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21화
“머저리 같은 놈들.”
화륵!
힐탄은 카트만 상회에 불을 질렀다.
그런 다음 화마가 건물 전체를 뒤덮는 걸 본 뒤에야 자리에서 벗어났다.
‘사군주회의 정체가 카트만 회장이었을 줄이야.’
팔리오를 포섭하는데는 성공했다.
마음 같아선 슈리오 전체를 바로 참수하고 싶었지만 진짜 흑막은 따로 있으니 오히려 그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의뢰를 할 정도의 집단이라면 신중에 신중을 기했을 테니까.
그래서 이중삼중으로 추격전을 펼친 결과, 사군주회 중 하나인 일부를 만날 수 있었고 카트만 회장이 사군주회의 일부라는 걸 보자마자 팔리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파르갈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들이 아닌, 한때 자신이 적으로서 만난 이들의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는 걸.
‘죽여도 별로 뒤탈이 없겠어.’
여기서 말하는 뒤탈은 마음에 남을 찝찝함이었다.
힐탄은 여지껏 자신에게 암살자들을 보낸 이들이 자기들 때문에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이들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진실은 전쟁에 함께 베팅해놓고 잃은 자들이었을 뿐.
힐탄이 다른 추격 팀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힐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흐음.”
활활 타는 카트만 상회 하늘에 잿빛 날개를 가진 이가 나타났다.
질투와 복수의 신, 하노스였다.
그는 뒤늦게 화재를 발견하고 달려든 사람들 사이에 여유로이 안착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신.
마음만 먹으면 필멸자들의 눈에 안 보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재밌는 녀석이군.’
다중으로 추격 작전을 펼친 것도 모자라 일부러 슈리오로 위장해 자신의 왕국에 피해가 안 가게 했다.
또 실력은 어떠한가?
무력 집단으로 유명한 그 슈리오의 부단장과 칼잡이를 홀로, 그것도 단숨에 죽여 없앴다.
‘쉬운 놈이 아니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을까?
아니.
절대 아니었다.
그는 질투의 신이기도 했지만 복수의 신.
그리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화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상처 입은 모습의 카트만 회장이 불길 속에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회장님!”
“지금 당장 풀만으로 간다.”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어서!”
카트만 회장은 분명히 죽었다.
그렇기에 하노스는 카트만 회장이 될 수 있었다.
죽은 이의 몸을 빌리는 것쯤은 신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2군주도, 3군주도, 심지어 4군주까지.
모두 다 과거에 연이 있던 자들이었고 그들을 겁박하는 슈리오 중 그 누구도 힐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미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팔리오였다.
파르갈의 단장이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전성기 시절의 폼을 되찾자마자 이 정도라니……
힐탄이 마지막 추격 팀과 4군주를 베어 버리는 걸 팔리오는 힐탄의 실력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머릴 숙이는 건 잘한 선택이었어. 하지만…….’
아직 한 명이 남은 상황.
그는 다름 아닌 슈리오의 단장, 레흐만이었다.
힐탄에게 용서받은 팔리오는 슬슬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게 원래 자신이 아는 지상 최강의 남자는 단연코 레흐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설이 전성기 폼을 되찾은 지금, 무인으로서 당연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 아래 최고는 하나밖에 존재할 수가 없었으니까.
팔리오가 물었다.
“사군주회를 모두 처리하셨는데 그럼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아직 한 명 남았잖아.”
“한 명이요?”
“너희 대장.”
“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힐탄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기에 팔리오는 힐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팔리오는 신난 마음에 레흐만이 있는 곳으로 힐탄을 안내했다.
그곳은 슈리오가 오래 전부터 휴식처로 쓰이는 곳이었는데 거대한 저택을 개조해 만든 그곳은 슈리오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꽤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힐탄과 팔리오가 저택에 나타나자 그것을 지켜보던 레흐만이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저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역시.’
높이가 최소 사오 미터는 됐는데도 레흐만은 아랑곳 않고 뛰어내려 힐탄 앞에 섰다.
레흐만이 힐탄을 힐긋 본 뒤 팔리오에게 물었다.
“누구?”
“…우리가 의뢰받은 자.”
“그럼 이자가 힐탄이야?”
“응.”
“근데 왜 네가 같이 와?”
그때였다.
서걱!
순간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힐탄의 검에서 뿜어진 것이었으며 빛처럼 빠르게 뿜어진 힐탄의 검은 옆에 있던 팔리오의 목을 베어 버렸다.
툭─ 투르르…… 털썩!
잘린 팔리오의 목이 허공에 잠깐 치솟더니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쯤 목 잃은 그의 몸도 맥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힐탄이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며 말했다.
“이러면 대답이 되었나?”
“……그렇군.”
힐탄의 건조한 물음에 레흐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좀 전에 벌어진 일 하나만으로 모든 게 납득될 뿐.
이어서 레흐만이 물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죽었나?”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아, 참고로 네 의뢰인들도 죽였어.”
“깔끔해서 좋군.”
그 말에 레흐만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얼마 뒤,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더니 뛰어내린 창문으로부터 기다란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뱀처럼 레흐만의 손에 붙었다.
“귀속검인가? 꽤 재밌는 걸 가지고 있군.”
“지금부터가 더 재밌을 거야.”
“그럼 한 수 부탁하지.”
그 순간.
화화화화화화화!!
화화화화화화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오러를 뿜었다.
엄청난 마압이었다.
신체에서 사출되는 마력의 힘을 마압이라고 하는데 마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하다는 증거.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마압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아득히 넘은 어떤 지점에 안착해 있었다.
“간만에 기대를 좀 해 봐도 되겠군.”
“나 또한.”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쩡!
화아아아아아!!
부딪힌 검은 다시 한번 엄청난 압력 폭발을 일으키더니 일순 섬광을 뿜어냈다.
그것은 빛을 동반한 폭풍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빛과 바람의 폭풍이 한바탕 불고 나자 그 안에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땅만 탑처럼 홀로 솟아 있었다.
탑 위에 선 레흐만이 말했다.
“과연 전설은 전설이군.”
“그래?”
그때였다.
“쿨럭!”
레흐만의 입에서 각혈이 뿜어진 건.
그와 동시에 레흐만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아무래도 너무 기대를 한 것 같군.”
힐탄의 말이 끝났을 때, 놀랍게도 레흐만의 한쪽 무릎이 굽혀졌다.
단 한 번.
딱 한번 검을 맞대었을 뿐이다.
서로의 기량을 가늠해 보고 싶어 혼신을 다해 검을 부딪친 건데 아무래도 전설과 감히 기량 차이를 가늠해 보기엔 레흐만의 실력이 너무나도 평범했던 모양.
그렇기에 레흐만의 신체는 전설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다.
흐려진 시야와 가팔라진 호흡, 입에서 뿜어진 각혈은 내장이 망가졌다는 명확한 증거였으니까.
“기회가 되면 다음 생에서 만나지.”
서걱!
힐탄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레흐만의 목을 베어 밟아 쓰러뜨렸다.
“끝인가…….”
사군주회와 슈리오를 모두 죽였다.
자신이 아는 선에선 이제 모든 불행의 굴레를 끊었다.
허나 아직 힐탄의 외출은 끝나지 않았다.
레흐만의 검을 챙긴 힐탄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불행의 고리를 끊었으니 여전히 불행 속에 잠겨 살고 있을 자신의 수하들을 구원하러 가야 했기에.
*“뭐?”
“이 미친놈이……!”
“전쟁 범죄자를 안아 준 것도 모자라 감히 나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내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네 왕국.
그곳에는 놀랍게도 힐탄이 직접 목숨을 거둔 4명의 군주들이 각기 비호를 받고 있는 왕들을 찾아가 피해를 읍소했다.
그로 인해 왕들은 분노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신들을 능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네 군주들은 죽었다.
그들을 움직인 건 다름 아닌 질투와 복수의 신, 하노스일뿐.
“지금이라도 아이릭 왕국에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사신을 보내서 명확히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
“힐탄 그자의 수급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접적인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평화협정 위반입니다!”
명분은 충분했다.
거기에 덧붙여 하노스는 몇 가지 술수를 더해 각 왕국들이 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왕들에게 귀띔했고 분노한 네 왕은 빠르게 긴급 회담을 가졌다.
“토라 왕국도 그랬단 말입니까?”
“지트 왕국도요?”
“텝스 왕국까지 그럴 줄이야…….”
여기에 풀만 왕국까지, 네 왕들은 서로가 입은 피해를 맞춰 보며 생각보다 사안이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풀만 왕국의 왕, 풀만이 사뭇 심각해진 어조로 이야기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더 심각한 것 같은데…….”
“아이릭 왕국이 미친 게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합니다. 진상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왕들이 마냥 멍청하진 않았다.
아무리 아이릭 왕국이 잘못했어도 대륙적으로 잡혀 있는 평화 조약을 함부로 깨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으니까.
‘흐음, 그럼 안 되지.’
그렇기에 하노스가 한 번 더 나섰다.
신은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간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하노스가 신력을 발휘하자 왕들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독을 당했잖소.”
“당장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어쨌든 전쟁 범죄자를 데리고 벌인 일이니 아이릭은 이 일을 해명해야 할 겁니다.”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발화점이 되었다.
모인 왕들은 하루도 고민하지 않고 즉각 아이릭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고 각 나라의 사신들은 왕의 명을 받아 바로 아이릭으로 출발했다.
*“폐하, 풀만 왕국에서 사신이 왔나이다.”
“폐하! 토라 왕국에서도 사신이 왔습니다.”
“폐하! 지트 왕국에서도……!”
“텝스 왕국이…!”
사신들은 거의 동시에 아이릭 왕국에 도착했다.
이미 각자의 사정을 모두 공유받은 터라 놀라는 일은 없었다.
놀란 건 갑작스러운 네 왕국 사신들의 등장에 아이릭만 놀랐을 뿐.
“이게 대체 무슨…….”
왕은 갑작스러운 사신들의 등장에 서둘러 대신들을 소집해 회장으로 사신들을 모셨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나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위가 벌써 일을 시작했구나.’
허나 아직 사위인 힐탄 대장군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
네 왕국이 흥분할 정도면 분명 큰일이 벌어진 건 맞다.
하지만 그래도 한쪽 말만 듣고 모든 걸 진행시킬 순 없는 법.
왕은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사신들에게 힐탄이 돌아오면 다시 부르겠다고 말한 뒤 사신들을 달래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보름 뒤, 왕국을 나섰던 힐탄이 돌아왔다.
자신의 옛 부하들 전원을 데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