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2)
-내 승리다, 인간들아!
마룡 카라스는 피투성이 몸으로 승리를 선언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와 반대로 척살대원들은 23명이 간신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체력과 마력이 상당 부분 고갈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23명 중 11명이 힐러였다.
탱커들의 필사적인 보호로 살아남기는 했는데.
정작 힐을 줄 대상의 태반이 전멸해 버린 것이다.
“으흠.”
권황 차르토샤 대공이 얼굴을 찌푸렸다.
안티 힐을 가진 수인족 소년 덕분에 선전하기는 했지만.
승기가 너무 희박했다.
‘차라리 대도시 바란을 끼고 방어할 것을.’
타 차원 출신 거대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을 마룡과 상잔시킬 생각으로 척살대를 조직했다.
마룡이 수작을 부려 갑자기 강해지지만 않았어도 성공적인 계획이었을 텐데.
‘모든 게 어그러졌어.’
정치적인 목적을 배제했다면?
타 차원 출신 거대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허무하게 산화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타 차원 출신 거대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의 전력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진작 로크토 제국에 추가 지원 요청을 했다면?
온갖 가정이 떠오르며 아쉬운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또 그들의 희생이 아주 헛된 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자신들도 지쳤지만 마룡도 지쳤다.
자신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 그리고 칼무스 공작이 전력을 다해 급소를 노린다면?
마룡을 쓰러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쩌면 마룡과 동귀어진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는 없지.’
스스로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명예를 실추당하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기는 했지만.
‘살아야 명예도 누릴 수 있는 법이지.’
때마침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은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로크토 제국 황제의 황명.
황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자신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의 명예를 어느 정도 지켜 줄 것이다.
로크토 제국에서도 필사적으로 변호를 해 줄 것이고 말이다.
‘문제는 마룡을 붙잡아 두는 건데.’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이 간다고 마룡이 곱게 보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원래 전진보다 퇴각이 더 힘든 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허무하게 무너져 죽을 수도 있다.
‘후전을 든든히 세워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존재는.
‘칼무스 공작이라면 충분하겠지.’
그간 내심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해 목숨을 버리고 필사의 거래 스킬을 사용한 칼무스 공작의 실력은 자신에 버금가는 수준.
‘거기에 다크 나이트까지 함께해 준다면.’
다크 나이트는 이제 고작 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죽기 직전 스스로의 마력을 폭발시켜 마룡에게 조금의 상처라도 입히고 죽었다.
남은 둘도 그래 준다면?
자신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의 생존 확률이 더 상승할 것이다.
“이제는 승부를 봐야 하네. 우리가 모두 함께 공격해 마룡의 숨통을 끊으세.”
권황 차르토샤 대공의 말에.
“그래야겠군.”
무존 즈도라프 공작도 맞장구를 쳤다.
“자네가 선두에 서 주게.”
권황 차르토샤 대공이 칼무스 공작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칼무스 공작이 선선히 승낙했다.
선두가 가장 위험하겠지만.
칼무스 공작은 어차피 스스로의 목숨을 버린 상태.
얼마 남지 않은 생이 마룡의 숨통을 끊는 초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
“자네들도 함께 나서 줄 수 있겠나?”
권황 차르토샤 대공이 도왕과 화염의 기사에게 물었다.
다크 나이트로 활동하던 검귀와 마도기사 등의 소환수는 모두 소멸하고 남은 건 도왕과 화염의 기사뿐이었다.
“그렇게 하겠다.”
도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또 설사 소멸하더라도 그들의 창조주인 강현수가 얼마든지 부활시켜 줄 수 있다.
“그럼 가지.”
살아남은 척살대원들이 진형을 갖췄다.
마룡 카라스 역시 척살대원들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인지 만반의 대비를 했다.
어차피 날개가 잘려 나가고 전신이 상처투성이라 기동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
마룡 카라스의 입장에서도 살길은 이 자리에 있는 척살대원을 모두 제거하는 것밖에 없었다.
타악!
칼무스 공작이 선두에 섰고.
그 뒤를 도왕과 화염의 기사 그리고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을 비롯한 생존한 척살대원들이 뒤따랐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마룡과 척살대원들이 마지막으로 격돌한 순간.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전장을 이탈했다.
“이게 무슨?”
칼무스 공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미친놈들!”
강현수의 입에서도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큭큭큭!
마룡 카라스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로의 모든 것을 담은 마지막 격돌이었다.
그 순간 적들 중 가장 강한 전력이 빠져나갔다.
그 말은?
-나의 승리다!
마룡 카라스의 외침과 동시에.
콰직!
다른 척살대원들의 몸이 터져 나갔고.
필사적으로 버티던 칼무스 공작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커억!”
목숨을 잃었다.
강현수, 송하나, 투황은 도왕과 화염의 기사 덕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대가로 도왕과 화염의 기사가 소멸했다.
-아슬아슬했는데. 강한 놈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승급이 빠르군.
사아아아악!
척살대원들이 죽었던 자리에서.
다시금 무시무시한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우득! 우득!
그리고 마룡 카라스의 모습이 변했다.
네 개의 뿔은 여섯 개로 늘어났고.
잘려 나간 두 쌍의 날개를 대신해 새로운 날개 세 쌍이 자라났다.
부상도 꽤 많이 회복되었고 소모된 마력도 어느 정도 차올랐다.
스윽!
마룡 카라스의 시선이 강현수, 송하나, 투황에게 향했다.
-네놈들은 잠시 후에 죽여 주마.
휘이이익!
그 말을 끝으로 마룡 카라스가 날개를 펼쳐 열심히 도주 중인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을 추격했다.
강현수, 송하나, 투황이 강하다고 해 봐야 랭커 수준.
도망쳐 봐야 독 안에 든 쥐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은 지금 잡아 죽이지 않으면 상당히 골치 아픈 위협적인 적이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들이 빠지면 남은 척살대가 순식간에 죽어 나갈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은 벌어 줄 것이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날개를 잃고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기동성이 극도로 저하된 마룡이 먼저 도주하기 시작한 자신들을 추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설마 한 번 더 성장을 할 줄이야.’
‘우리가 오판을 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울 것을.’
‘그랬다면 이겼을 수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권황 차르토샤 대공과 무존 즈도라프 공작이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콰직!
권황 차르토샤 대공의 몸에 마룡 카라스의 손톱이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고.
으드득!
무존 즈도라프 공작의 머리가 마룡 카라스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죽기 직전에 후회를 해 봤자.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골치 아픈 놈들을 모두 정리했군.’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다행히 연속적인 두 번의 승급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역시 아틀란티스 차원은 축복받은 곳이구나.’
수하들을 모두 잃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큰 위기도 겪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무려 두 번의 승급을 했으니까.
‘안티 힐을 사용한 인간만 죽이고 몸을 피한 후 상처를 회복한다.’
인간들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모른다.
추가 지원군이 오는 중일 수도 있고.
화들짝 놀라 대도시 바란을 버리고 후방에서 방어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도박을 할 때가 아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마룡 카라스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체다.
용종 특유의 강인한 육신과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진 승급 덕분에 체력과 마력이 소량 회복되기는 했지만.
‘거의 한계다.’
하지만 그 한계 상태에서도 자신을 괴롭혔던 놈을 제거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절대 살려 둘 수 없다.’
안티 힐.
그건 마룡 카라스에게 있어 엄청나게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호오, 도망가지 않았군!
안티 힐을 사용한 인간.
지금쯤 죽어라 도망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멀쩡히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삶을 포기한 건가? 왜 다른 놈들처럼 도망치지 않았지?
마룡 카라스가 안티 힐을 사용한 인간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덤벼들었던 인간들 중 안티 힐을 사용한 인간과 그 동료로 보이는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망쳤다.
대도시 바란을 지키고 있던 병력조차도 패배가 확실시되자 모두 달아났다.
그런데 왜 안티 힐을 사용한 저놈은 도망치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
안티 힐을 사용한 인간의 물음에,
-큭큭큭!
마룡 카라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삶을 포기했다고 하기에는 눈빛이 당당해 의아했는데.
-그냥 미쳐 버린 거였구나.
정신 줄이 나가서 그런 거였다.
“미치기는 무슨. 난 그저 널 사냥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날 사냥하겠다고?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마음 같아서는 오랜 시간을 들여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곱게 빨리 죽여 주마.
마룡 카라스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안티 힐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죽여.”
안티 힐을 사용하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아아악!
마룡 카라스의 몸 주변에서 거대한 마력이 요동쳤다.
그리고 인간과 용종 몬스터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수작을?
화들짝 놀란 마룡 카라스가 방어 스킬을 발동시켜 전신을 보호했다.
그 한 수가.
꽈아아아앙!
마룡 카라스의 목숨을 살렸다.
-크아아앙!
하지만 목숨만 살렸을 뿐.
적잖은 부상을 입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만약 방어 스킬을 발동시키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이놈들은?
마룡 카라스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천의 병력을 보며 경악했다.
-네놈이었구나!
자신의 권속인 용종 몬스터들을 빼앗은 상대.
자신을 죽이려던 인간들 틈에 있던 인간이 아닌 존재들, 그들은 모두 저놈의 소환수였던 것이다.
“그걸 이제 알았어?”
안티 힐을 사용하는 인간이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크윽!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저 인간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콰콰콰콰!
파지지직!
꽈아앙! 꽈아앙! 꽈아앙!
수천의 병력이 오러를 비롯한 갖가지 공격 스킬을 퍼부으며 마룡 카라스를 공격했기에.
저 인간을 찢어 죽이기는커녕.
자신이 갈가리 찢겨 죽을 판이었다.
-이놈들은?
마룡 카라스는 자신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는 인간 형태의 소환수들을 보고 경악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자신의 손에 죽었던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꽤 잘 버티네. 하지만 이 두 녀석이 합류하면 어떨까?”
안티 힐을 사용하던 인간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 자신이 죽인 권황과 무존이 있던 자리로 이동해.
“연대 구성.”
짧은 한마디를 내뱉었고.
사아아아악!
그 순간 마룡 카라스가 제거했던 인간들 중 가장 까다로웠던 두 사람이.
다시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