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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494화 (494/522)
  • 2부. 94화

    ‘문장?’

    한두 개의 문장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행성을 감싼 어느 고리처럼 한 줄의 띠를 이루어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개중에는 아까 마티아스가 말했던 ‘눈’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문자들 중 동그라미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는데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처럼 생긴 문자에만 눈동자가 달려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헨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국장은 여전히 자신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카이브 알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것들에 대한 정체는 직접 알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

    헨리는 잠깐의 고민 끝에 염동 마법으로 군집된 문장들을 끌어당겨 보았다.

    다행히 헨리의 염동 마법에 문장 한 가닥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건져 올려졌다.

    건져진 문장은 꽤나 긴 것이었는데 꽤 끌어 올렸다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보다 한참을 더 끌어올린 후에야 문장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

    ‘음.’

    헨리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처음 보는 언어들.

    통역 마법이라도 사용하고 싶었으나 수집된 데이터가 적어 마법을 사용할 조건이 되지 않았다.

    헨리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것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화악!

    문장이 금빛으로 빛나더니 시야가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금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여긴…….’

    머릿속에 펼쳐진 세상.

    그곳은 하늘이 푸르고 산천초목이 화사하게 피어난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이름은 하니레트로바.

    처음 듣는 지명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헨리는 그곳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의 시야에 어떤 청년이 보였다.

    강제로 시선을 붙잡아 두듯 헨리의 시야는 그곳으로 고정됐다.

    청년은 나무꾼이었다.

    산의 나무를 해다가 아랫마을에 가서 파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름은 아나노바.

    아나노바는 오늘도 평화로이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차도록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고 손 한쪽이 불편한 남동생과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가진 것은 적었지만 그래도 배를 곯지 않고 노모에게 약도 제때 지어 먹일 수 있어 행복했다.

    그때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대낮에 별똥별이라니, 나무를 하던 아나노바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단순한 별똥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나노바가 별똥별이라 착각했던 것.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비스…… 가우스에선 ‘종말’이라 불리던 놈들이었다.

    비스들의 등장으로 하니레트로바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푸르렀던 산천초목은 불바다가 되었고 땅은 잿빛이 되었으며 강은 핏빛이 되어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그중에는 아나노바의 동생과 늙은 어머니의 것도 있었다.

    아나노바는 자신이 직접 보는 눈앞에서 비스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

    비스들은 짐승처럼 아나노바의 가족을 난도질해 죽였고 피와 살을 탐했다.

    분노한 아나노바는 자기보다 수배는 큰 비스들에게 도끼를 들고 덤볐다.

    자신의 도끼가 저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음에도 덤볐다.

    그리고 한 방에 나가떨어져 해 온 나무더미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아나노바의 죽음을 끝으로 헨리의 머릿속이 캄캄해졌고 눈앞은 다시 색채를 갖추며 시야를 되찾았다.

    갖추어진 시야에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파티원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헨리가 뽑아 올렸던 형형하고 기다란 띠 같은 문장도 있었다.

    염왕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냐?”

    “…이것들의 정체가 뭔지 알게 됐다.”

    “정체? 뭔데?”

    “이것들은 기록이다. 어비스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에 대한 기록.”

    헨리는 다시 한번 여왕의 눈과 라의 눈을 발동시켜 발아래를 보았다.

    자신들과 한 장의 벽 너머에 존재하던 거대한 에테르 군집체, ‘세이버’의 정체.

    그것은 어비스가 가진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모든 ‘기록’이었다.

    “세이버는 서고였다. 그래서 각기 다른 문장들이 있었던 거지. 또 이곳이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들에 대한 기록소였기 때문에 여태 흩어진 파티원들에게 그런 공격들을 할 수 있었던 거야.”

    그 말에 극독왕 제냐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어비스에 입탑하면서 플레이어 시스템이 아카이브 시스템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아카이브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저장한다고 말이야. 그렇단 말은…….”

    “어쩌면 이곳을 뒤지다 보면 최상층에 대한 정보와 그 정체 모를 ‘마스터’란 놈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어 대답한 건 개척왕이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버를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건진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마스터란 놈이 만든 것 같고 마스터란 놈이 굉장히 음침하다는 것도 알게 됐군.”

    “하지만 세이버가 정말 어비스의 모든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라면…… 이걸 언제 다 확인해?”

    마티아스의 말에 모두들 침묵했다.

    확실히 일리는 있었기 때문.

    좀 전에 헨리가 어떤 기록을 확인하는데만 최소 1분이 걸렸다.

    그런데 이 정도의 양을 모두 확인하려면……

    그때, 잠자코 생각하고 있던 헨리가 말했다.

    “그럼 없애 버리면 될 것 같군.”

    “뭐?”

    “없애다니?”

    “이 중요한 것들을?”

    그 말들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정말 중요한 거라면 이것의 주인이 알아서 나타나겠지. 그게 아니면 없애도 상관없는 것이거나. 그리고 어차피 이 기록이란 것들은…….”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한테는 별로 안 중요한 것들이잖아?”

    헨리의 말에 파티원들의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어비스의 주인이 개인의 욕심을 위해 모아 놓은 것들.

    역사를 기록한다거나 하는 그런 숭고한 목적들 따윈 없는 개인의 욕심들이었다.

    합의는 이루어졌다.

    모두들 헨리의 말에 동의했고 헨리는 세이버를 날려 버리는데 한 발 남은 합격기를 사용키로 했다.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국장이 황급히 화상 메시지를 송출해 왔다.

    - 자, 잠깐! 지금 뭣들 하는 거야?!

    그렇게 쫓아다닐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이제야 얼굴을 내밀다니.

    헨리가 코웃음 쳤다.

    “확실히 세이버가 중요하긴 중요한가 보군. 네놈이 급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걸 보니.”

    -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고, 말로. 세이버가 어떤 건 줄 알고 파괴하려는 거야?

    “10초 주겠다.”

    - 뭐?

    “10초 안에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세이버를 파괴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화상 메시지를 껐다.

    그러자 파티원들이 배를 잡고 웃었고 국장은 정말 10초도 안 돼서 헨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국장이 나타나자마자 분노한 극독왕이 국장을 잡아채 바닥에 처박아 짓눌렀다.

    “이 빌어처먹을 놈, 감히 나를 똥개 훈련시켰겠다?”

    “크으윽! 오라고 했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화는 지랄, 네가 필요할 때만 대화냐? 이대로 널 죽여 버리고 세이버를 파괴해도 우린 아무런 상관도 없어. 알아?”

    “크윽!”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

    헨리는 한참 뒤에야 극독왕에게 물러나라고 했다.

    “켁켁.”

    목이 눌렸던 국장이 헛기침을 하며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헨리가 국장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스터를 불러라. 그렇지 않으면 세이버를 파괴하겠다.”

    “…….”

    국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울용에 이어 호기심과 진실로써 방어하는 세이버의 방어 시스템이라면 이들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이버의 방어 시스템은 고작해야 침입자들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이젠 정말로 남아 있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대로 끝인 걸까?

    상층의 명예도?

    그 유명한 관리국의 아성도?

    더 이상은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억울했다.

    국장이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악에 받힌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그 표독스러움에 극독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놈 보게? 여태까진 플레이어들 가지고 잘도 놀았으면서 자기가 당하니까 피해자인 척 구네? 이놈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나? 보아 하니 마스터인지 뭔지 불러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헨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꼬락서니를 보아 하니 극독왕의 말대로 마스터를 부를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국장이 다시 한번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긴 어비스의 고귀한 데이터 저장실…! 이곳이 파괴되면 어비스에는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 혼란 참 궁금하네.”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는 듯했다.

    헨리는 고개를 저었고 극독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놈의 목에 맹독 묻은 칼날을 쑤셔 박았다.

    “끄으윽…….”

    국장은 그렇게 죽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을 읊조리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관리국 국장을 살해한 것에 대한 아카이브 알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헨리가 말했다.

    “전부 밖으로 나가지.”

    굳이 세이버 코앞에서 합격기를 터뜨릴 이유는 없다.

    합격기로 세이버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아군이 피해를 입으면 그건 또 안 될 일이었으니.

    헨리는 진실의 기둥 앞에 생체 망부석이 된 기존의 파티원들까지 모두 회수한 후에야 굴착기를 타고 세이버를 빠져나갔다.

    *

    “그림 시작하지.”

    지하 세이버에서 나온 후, 헨리는 개척왕의 도움을 받아 세이버가 있는 곳까지 땅을 팠다.

    굴착기를 비롯해 모두의 손을 거치니 별로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세이버들은 크게 세 덩이였고 모두 맞닿은 채 밀집해 있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합격기를 사용할 때 나머지 파티원들도 한 번 더 오의를 사용해 합격기의 파괴력을 높이는 것.

    생체 망부석이 되었던 이탈했던 동료들은 뒤늦게 진실을 알고 자신을 구해준 파티원들에게 사과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헨리가 스킬을 발동시켰다.

    [ <???>가 발동됩니다. ]

    [ <???>의 남은 횟수는 0회입니다. ]

    마지막 합격기가 발동됐다.

    동시에.

    [ <염룡>이 발동됩니다. ]

    [ <빙마>가 발동됩니다. ]

    [ <지천제>가 발동됩니다. ]

    [ <천악>을 소환합니다. ]

    다른 팀원들의 오의도 함께 발동됐다.

    합격기가 던져졌다.

    발동된 오의들은 합격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화력을 더했다.

    합격기는 여태 보아온 것들 중 가장 크고 억센 에테르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행성이 떨어지듯, 거대한 발광체가 에테르 덩어리인 세이버에 작렬한다.

    콰과과과과과과!!

    합격기는 한 번에 폭발하지 않았다.

    세이버와 부딪힌 합격기는 마치 지층을 뚫고 가려는 듯 자신의 형체를 균일하게 유지하며 지하로 파고 들어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 덩이로 이루어진 세이버들은 합격기와 격렬하게 부딪히며 괴랄한 소리를 냈고 마침내 모든 세이버가 파괴되었을 때, 지하로 완전히 내려앉은 합격기는 땅 속에서 폭발했다.

    펑!

    그 폭발에 관리국이 있는 지층 전체가 들썩이며 울렸다.

    그리고.

    .

    .

    .

    팟!

    어비스에 어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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