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5화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더니…… 내 이름은 힐탄이요. 내 책임지고 당신을 지키고 먹여 살릴 테니 그대도 운명을 받아들이시오.”
“…예, 힐탄 님.”
공주는 체념했다.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더 이상 그 누구도 해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힐탄은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지켜 줄 힘을 가지고 있었고 글도 알았다. 요리도 할 줄 알았으며 시와 노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왕국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어느덧 공주에겐 새로운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는 별개로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터라 일평생 왕궁과 그 근처만 노닐었기 때문이다.
“이 산을 넘으면 팔라디움이라는 도시가 있소. 그곳은 그 어떤 왕국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도시이니 그곳이라면 과거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요. 바깥세상은 왕궁 안과는 절대로 다른 곳이니.”
희망이 보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국을 떠난 것치곤 꽤 괜찮은 삶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한창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비극이 찾아왔다.
“이게 누구신가, 힐탄 경 아니신가?”
산 중턱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
도적처럼 등장하였으나 그들은 평범한 도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상급 암살자들로 힐탄을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에 힐탄도 검을 빼 들며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기스는 얼른 후드로 얼굴을 가린 다음 힐탄의 뒤에 숨었고 입을 열지 않는 힐탄의 모습에 암살자들이 이죽거렸다.
“평생을 변방에 처박혀 살겠다더니 결국엔 고개를 쳐들고 나왔군. 늘그막에 짝이라도 찾은 게냐?”
아이기스의 언급에 힐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조용히 살겠다는 내 약속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러니 부디 나를 보내다오.”
“그렇게는 안 되지. 우리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용서했을지언정 우린 아니거든.”
“……그렇다면 피를 봐야겠지.”
“푸흐흐, 고귀한 척 굴더니 결국엔 네놈도 자기 잇속대로 구는구나.”
시와 노래뿐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도 지식이 해박한 힐탄이었지만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과거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괴한들의 겁박에 아이기스는 가늘게 떨었다.
그 떨림에, 힐탄이 나직이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것을 시작으로 칼부림이 시작됐다.
나무 그림자가 짙게 깔린 산 중턱이었지만 그 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이 날붙이에 반사돼 형형한 빛깔들을 뿜었다.
그 사이로 피가 튀었다.
신음이 흘렀고 누군가는 송장이 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힐탄은 힐탄이었다.
그는 한때 왕국을 구원해 줄 현자라 불렸으며 개인의 무력과 존재감만으로 민초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었다.
“네놈을 죽일 수 없다면 네 여자라도 죽여 주마!!”
그때, 수세에 몰린 암살자 하나가 동귀어진의 수로 아이기스에게 칼을 휘둘렀다.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기습에, 힐탄은 몸을 날렸지만 애석하게도 팔 한 짝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크윽!”
“힐탄 님!”
대신 자신을 기습했던 모든 암살자들을 죽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가 자신의 후드를 찢어 힐탄의 상처를 지혈하자, 뒤늦게 아이기스의 외모를 본 죽어 가는 암살자가 말했다.
“엄청난 미모로군…… 과연, 그 힐탄이 다시 속세로 나올 법해. 하지만…….”
암살자가 피거품 끓는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듯 말했다.
“그 하잘 것 없는 미모가 너희를 다시 불행케 하리라…….”
그 말에 아이기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때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던 마녀의 저주와 흡사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에 힐탄이 품에서 작은 팬던트 하나를 꺼내 아이기스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으시오.”
“이, 이게 뭔가요, 힐탄?”
“저를 상징하는 증표입니다. 이걸 가지고 팔라디움의 라핀이라는 자를 찾아 내 이름을 대시오. 그럼 그가 당신을 보호해 줄 거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힐탄! 나를 지켜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시간이 꽤 지나서 더 이상은 날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녀석들의 원한은 내 생각 이상으로 깊었고 저들이 날 찾아냈다는 건 내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나를 급습해 올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합니다. 나랑 같이 있으면 결국 당신도 위험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아이기스 공주. 내 두 번 다시 사람과 얽히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신을 처음 본 순간 그 결심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소. 하지만 난 그래선 안 되는 사람이었소. 미안하오. 나는 당신을 품기엔 지은 죄가 너무 많은 사람이오. 하지만 슬퍼하지 마시오. 당신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당신의 왕국을 구한 영웅이니까.”
“힐탄…….”
“추격자가 붙을 거요. 그러니 우린 여기서 헤어져야만 합니다.”
힐탄은 팔이 잘린 것에 대한 고통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계속 남아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욕심이 그녀를 집어삼킬까 봐서.
힐탄이 떠난 뒤, 아이기스는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이제는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자가 떠나 버렸으니 이제 그녀에겐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공허함과 상실감은 그녀가 평생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그녀는 힐탄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말들 중 일부를 떠올렸다.
밤이 되면 들짐승들이 미처 날뛰니 최대한 산을 피해야 한다고.
그래서 움직였다.
움직이고 또 움직여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아이기스는 팔라디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입구에서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팔라디움에 들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긴 줄 끝에서 자꾸만 뒤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저기요?”
아이기스에게 말을 건건 ‘즈만’이란 이름을 가진 웬 젊은 상인이었다.
“당신 수배자죠?”
“…네?”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하는 행동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팔라디움에는 들어가야겠는데 신분 검사 때문에 못 들어가고 자꾸 뒤로 가는 거 아니에요?”
“…….”
아이기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기스가 침묵하자 즈만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난 즈만이라고 해요. 행상을 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까요?”
“그쪽……이요?”
“네, 제가 쓴 모자 보이시죠? 이 모자는 저희 나라에서 결혼한 사람만 쓸 수 있는 모자인데 저희 나라는 예로부터 율법이 엄해서 자기 아내의 얼굴을 외간 사람에게 절대로 보여 줘선 안 되거든요. 당연히 병사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는 꽤 친한 사이거든요.”
즈만의 말을 듣다 보니 예전에 왕궁에서 배움을 쌓을 때 그런 나라가 있다고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당신 혹시, 아이샤인입니까?”
“오, 저희 나라를 아세요?”
“들어 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 당신의 아내는 어쩌구요?”
“전 결혼을 안 했습니다.”
“…네?”
“이건 그냥 장사에 도움이 되라고 쓰고 다니는 거예요. 저희 같은 장사치들이 이 모자를 쓰고 다니면 가정을 지키는 사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장사는 신뢰가 생명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상인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경계를 풀지 못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왜 저를 도와주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미신 같은 겁니다. 저희 나라에선 베푼 은혜 이상을 보답받는다는 속담이 있거든요.”
“아…….”
“곧 해가 완전히 지면 출입문도 닫힐 겁니다. 그러니 얼른 들어가시죠.”
결국 아이기스는 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는 지고 있었고 뾰족한 수는 없었으니까.
아이기스는 아이샤의 유부녀들이 쓰는 ‘팜’이라는 커다란 로브를 즈만에게 받아 둘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이기스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는데 아이기스의 얼굴을 본 즈만은 자기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 반응에 아이기스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시죠?”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이기스는 무어라 더 따져 묻고 싶었으나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만에 하나 그와 사이라도 틀어지면 그때는 도시 밖에서 날을 꼴딱 지새웠어야 하니까.
즈만이 말했다.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은 왜요?”
“잠시나마 아내가 될 사람인데 이름도 모른다면 좀 웃기지 않을까요?”
“아…!”
잠시나마 그를 경계했던 점이 부끄러워져 아이기스의 얼굴이 빨개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명을 말해 줄 순 없었다. 아이기스는 고민 끝에 가명을 말했다.
“아이비……입니다.”
“그렇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즈만입니다. 그럼 이제 가 보실까요?”
즈만의 말대로였다.
그는 이곳의 병사들과 친했고 아이샤의 전통 덕분에 별다른 의심 없이 도시를 통과할 수 있었다.
도시에 입성한 뒤, 아이기스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뭘 이런 걸로. 그나저나 이제 뭐 하실 거예요?”
“…네?”
“보아 하니 이곳에 연고도 없는 것 같은데 지낼 곳은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 봐야 할 곳은 있습니다.”
“어딘지 물어봐도 돼요?”
“…안 돼요, 그건.”
“에이, 야박하게 이러기에요? 전 당신한테 호의도 베풀었는데? 그러지 말고 나랑 밥만 한 번 같이 먹어 줘요. 나도 방금 도착한 터라 이제 밥을 먹어야 하는데 혼자 먹는 밥은 이제 지긋지긋하거든요.”
아이기스는 갈등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그래. 식사 한 번만 하고 헤어지는 거야.’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한다.
그것이 왕궁에서 받은 가르침이기도 했으니까.
아이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즈만이 능숙하게 그녀를 리드했다.
“가시죠. 제가 자주 가는 곳이 있습니다. 꽤 프라이빗한 곳이라 남들한테 얼굴 드러낼 일도 없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그냥 계속 얼굴을 감추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싶은 거예요. 별 뜻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즈만이 안내한 식당은 그의 말마따나 개별 룸이 제공되어 정말로 프리이빗함이 보장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팜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어쨌든 후드를 벗긴 해야 했으니까.
그러자 즈만이 또다시 멍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아이기스를 쳐다보던 즈만이 중얼거렸다.
“아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당신…….”
즈만의 아는 체에 아이기스가 고개를 푹 숙인다. 혹여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까 싶어서.
그러나 즈만의 반응은 의외였다.
“당신은 제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즈만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칭찬할 뿐,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덕분에 아이기스는 한시름 긴장을 풀 수 있었고 곧 허기진 배를 편안하게 채울 수 있었다.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즈만이 물었다.
“혹시 결혼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