처럼 힘을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했다.
‘유럽이 난리라.’
강현수에게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첩보 기관이 수집한 중요한 정보들이 항상 날아든다.
‘사실 이건 보고를 따로 받을 필요도 없었지.’
왜냐하면.
인터넷만 켜 봐도 시위에 한창인 유럽의 상황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 밖의 일이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현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일이었다.
시위의 목적은 자국을 긴급 개입 조치 동의국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왜 유럽 국가들이 긴급 개입 조치 비동의국으로 남아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아마 자기들끼리 연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EU 가입국들은.
초기 대격변 이후 차원 게이트 사태로 인해 큰 위기를 겪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던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몬스터 필드가 생긴 적도 없었다.
거기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도 가입해 있었다.
‘굳이 추가로 뭘 더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겠지.’
특히 차원 게이트 사태가 발발하면 자신들의 동의 없이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의 군사력이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은.
무조건 막고 싶을 것이다.
‘중국, 러시아, 인도를 너무 일찍 먹었어.’
차라리 미국, 대한민국, 신한민국, 일본만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한 상태였다면?
EU 가입국들 중 한두 국가 정도는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인도가 끼면서.
유럽의 경계심이 더욱더 증가했다.
‘어차피 세계 플레이어 협회 가입국이고, 급하면 그때 도움을 요청하면 그만이니까.’
EU 가입국의 정치인들도 국민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 아시아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차원 게이트 사태로 인해.
‘여론이 돌아섰어.’
아시아에서 벌어진 차원 게이트 사태가 언제 유럽에서 재현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EU 가입국의 국민들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유럽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대한민국, 신한민국, 일본이 서로 손을 잡고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는 현 상황을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군사 동맹인 나토를 포함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이 컸지.’
애초에 나토 자체가 냉전 시절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 동맹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 자원을 유럽 국가들이 사들이면서 일종의 공생 관계가 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게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한데 갑자기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대한민국, 신한민국, 일본이 하나로 힘을 합치자.
당연히 유럽의 경계심은 급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강현수 때문이었고.
목적 자체도 지구를 지키자는 순수(?)한 마음이었지만.
유럽의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경제력과 군사력 최상위 국가들이 손을 잡고 전 세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으리라.
원인이라도 알면 덜 불안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대한민국, 신한민국, 일본이 손을 잡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고.
미국, 중국, 러시아 중 어느 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지 궁금해했다.
한데 의문이 다 풀리기도 전에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로 인해.
국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꽤 골머리가 아프겠지.’
긴급 개입 조치 동의국이 되는 일은 EU 가입국 입장에서 당장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아주 천천히 진행하는 게 이득이었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 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꼭 필요한 상황이 되어야.
‘고민 정도 하겠지.’
곧바로 긴급 개입 조치 동의국이 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민이었다.
한데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로 인해 국민들이 들고일어났고.
일이 꼬여 버렸다.
‘기왕 꼬인 거, 더 꼬이게 해 주마.’
강현수 입장에서는.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직접 개입하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 * *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이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하라는 국민들의 시위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에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심도 있게 논의 중이다.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 문의를 해 봤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일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굳이 긴급 개입 조치 동의국이 아니더라도 세계 플레이어 협회 소속이면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면서 어영부영 시간을 끌고 있었다.
현재 유럽 각국 지도자들의 생각은 모두 동일했다.
-시간만 끌면 그만이다.
-아시아 차원 게이트 사태를 보고 놀라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금방 잊어버릴 거다.
-지금은 감정에 휩쓸려 저러지만 시간이 흐르면 냉정을 찾을 수 있다.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 이 이상으로 끌려다닐 수는 없다.
이런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데.
또 적지 않은 나라에서 그게 나름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다.
시위를 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크룽은 시간 그만 끌어라!
-당장 내일이라도 프랑스에 차원 게이트 사태가 터지면 어떻게 할 거냐!
-당장 긴급 개입 조치에 동의하라! 동의하라!
-긴급 개입 조치 반대하는 마크룽은 사퇴하라! 사퇴하라!
자유의 나라.
혁명의 나라.
시위의 나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