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511화 (511/522)

# 외전. 14화

-오지마아!!

로나스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검성을 몸서리치게 혐오하며 소리를 질렀다.

고작 한 번 베였을 뿐이면서 이토록 두려움에 떨다니.

하지만 상처 입은 짐승이 더 무섭다고 로나스는 비명에 가까운 몸서림과 색이 더 짙어진 진분홍빛 벼락을 뿌렸다.

그 공격에 검성은 또다시 몸을 웅크렸다.

파지짓!

전신이 찌릿하다.

척추에 전기가 흘러 전신 마비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가진 기운을 모조리 쏟아부어 오러로 두꺼운 갑옷을 만들어 둘렀다.

효과는 있었다.

신의 분노를 직격탄으로 맞았는데도 몸이 움직이는 걸 보면.

하지만 이런 식의 공방을 계속 이어나갈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공격을 마지막처럼 쏟아부어야만 했다.

검성은 날아갈 뻔한 의식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먹이를 노리는 송골매처럼, 검성의 투지 넘치는 두 눈은 정확히 겁먹은 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웅크렸던 검성의 몸이 활짝 피어나며 동시에 검을 들어 올렸다.

찬란한 봉혼검은 유니콘의 뿔처럼 솟았고 그 즉시 검성의 어깨 근육을 시위 삼아 아래로 강렬하게 떨어졌다.

서걱!

아까와 같은 감각.

손끝이 짜릿하다.

묵직하다.

아리다.

동시에.

-끄아아아아아아!!

신의 비명 소리가 듣기 좋은 클래식처럼 또 한 번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검상은 교차를 이루며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

동시에 검성은 자신의 영혼 또한 뭉텅이로 잘려져 나가는 걸 느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다.

이상했다.

몸은 그대로인데 이게 혼이 사라진다는 걸까?

신기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불안해졌다.

이젠 정말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검성은 다시 검을 들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짐과 동시에 감각이 무뎌져 가는 것이 눈앞의 시야가 선명한 것과는 별개로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불안감을 엄습케 했다.

검성은 두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봉혼의 칼날은 식은 용암이 아닌 활화산처럼 그 기세를 뿜으며 마지막 화력을 쏟아 냈다.

서걱!

검로가 지나간 자리는 가슴팍보다 위였다.

목.

그 위로 새하얀 선이 그려지며 마치 공간이 잘린 듯한 착각을 주었다.

동시에 검성 또한 자신의 목 주위가 시큰해짐을 느꼈다.

아.

이젠 말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성대는 붙어 있을진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기했다.

눈이 침침해진다.

귓가에 신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시간이 지날수록 물에 잠긴 것처럼 점점 줄어들었다.

꼬르륵.

죽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감각이 무뎌지며 모든 게 희끗해졌다.

아냐.

아직 아니야.

조금 더.

조금 더 움직여야 돼.

아직.

아직 확신을 얻지 못 했어.

검성은 검을 휘둘렀다.

봉혼의 칼날은 여전히 찬란하게 그 자태를 유지했고 맹인의 눈처럼 희끗해진 검성의 눈은 더 이상 눈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베었다.

몸의 감각이 없다.

희미하다.

새하얀 도화지에 찍힌 몇 개의 점처럼 의식이 흐릿하다.

허나 육체는 그대로였다.

소멸된 건 영혼뿐.

그래서 팔은 여전히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툭─

검성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공에서 날갯짓하던 검성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검성을 받쳐 들 건 아무것도 없었다.

힐탄과 아이기스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로나스의 영역에 있던 생명체들은 신의 분노가 두려운 나머지 모두들 멀리 도망쳐 버렸으니까.

검성의 육체가 아래로 추락한다.

몇 초 뒤 바닥에 부딪힌다.

콰드득!

섬뜩한 파열음.

힘없이 떨어진 검성의 몸이 투신자의 그것처럼 해괴한 방향들로 꺾였다.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뒷면에선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콰드득!

또다른 파열음.

검성이 떨어진 곳 근처에 또 다른 육체 하나가 떨어졌다.

베로키였다.

베로키 역시 끔찍한 몰골로 사지가 뒤틀린 채 떨어졌다.

몸의 일부는 충격을 견디지 못 하고 터져 지저분하게 피가 퍼졌다.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산 자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미의 신전이 있던 자리는 어느덧 죽음의 땅으로 변모해 있었다.

시간이 흘렀고 해가 두어 번 바뀌었을 때였다.

누군가 죽음의 땅에 나타났다.

까무잡잡한 피부.

뾰족한 귀.

새하얀 머리칼.

다름 아닌 북쪽 숲, 다크엘프들의 수장 시올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직속대와 함께 대륙 서쪽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유는 하나.

성유물과도 같은 봉혼검을 회수하기 위해서.

시올라의 눈이 죽은 베로키와 검성에게로 옮겨졌다.

“후후, 결국 이렇게 되었군.”

시올라는 죽은 검성의 시체로 다가가 검성의 몸을 바로 뉘였다.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도 정돈시켰다.

한때 북쪽 숲에 피바람을 일으킨 인간이었으나 그의 잘못과는 별개로 그는 분명 인간의 힘을 초월한, 엘프가 봐도 인정할 만한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시올라는 검성의 손아귀에 쥐여진 손잡이뿐인 봉혼검을 회수했다.

그런 다음 엘프들 특유의 영안으로 검성을 면밀히 살핀 끝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줌도 남김없이 모조리 불태웠구나.”

그녀가 영안을 통해 본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검성의 잔념이었다.

초월된 것을 보는 그녀의 눈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사념, 잔념, 투지 같은 것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녀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검성은 봉혼검을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신을 죽인 듯 했다.

웅웅─

봉혼검이 시올라의 손에 쥐여지자 봉혼검이 웅웅 진동한다.

검에 혼이 갇혔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검성의 육신에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의 혼을 연료 삼아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 올렸던 봉혼검에는 여전히 검성의 투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실력과 순수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로군.’

시올라는 봉혼검을 품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그 역할을 다 하였고 다루기 힘든 기물이니 만큼 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게 될 터.

상관은 없었다.

긴 세월을 사는 엘프이니 또 다른 인연이 올 수도 있을 터이니.

시올라는 이어서 근처에 추락해 있는 베로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시올라는 그게 한낱 피륙 덩어리 따위가 아님을 잘 알았다.

시올라는 사지관절이 기괴하게 꺾인 베로키를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신이 담겨져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육체를 도무지 떠나지 못하는, 이제는 주먹만큼의 존재감밖에 남지 않은 애처로운 신.

시올라가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신이었던 자가 이렇게 추하게 변해 버릴 줄이야…… 이건 이것대로 놀랍군요.”

동정일까 빈정거림일까?

허나 확실한 건 무엇이 됐든 그 말 자체가 신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임은 확실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저런 말을 하니 로나스는 더더욱 분노했다.

들썩들썩!

베로키의 뒤틀린 육신이 들썩인다.

비록 한 줌밖에 안 되는 존재감이었지만 그럼에도 로나스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시올라는 속으로 웃었다.

한때는 벼락 깨나 뿌렸을 법한 존재가 이제는 저 죽은 육체조차 탈출하지 못하고 저렇게 들썩이는 게 전부라니.

하지만 대놓고 웃지는 않았다.

로나스가 살아 있으니 그녀에게 해 줄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극은 금물.

시올라가 말했다.

“그래도 신은 신이군요. 인간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당신을 베었는데도 당신은 결국 살아남았으니까.”

들썩들썩!

시올라의 말에 베로키의 육체가 또다시 들썩인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며 허공에 주먹질이라도 하는 모양새.

시올라의 말이 이어졌다.

“너무 화내지 말고 들어요. 제가 그 남자와 연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당신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명분이 되는 건 아니니까.”

-…….

시올라의 말에 베로키의 육체가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그녀의 침착한 설명이 미쳐 날뛰던 로나스에게 이성을 안겨 준 것이다.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여자는 도망쳤습니다. 아마 이대로라면 영영 잡지 못하게 될 테지요. 아니, 어쩌면 그녀가 새로운 미의 상징이 될지도 모를 일이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오래되고 신실한 믿음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

로나스도 한때는 아이기스처럼 인간이었다.

그때는 미의 여신이 없을 때였고 로나스를 본 세상의 모든 이가 그를 미의 여신으로 추앙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로나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 왔고.

그런데 지금, 미의 여신이라 불리던 자신의 존재감이 주먹만큼 줄어들었다.

동시에 감히 자신과 비견되는 새로운 존재가 가장 싱그러운 모습으로 이 땅에 발붙이고 있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

로나스는 흥분하지 않았다.

시올라가 되찾아준 이성이 놀라우리만치 그녀를 차갑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렇기에 도리어 긴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들썩이지 않는 베로키의 시체가 바로 그 증거.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시올라의 머릿속에 울리는 낯선 목소리.

로나스의 목소리였다.

시올라는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지만 육성이 아닌 머릿속에 소리가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로나스임을 알았다.

그래서 웃었다.

미쳐 날뛰던 신이 그제서야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거니까.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거래?

“당신이 미의 여신으로서 계속 남아 있게 해 주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줌만큼 작아져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미의 여신으로 알고 있을 거고 그 사람들의 믿음만 있다면 당신은 무섭도록 회복할 텐데요.”

-……원하는 게 뭐지?

과연.

신은 신.

눈치가 참 빨랐다.

그녀도 한때는 인간이었으니 지성체의 탐욕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콧대 높은 로나스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시올라가 웃으며 말했다.

“도망친 두 남녀 중 남자 쪽을 죽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름은 힐탄이고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의 가장 아끼는 제자 되는 자입니다. 전 그의 죽음을 원합니다.”

그 말에 로나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 거래 조건이 뭔가 이상하군. 그자와는 은원 관계인가?

“아닙니다. 전 그저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자를 위해 이런 부탁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 말에 로나스의 인상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녀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날 이렇게 만든 자를 위해 그런 부탁을 한다고? 제정신인 게냐?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슬슬 기분이 불쾌해지려고 하고 있으니까.

“후후, 너무 적대적이시군요.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당신의 기분이 불쾌하든 말든 지금 아쉬운 쪽은 당신일 텐데요?”

-뭐?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모시는 신이 있고 제 기준에서 전 단 한 번도 당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예를 갖추어 주시지요. 그래야 저도 거래할 기분이 나지 않겠어요?”

시올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로나스는 웃지 못했다.

분위기가 한층 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