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오만 (4)
강현수가 러시아로 이동하기 직전.
러시아의 플레이어 부대는 참담하게 패배했다.
그나마 전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끝까지 싸우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퇴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개죽음당하기 싫어!”
“도망쳐!”
“으아아아아!”
뭐, 공포에 질려 도주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퇴각이라기보다는 탈영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플레이어 3만여 명 중 절반가량이 전사했고.
나머지 절반은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그나마 고레벨 플레이어의 경우 1,500여 명 중 2/3에 해당하는 1천여 명이 생존해 중레벨 플레이어들보다는 생존율이 높았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절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대규모 포격을 날리고 미사일을 쏴도 별다른 피해가 없다.
플레이어들은?
1만 5천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 말은.
현실적으로 러시아의 자력으로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대도시 첼랴빈스크는 이미 언데드 몬스터 대군에게 쓸려 나간 지 오래였고.
현재 언데드 몬스터 대군은 엄청난 속도로 러시아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키며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미사일을 비처럼 쏟아부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플레이어 전력을 끌어모았지만, 대부분이 중저레벨 플레이어들이라 승산이 없습니다.”
포틴 대통령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긍정적인 보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빌어먹을.’
만만하게 생각했던 언데드 몬스터 대군에게 엄청난 대패를 당했다.
특히 현대 무기가 전혀 통하지 않고.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패배한 게 컸다.
‘플레이어 놈들이 도주하지만 않았어도.’
포틴 대통령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플레이어들이 퇴각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플레이어들을 원망해야 했다.
아니, 이번 일의 책임을 플레이어들의 탈영과 도주로 몰아가야 했다.
“핵이 아니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자국 영토에 핵을 쏘자니, 지금 미친 거요?”
“그럼 저놈들을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오? 모스크바가 함락당하면 지금까지의 피해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의 대참사가 발생할 거요.”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이자.
인구 1,200만이 사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나게 큰 대도시다.
“그래도 핵을 쏠 수는 없습니다!”
“핵밖에는 방법이 없소.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핵을 쏴야 하오!”
“그런데 핵이 통할 거라는 보장은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핵도 적중을 해야 파괴력이 있는 법 아닙니까? 다른 미사일처럼 공중에서 폭발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에.
포틴 대통령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고.
각부 장관과 군사령관 그리고 참모 들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방사능이 러시아 전역으로 흩뿌려질 겁니다. 저놈들은 아마 멀쩡하겠지요. 이미 죽은 시체가 방사능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핵무기의 무서운 점은 강력한 폭발력과 복사열 그리고 방사능이다.
그러나 그것도 적중하지 않고 공중에서 터지면?
인간이 아닌 언데드 몬스터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인간은 복사열에 화상을 입거나 실명을 하기도 하고.
방사능에 피폭되어 사망하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입는다.
하나 죽은 시체인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화상, 실명, 방사능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핵은 보류하도록 하지.”
포틴 대통령이 핵 카드를 포기했다.
자국의 영토에 핵을 쏘는 것 자체도 미친 짓이었고.
언데드 몬스터에게 큰 효과가 없을 거라는 점에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미리 핵무기를 땅에 파묻어 놓았다면 모를까.
미사일이나 공중 폭격 정도로는 핵무기를 칠흑빛 뇌전의 보호를 받는 언데드 몬스터들에게 적중시키기 불가능해 보였다.
자칫 리치가 핵미사일의 방향을 틀어 버리기라도 하면?
핵 카드는 이득은 하나도 없이 손실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다.
“언데드 몬스터 대군이 1시간 안에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때 최악의 보고가 들어왔다.
애초에 리치 아르타스의 목표는 이틀 안에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마계 백작이 되지 못해도 이틀 안에 도착했을 판인데.
계획보다 빨리 승급을 하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하루 하고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에 도달하게 생긴 것이다.
‘미치겠군.’
포틴 대통령은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언데드 몬스터의 준동이 발발하고 일주일이 지난 것도 아니고 한 달이 지난 것도 아니다.
고작 하루가 넘었을 뿐인데.
수많은 러시아의 도시들이 초토화되고.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해 버렸다.
정신이 멍했다.
이게 현실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통령 각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타국에 도움을 요청하시지요!”
각부 장관과 군사령관 그리고 참모 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국제기구인 세계 플레이어 협회에 도움을 청하시오.”
결국 포틴 대통령이 결정을 내렸다.
핵을 쏜다고 해도 자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데 해외 통신망을 복구하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1시간 안에 지원군이 올 수는 있는 건가?”
국방부 장관의 물음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겁니다.”
외교부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국제기구인 세계 플레이어 협회는 그 명성과 달리 자체 플레이어 전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상식적으로 어느 국가가 국제기구에 자국의 실력 있는 플레이어들을 상시 배치하겠는가?
그냥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뽑아서 파견하면 그만이지.
상시 대기할 필요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세계 플레이어 협회가 나서는 경우.
문제를 인지하고.
미국을 비롯한 회원국에 파견을 요청하고.
그렇게 구성된 플레이어 연합군이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회원국에 협조문을 보내고.
회원국에서 플레이어를 뽑고.
그들을 한곳에 모아 보내려면?
말 그대로 한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1시간은커녕.
세계 플레이어 협회 소속 연합군이 하루 만에 도착해도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상황인 것이다.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를 이용하면?”
포틴 대통령이 물었다.
러시아에도 당연히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가 있었다.
국가 수뇌부의 안전을 위해 웬만해서는 동원되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 아니겠는가?
“아무리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라고 해도,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플레이어의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족이 끼어 있는 10만의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막을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를 통해 보내는 건 무리입니다.”
“설사 인원 제한이 없는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가 있다고 해도, 1시간 안에 10만에 달하는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막을 만한 전력을 세계 각국에서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은 시간이 너무 적었다.
하루가 넘는 시간이 있었다면?
세계 각국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적이라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언데드 몬스터 대군의 모스크바 침공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는.
설사 전 세계가 러시아를 돕기 위해 일치단결하는 기적이 벌어지더라도.
물리적으로 플레이어 병력을 모으고 파견하는 게 불가능했다.
“국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리시오.”
포틴 대통령이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총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가 없이 내려진 대피 명령이다.
남은 대피 시간도 1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황.
갑작스러운 지시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차량과 사람이 뒤엉키고 모스크바 전체가 난장판으로 변하리라.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대피 명령을 너무 늦게 내렸다.
아마 모스크바에 살아가는 러시아 국민들의 대다수는.
‘죽겠지.’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또한 일선 군부대와 플레이어들에게 총공세를 명령하시오.”
포틴 대통령이 추가 명령을 내렸다.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온갖 포탄과 미사일을 쏟아부어도.
칠흑빛 뇌전 구름 때문에 중간에 폭발해 버린다.
플레이어들은?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다.
“그래도 저놈들의 힘을 조금은 소비시킬 수 있을 것 아닌가?”
노기 어린 포틴 대통령의 한마디에.
“알겠습니다.”
“당장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각부 장관과 군사령관 그리고 참모 들은 알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들을 불러오시오.”
애써 노기를 가라앉힌 포틴 대통령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금 전까지 참담한 표정이던 각부 장관과 군사령관 그리고 참모 들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래, 여기 가만히 있다가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국가의 수뇌부가 몰살하면 나라는 망한다. 내 조국 러시아를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고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군과 플레이어를 끌어모으면 충분히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쓸어버릴 수 있다.’
‘문제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건데.’
‘이런 일은 역시 총리가 지겠지?’
‘나는 아닐 거야.’
각부 장관과 군사령관 그리고 참모 들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
“드리트미, 미하엘.”
포틴 대통령이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대들이 모스크바를 지켜 줘야겠네.”
포틴 대통령의 한마디에.
러시아의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할 수 있겠지?”
포틴 대통령의 물음에.
“물론입니다, 대통령 각하.”
“목숨을 바쳐 모스크바를 사수하겠습니다.”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럼 뒷일은 부탁하네.”
그 말과 함께 포틴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부총리와 각부 장관들 그리고 대통령궁 참모들이 자리를 떠났다.
“망할.”
“모스크바와 함께 죽으라는 거군.”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둘의 임무는?
모스크바와 함께 죽는 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러시아 역사에 길이 남을 역적이 되겠군.”
“이 모든 실책은 우리의 책임으로 기록되겠지.”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은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원흉으로 알려질 것이다.
틀림없었다.
왜?
자신들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희생양으로 선택된 이에게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자신의 정치생명을 이어 가려 했을 테니까.
“이대로 곱게 죽을 생각인가?”
총리 드리트미가 군사령관 미하엘에게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아니, 애초에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소?”
총리건 군사령관이건 결국은 포틴 대통령의 꼭두각시일 뿐.
여기서 반항해 봐야 비참한 죽음과 함께 역사에 더 처참히 기록될 뿐이었다.
“결국 곱게 죽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
“최대한 열심히 싸워야 할 거요. 그래야 그나마 우리의 명예가 조금이나 보존될 수 있을 테니까.”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역적이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목숨 걸고 싸우다 죽었다.
이게 총리 드리트미와 군사령관 미하엘이 노려 볼 수 있는 최상의 포지션이었다.
막말로 신이 지상으로 강림하사.
언데드 몬스터 대군을 쓸어버리고 모스크바를 구원하지 않는 한.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포틴 대통령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텐데.’
아니, 한 방 먹이는 수준이 아니라.
이번 사태의 원흉인 포틴 대통령을 처벌하고.
러시아의 영웅이 되어 권력을 움켜쥘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고.
총리 드리트미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군사령관 미하엘은 군부의 수장으로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 * *
한편 그 시각.
“이놈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야?”
강현수가 초토화되어 버린 러시아 도시들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다른 도시로 가 볼까?’
소피아는 공간 이동 스킬이 쿨타임 중이지만.
다른 공간 이동 스킬 보유자를 부르면 문제는 해결된다.
‘일단 직접 움직이자.’
공간 이동 스킬로 이동하면 그만큼 빠르지만.
허탕을 칠 확률이 높다.
반대로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 직접 추격하면?
조금 느리지만 확실했다.
타악!
강현수의 몸이 가볍게 땅을 박차며 올랐고.
그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언데드 몬스터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