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13화
-죽어라!
허공에 떠오른 로나스가 손을 한 번 휘두른 순간이었다.
꽈르릉!
검성이 있던 자리에 진분홍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성인 남성 하나쯤은 너끈히 묻힐 만큼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엄청난 파괴력.
그것을 본 검성이 말했다.
“신은 다르구먼.”
검성은 검성이었다.
검성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해 몸부터 움직여 벼락을 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회피했다고는 하나 검성도 신의 분노는 처음 보는 것.
간담이 서늘했다.
검성이 말했다.
“제자야. 공주님을 데리고 도망치거라.”
“스승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신이 분노한 이상 이 싸움은 결국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네가 멀리 도망치면 제아무리 신이라 할지언정 널 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과율……
비슷한 말로 세상의 섭리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만약 세상의 법칙을 위반할 경우, 그 존재는 상상도 못 할 징벌을 받게 된다.
설령 그 존재가 신이라 할지언정 말이다.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검성은 그 말이 진짜라는 걸 안다.
그 옛날, 대륙을 돌아다닐 때 운 좋게 만났던 세상의 수호자, 드래곤이 해 주었던 이야기니까.
그 말에 힐탄은 더 묻지 않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가시죠.”
“하지만 검성님이!”
“우리까지 신경 쓰시면 이길 싸움도 패하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진정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저희가 빠져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 말에 아이기스는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고 힐탄은 하나뿐인 팔로 공주를 들쳐 멨다.
“조금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힐탄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게서 감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허나 가만히 있을 로나스가 아니었다.
로나스는 도망치는 힐탄을 향해 손을 뻗어 분노를 뿜었다.
그러자 힐탄이 있는 곳으로 일곱 개의 진분홍빛 벼락이 휘감겨 날아갔으나.
카가가가각!
거친 파쇄음.
검성이 몸을 날려 일곱 벼락을 검으로 받아 냈다.
“큭!”
엄청난 힘이었다.
전력을 다해 오러를 끌어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진작 형체조차 남지 않고 지워졌을 만큼.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고 몸에 데미지를 좀 입긴 했지만 검성은 무사히 두 사람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 네놈이 감히! 네놈은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겠다!
그때부터였다.
신의 분노가 자신의 영역 곳곳에 재앙처럼 떨어지기 시작한 건.
그래도 다행이었다.
신경 쓸 사람이 사라져 이젠 무리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때였다.
- 키아아아!
- 크아아아!
- 쿠아아아아!
해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달려드는 것들.
베로키가 아닌 하급 종들이었다.
그들은 송곳니와 손톱 대신 신의 힘으로 보강된 무기들을 들고 검성에게 덤볐다.
무지막지한 기세.
하지만 오히려 이런 기세로 덤벼주니 더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젠 힘 조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검을 안쪽을 당긴 검성이 일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절(絶).”
검성의 검이 뿜어진다.
감히 인간의 눈으로는 쫓지도 못할 만큼 엄청난 속도로.
그와 동시에 검성을 중심으로 뒤를 제외한 모든 궤도에 푸르른 빛이 뿜어졌다.
푸른 빛의 정체는 검격이었다.
파가가각!
소멸.
분명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끝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지만 베기의 극에 달한 기술이 바로 검성의 절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하급 종들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절은 검성이 자신하는 자신의 극의 중에 하나였으니까.
이제 이 공간에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한 신과 사랑에 실패한 남자뿐.
허나 남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겼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이 상황이 퍽 재밌게 느껴졌다.
그는 평생을 칼 휘두르기에 매달린 사람이지만 비슷한 직종인 기사는 단 한 번도 꿈꾼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치 기사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기사들이 지키려는 기사도의 그것과 닮아 있었으니까.
검성이 다시 봉혼검을 꺼내 손잡이를 잡았다.
가볍다.
칼날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손잡이뿐인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성은 자신이 잡아 본 검들 중 가장 묵직하게 느껴졌다.
원인을 꼽자면 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실었기 때문이겠지.
그렇기에 검성은 칼날을 날카롭게 벼렸다.
칼날을 벼리기 위해 뜨거운 망치질 대신 마음속에 호수를 그렸다.
호수는 컸고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
그 안에는 물고기도 조약돌도 이끼도 없었다.
그저 거울처럼 투명하여 얼굴을 갖다 대면 자신의 얼굴이 비춰 보일 정도.
거울 속의 자신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마치 좀 전에 식사라도 하고 나온 사람처럼 부러움도, 아쉬움도, 분노도 없었다.
검성은 감았던 마음의 눈을 떴다.
그러자 좀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빈 칼자루에 찬란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금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력도 아니었다.
그것은 검성, 그의 마음이자 혼이요, 전부였다.
봉혼검을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그지만 마치 수십 년을 다뤄 본 애도(愛刀)처럼 자연스럽게 손에 감겼다.
“이게 그 신도 벨 수 있다는 봉혼의 칼날이군.”
신기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은 잘 절제되어 있었는데 마치 좀 전에 달군 화로 속에 검을 집어넣었다가 뺀 것처럼 따끈따끈함이 지척에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형태가 칼날처럼 고르게 유지되어 있었으며 뜨거움 또한 식은 용암의 그것처럼 잘 절제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미의 신전을 보았을 때처럼 굉장한 신성함이 느껴졌다.
- 네놈이 그걸 어떻게……!
봉혼의 칼날을 본 로나스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세상을 굽어 살피는 신답게 세상 곳곳에 눈을 두었는데 그 과정에서 봉혼검, 혹은 그것과 비슷한 성질의 물건들을 몇 차례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로나스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지자 검성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조차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검이라……
보기 드문 광경.
웃음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검성이 여유로이 말했다.
“상황이 뒤바뀐 것 같군. 도망칠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면 내 남은 일생을, 그리고 내 뜻을 이을 아이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이 땅에 모든 미의 사제들을 죽여 없앨 테니까.”
- 감히 신을 능멸하다니!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죽어라!
로나스는 악을 질렀다.
마치 자신이 겁먹지 않았다는 걸 애써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진분홍빛 벼락이 다시 한번 검성에게 뿌려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벼락들.
그것은 초고위 마법사의 마법처럼 사각까지 파고들며 철저하게 검성의 목숨을 노렸다.
허나 검성은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했다.
철없던 젊은 시절, 검의 극의를 깨닫기 위해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사지로 내몰았으니까.
그렇기에 검성은 오히려 로나스에게 달려들었다.
적이 많고 사위를 꽉 채워 덤빌 땐 오히려 과감하게 앞을 뚫고 나가는 게 정답이었으니까.
검성은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벼락을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콰과과광!!
활화산이 터진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그 엄청난 굉음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난 것이었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고 마치 태양이라도 터진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먹구름 같은 연기도 함께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굉음이 일고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가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겉이 새카맣게 그을린 검성이었다.
허나 새카맣게 그을린 몸뚱이 속에서도 빛나는 건 있었다.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은 휘황찬란한 봉혼의 칼날과, 투지가 꺾이지 않은 검성의 두 눈이었다.
그 눈은 마치 굶주린 매의 눈빛을 연상케 했다.
목표물을 정확히 포착한 그의 눈빛은 피부의 그슬림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허공을 한 번 더 날았다.
그리고 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상이 뒤집힌다.
검성의 몸이 한 바퀴 돌며 뒤집혔던 세상이 바로 섰다.
그와 동시에 깔끔한 절삭음과 묵직한 촉감이 귓전을 때렸다.
서걱!
그리고.
- 크아아아아아아!!
귀청이 찢어질 듯한 날카로운 비명.
놀랍게도 신의 것이었다.
검성은 로나스의 왼쪽 쇄골부터 오른쪽 골반까지 봉혼의 칼날을 휘둘러 신을 베었다.
베었다고 확신했다.
칼끝에서 느낀 게 거짓이 아니고 지금 귀청을 때리는 비명이 환청이 아니라면.
하지만 놀랍게도 로나스의 강림을 지탱하고 있는, 이제는 아름답지 않은 베로키의 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너무 빨리 베서 아직 떨어지지 않거나 그런 게 아니다.
베기는 정확히 베었다.
단지 검성이 베어 버린 것이 언젠가 부스러져 사라질 고깃덩어리 따위가 아닌 그 안에 강림한 신 그 자체였던 것뿐.
- 이 미천한 놈이!!!
효과는 확실했다.
상처 입은 신은 목구멍 넘치도록 피 끓는 목소리로 울부짖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몸에서 색이 더 짙어진 진분홍 아우라를 벼락처럼 뿜으며 검성을 밀어냈다.
검성은 두 팔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봉혼의 칼날을 내세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 보려 했으나 코앞에서 작렬하는 신의 분노는 고작해야 칼 한 자루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쾅!
검성의 육중한 몸뚱이가 저만치 날아가 운석처럼 박힌다.
어찌나 거세게 박혔는지 검성은 꽤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어 냈다.
숨은 붙어 있었다.
꿈틀이는 근육과 터져 나오는 기침이 그 증거였으니까.
“이런 맛이었구만.”
온몸이 그슬리고 곳곳에 탄내가 난다.
피부 밖으로 새나온 핏물은 벼락에 구워져 금세 증발해 버렸다.
하지만 검성이 뽑아낸 봉혼의 칼날은 여전히 그 형체를 잃지 않고 휘황찬란함을 뽐내고 있었다.
검성의 투지 가득한 새하얀 두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나스는 떨었다.
여전히 베로키의 육체에 숨어 리치처럼 부유해 검성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미약하게나마 떨고 있었다.
신이 된 이후 거의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으니까.
- 왜! 왜! 회복이 안 되는 거야! 왜!
로나스는 초조함에 턱을 떨었다.
답지 않게 식은땀도 흘리는 듯했다.
당연했다.
봉혼검에 베인 자신의 존재감이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았으니까.
생소한 느낌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허했다.
마치 신체 일부라도 잘린 것처럼 자신의 존재 일부가 확 사라진 느낌이었다.
일어난 검성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웃었다.
“시올라 녀석, 엄청난 걸 내게 줬구만.”
허나 여유 있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검성 또한 느끼고 있었다.
봉혼의 칼날을 틔우고 그것으로 신을 상대하는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가고 있다는 걸.
당연했다.
감히 신을 상처 입히기 위해선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검성은 알았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금방 끝내 주마.”
투쾅!
검성이 지반을 걷어차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부유성처럼 떠올라 있는 신을 베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