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2화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니?”
보름 뒤,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 모아온 힐탄은 왕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왕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제가 그들을 죽인 건 맞지만 그들은 제가 한 짓이란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왜 알 수 없다는 거지?”
“저는 한 번도 제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으니까요.”
말 그대로였다.
힐탄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 일부러 슈리오로 위장한 것.
그리고 목격자도 모두 죽이고 일부러 시선을 돌리기 위해 불까지 질렀는데 어떻게 네 왕국 전부 힐탄의 소행이라고 딱 짚어 말할 수 있었을까?
“그 말이 정말인가?”
“예, 모든 기척을 읽어 들인 후 일부러 목격자들을 제거하고 후에 진입해서 처리한 일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왕국에서 언급한 자들은 모두들 제가 죽이고 직접 죽음까지 확인한 자들인데 그들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사신들의 말마따나 왕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군주가 직접 읍소했다는 말이 될 텐데 사군주는 힐탄이 직접 죽이고 죽음까지 확인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힐탄의 말에 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힐탄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현재 상황에서 그 사실에 대한 진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려울 테니까.
왕이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힐탄이 말했다.
“그럼 우선 저한테 피해를 입었다는 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해자들을?”
“예,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되서 아무래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만약 그들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어찌할 텐가?”
“그때는 제가 마땅히 책임을 물겠습니다. 이건 제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니 책임을 회피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그대는 참 책임진다는 말을 쉽게도 말하는군.”
“죄송합니다, 폐하.”
그러나 왕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못 했다.
상황은 심각했고 현재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 누군가 책임을 지긴 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힐탄도 진실을 확인해 보고자 한 것.
물론 책임진다는 말이 듣는 이에 따라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힐탄은 확신이 있었다.
이번 사건에는 어떠한 사술이 있을 거라는.
힐탄은 왕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끌어달라고 이야기 한 뒤, 부하들이 있는 별관으로 돌아왔다.
“잠시 엘더산에 좀 다녀와야 될 것 같다.”
“엘더산이라면…….”
“리치가 있는 그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힐탄은 부하들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부하들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단장님이 일을 그리 허술하게 하셨을 리가 없으실 텐데.”
“그리고 한두 명도 아니고 하필이면 사군주회 인원 전부가 비호받는 왕국에 같은 시기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수상합니다.”
“넷 다 살아 있다는 것도 수상하구요.”
“단장님, 그럼 엘더산에 가시자는 이유가 설마…….”
부하 하나가 힐탄을 올려다보자 힐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엘더산의 주인에게 도움을 청해서 이번 일을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자라면 이번 일에 얽힌 사술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으니.”
“하지만 거긴 혼자 가시기엔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희도 같이…….”
“아니, 그런 곳에 우르르 몰려가 봤자 좋을 것 없어. 내가 자릴 비운 사이,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아이릭 왕국의 전력을 보강시켜라. 그건 오직 내게 가르침을 배운 너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와 더불어…….”
힐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들 외지 생활로 감들을 잃었잖아? 이참에 푹 쉬면서 감이나 되찾아둬.”
그 말에 부하들은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했고 그저 대답만 해 보일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녀오마.”
힐탄은 그 즉시 엘더산으로 떠났다.
*말을 타고 꼬박 며칠을 달린 끝에 힐탄은 엘더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은 일부러 해가 뜨자마자 올랐다.
엘더산의 주인은 밤이 되면 그 힘이 배가 되니까.
산을 한참 동안이나 뒤지던 끝에 힐탄은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산짐승의 시체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 근처에 있겠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아 하니 밤중에 죽임을 당해 걸린 모양.
그렇기에 더더욱 확신했다.
저건 엘더산 주인이 매일 밤마다 행하는 일종의 의식이었으니까.
힐탄은 주변을 다시 돌았다.
그리고 발견한 짐승 시체 하나.
그리고 또 돌았다.
또 발견한 시체 하나.
이제 하나만 더 찾으면 된다.
이번 건 작을 테니 찾기가 어려울 테지.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낮은 바위 근처에 꼬챙이로 꿰인 토끼 시체를 발견했다.
힐탄은 발견한 시체들로부터 중심점이 되는 곳을 찾았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작대기로 선을 그어 보니 금방 중심점을 찾을 수 있었다.
중심점.
그곳은 평범한 흙바닥이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보통의 흙바닥이 아니었다.
힐탄은 칼을 뽑아 오러를 뿜기 시작했다.
화화화화화!
오러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뿜어진다.
힐탄은 그것을 뽑아든 칼날에 모았다,
그러자 타오르는 오러가 차츰차츰 줄어들면서 검날을 푸르게 변색시켰고 마침내 모든 힘이 모였을 때 힐탄은 지진 인두처럼 중심점에 칼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칼날에 응축된 오러는 순간 거대한 화력을 뿜더니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안에 쥐구멍처럼 숨어 있던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쥐구멍이라기엔 컸다.
멧돼지…… 아니 사람 여럿은 우습게 들락날락 거릴 수 있을 정도로.
힐탄은 그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굴속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복도가 나타났다.
횃불 하나 없는 그곳은 이상하리만치 밝았고 긴 복도를 쫓아가자 그 끝에는 커다란 공동이 있었다.
안에는 웬 석상이 하나 있었다.
석상은 권좌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힐탄은 그것에게 말을 건넸다.
“모른 척 그만 하고 이제 그만 반겨 주지 그래?”
침묵하는 석상.
그 모습에 힐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석상의 목에 기다란 실금이 가더니 빠드득! 소리를 내며 석상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석상의 잘린 목 단면으로부터 시커먼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석상이 아니었다.
일종의 그릇이었다.
출구가 생긴 그것은 연기를 뿜어냈으며 연기는 곧 시커먼 구름이 되어 공동 한켠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속에서 누렇게 빛나는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마치 메아리처럼 공동을 울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피를 차게 식게 하는 목소리.
절대 산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리치’였으니까.
리치, 엘칸.
놀랍게도 엘칸은 그 옛날, 힐탄이 베어 물리친 적 있는 존재이자 힐탄이 베어본 것들 중 유일하게 초월적인 존재였다.
“오랜만이네.”
-우리가 정겹게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잘 생각해 봐. 난 은인이야, 무려 네 목숨을 한 번 살려 준.”
-그 사고 구조가 참으로 놀랍군.
“놀랍다니? 패배의 아픔은 쓰라려도 기억은 똑바로 하자고. 넌 그때 분명히 네가 먼저 우릴 공격했고 난 내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널 베었을 뿐이다. 그리고 네가 물러나자 널 뒤쫓지 않았지. 관용을 베풀었다는 말이야. 그럼 내가 네 은인이 아니면 대체 뭐지?”
힐탄의 논리에 엘칸은 대답하지 못했다.
강자존의 룰에 따른다면 힐탄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한번 힐탄을 공격해 죽일 수도 있긴 했지만 리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다.
좀 전에 그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 힘을 폭발시켰을 때 가늠하였기 때문이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자신은 여전히 힐탄을 이기지 못할 것이란 걸.
그렇기에 성을 낸다거나 먼저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리치는 똑똑한 마법사가 흑화되어 탄생한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지? 나와 과거 이야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맞아. 너와 과거를 안주 삼아 한 잔 마시기엔 추억이 너무 짧지. 너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다, 엘칸 리치.”
-부탁?
“내 기준에선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래도 난 그 일이 초월적인 힘에 의거한 거라고 생각돼서 말이야. 그래서 네 도움을 받으려고 왔어.”
-어이가 없군. 내가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넌 내가 정말로 부탁을 하러 온 것처럼 보여?”
그 순간, 장내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힐탄은 여전히 웃으며 이야기 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감정의 온도가 순식간에 낮아졌기 때문이다.
엘칸은 눈살을 좁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침 보는 눈도 없으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원하는 게 뭐지?
“누군가 목숨으로 장난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도 밝혀야겠고 그 자가 치고 있는 장난의 허물도 벗겨야겠어. 모두가 보는 앞에 서 말이야. 그래서 널 찾아온 거다. 불멸의 존재이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고 있는 너라면 분명히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엘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형체를 뭉그러뜨리고 다시 존재를 빚었다.
그러더니 힐탄에게 작은 손 종을 하나 주었다.
“이게 뭐지?”
-영종이다. 영적인 존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종으로, 그 존재가 만약 이 땅의 규칙에 맞는 자라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고통에 몸부림치며 진짜 모습을 드러내겠지.
과연, 리치는 리치였다.
엘칸은 힐탄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맞추었고 힐탄은 만족스럽게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힐탄이 그것을 품에 넣으며 물었다.
“그럼 이걸 너한테 울리면 너도 고통받는 건가?”
-난 내 스스로 영역을 구축하고 법칙을 비틀었다. 겨우 영종 따위가 내게 영향을 줄 성싶으냐?
“그렇군.”
힐탄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만약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다시 네게 오겠다.”
-흥.
밖으로 나온 힐탄은 다시 오러를 폭발시켜 그의 본거지를 덮어 주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준비를 마친 힐탄은 즉시 아이릭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왕에게 영종을 보여 준 후 즉시 네 왕국에 사신들을 보내 만남을 주선했다.
이번 만남에선 자칭 피해자라 읍소한 사군주회 놈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접선 장소에 다섯 왕국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힐탄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죽은 사군주회 놈들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