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7화
후원.
스폰서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후원의 개념을 아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후원을 받으면 보다 안전하고 빠르게 탑을 오를 수 있으니까.
후원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개인 후원과 단체의 후원으로, 혁명군이 헨리에게 하려 했던 것이 바로 단체의 후원이었다.
얼핏 보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두 개 후원은 차이가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게 단체 후원은 정식 후원이 아닌 후원의 권리가 없는 자들이 힘을 모아 꼼수로 아래층 플레이어를 후원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주로 중층의 세력들이 진행했고 목적이야 당연히 자신들의 세를 불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과정도 번거롭고 대놓고 큰 힘을 밀어줄 수도 없다.
그에 비해 개인 후원은 상층민부터 할 수 있기에 그들은 정식으로 아래층 플레이어를 후원한다.
그러므로 남부러울 것 없는 상층민들의 아래층 후원은 대부분이 재미가 목적이라 후원을 받는 쪽에서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편.
물론 이런 차이점 외에도 헨리가 혁명군의 후원을 거절했던 건 그들의 이념과 헨리가 추구하는 바가 맞지 않아서였다.
또 헨리의 기준에서 혁명군은 아직 힘없는 중층 세력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었던 것도 있고.
‘난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상층보다도 더.’
헨리의 목표는 가우스를 구원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비스의 주인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으니까.
헨리가 눈살을 좁히며 물었다.
“그 후원, 개인인가 단체인가?”
“뭐? 크흐흐! 당연히 개인이지. 자넨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 염왕이네.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곳에서 왕으로 살고 있는.”
“상층민이라는거군.”
“그렇기야 하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없다.”
신분 확인도 끝마쳤다.
그렇다면 이제 이유에 대해서 들어야 할 터.
“왜 날 후원하고 싶어 하는 거지?”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그야 당연히 재밌으니까.”
“뭐?”
“넌 오락을 왜 하냐? 재밌으니까 하는 거야.”
헨리가 의문을 표하자 염왕의 말이 이어졌다.
“천년전쟁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알고 있다. 상층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 상층민이 되고 싶다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게 천년전쟁이지. 그리고 곧 천년전쟁 시기가 다가오고 있고 말이야. 근데 말이야. 그 룰을 누가 만들었을 것 같나?”
예상치 못한 물음.
염왕의 말이 이어졌다.
“세력을 만들어 공정한 컨디션에서 합을 겨루고 최종 승리자가 자격을 갖추어 상층의 수문장들에게 도전한다…… 크큭, 누가 그러더군. 천년전쟁은 스포츠라고. 근데 참 웃기지 않나? 힘이든 뭐든 무언가에 홀려 여기까지 온 놈들이 이제 와서 스포츠맨십을 들먹이며 신사인 척하려는 모습이 말이야.”
말을 잇던 염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빈 삼각형이 그려졌고 염왕은 그 속에 층계를 나누듯 차례차례 선을 그었다.
“어느 집단이든 서열이 존재한다면 대부분 이런 형태를 갖추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 천년전쟁의 승리자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여기.”
염왕이 상층과 중층 사이에 그어진 선을 가리켰다.
“바로 여기다. 넌 여기가 뭔지 알겠나?”
상층과 중층 사이의 경계.
하지만 염왕이 묻는 관점이라면……
“상층의 가장 밑바닥.”
그 대답에 염왕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역시 내가 고른 놈은 다르군. 맞아. 놈들이 상대해야 되는 건 상층 전체가 아니야. 상층의 가장 밑바닥에 해당하는 놈들이지. 왜인지 아나? 놈들은 중층에선 가장 강한 놈들이지만 상층에선 제일 꼬리에 불과해. 그래서 남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되는 거지. 그게 싫다면 더 위로 올라가야 되는 거고.”
“그래서, 핵심이 뭐지?”
“천년전쟁을 스포츠가 아닌 진짜 전쟁으로 만들어 보자고.”
“뭐?”
“천년이란 주기도 원래는 정해져 있지 않았어. 그저 상층 밑바닥 놈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 만든 룰이지. 밑에 놈들이야 뭐 별 수 있나. 까라면 까는 게 밑에 놈들 아니겠어?”
“그럼 그 룰을 어겨도 된다는 건가?”
“되고말고. 애초에 어비스가 만든 룰이 아닌데 그딴 걸 왜 듣고 있는지 난 이해 불가야. 나 때는 천년전쟁이고 뭐고 강자존, 약육강식 이런 것들이 전부였는데 말이지.”
헨리는 그제서야 염왕의 니즈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희.
염왕은 헨리를 통해 과거의 향수에 젖은 유희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헨리를 이용하는 이유야 간단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면 재미도 멋도 없었으니까.
“오랫동안 아래층을 지켜봐 왔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놈이 없더군. 그릇도 능력도 안 되는 놈들뿐이었단 말이야. 그런 놈들은 후원을 해 줘도 제대로 못 커. 근데 자네는 달랐지. 배포면 배포. 능력이면 능력.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들더군.”
“원하는 건 그뿐인가? 내가 천년전쟁의 룰을 깨고 중층과 상층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박살 내기만 하면?”
“그럼. 그거면 충분해. 난 네가 활화산처럼 날뛰어서 느슨한 어비스에 긴장감을 심어 줬음 좋겠어. 그렇게만 해주면 감히 상급 관리자조차도 네게 간섭할 수 없는 힘을 주지.”
상급 관리자도 간섭하기 힘든 힘.
쉬이 믿기 힘들었다.
염왕은 오늘 처음 본 자이고 아직 이자의 속내가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염왕이 바라는 것이 정말로 이것뿐이라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헨리는 염왕의 바람대로 모든 걸 부수고 가우스만 구원하면 되었으니까.
게다가 상급 관리자를 피해서 온 현재 상황에선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알겠다.”
“좋아. 내 말을 받아들이겠다면 내 손을 잡아라. 그럼 모든 계약이 이행 될 터이니.”
염왕이 내민 손.
작았다.
허나 작은 크기와 달리 손에서 풍겨져 오는 무게감이 그를 결코 작아 보이게 만들지 않았다.
헨리가 염왕의 손을 잡은 순간, 염왕의 손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라 헨리의 팔뚝을 휘감아 타고 올라왔다.
[ <염왕>과 후원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
[ <염왕의 가호>를 받습니다. ]
[ 당신은 후원자에게 페널티 없는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동시에 아카이브 알림이 떴다.
짤막한 글귀 몇 줄이었지만 헨리는 이것들이 가지는 힘의 크기를 잘 알았다.
“자, 그럼 우선 상태창부터 한번 확인해 보실까?”
염왕은 후원자의 자격으로 헨리의 상태창을 열어 직접 확인했다.
++
[ 헨리 모리스 ]
- 신분 : 하층민, 이레귤러
- 특성 : <전설 추적자>
- 공격력 : 99
- 방어력 : 99
- 관통력 : 99
- 친화력 : 99
- 저항력 : 99
- 지배력 : 99
- 어비스 포인트 : 825,025 ap
++
“호오? 하급 관리자를 죽였다더니 그냥 운으로 죽인 건 아닌 모양이군.”
헨리의 상태창을 본 염왕은 흥미로움에 더더욱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현재 헨리가 가진 스탯들은 모두 중층 수준의 것들이었는데 이것들 모두 역경진화를 통해 최대치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염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도 알고 있지? 지금 네 스탯 레벨이 중층급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럼 그 다음 단계는 상층일 테고 상층민들은 어떤 스탯을 사용할 것 같나?”
“모른다.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크큭, 그럴 만도 하지. 다음 단계는 간단해. 에테르다.”
“에테르?”
“백 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번 경험해 보는 편이 낫겠지.”
그 순간.
[ <염왕>이 당신에게 스탯 성장에 대한 후원을 하고 싶어 합니다. 후원을 수락하시겠습니까? ]
눈앞에 뜬 알림 하나.
알림을 보고 염왕을 보자 염왕이 사람 좋은 미소와 고개 까딱임으로 권유한다.
그래서 수락했다.
이미 염왕의 후원을 받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니까. 그러자.
[ 후원을 수락하셨습니다. ]
[ 스탯 성장이 시작됩니다. ]
화르륵!
그와 동시에 헨리의 몸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크으으으윽!!”
작열통.
간만에 맛보는 극렬한 고통이었다.
염왕은 거대한 불덩이가 된 헨리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웃었다.
“염가원에는 이런 말이 있지. 새로 태어나려면 모든 걸 불태우고 다시 빚으라는. 자, 어서오게, 염가원에.”
허나 헨리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니까.
*
“…실패한 거 아닙니까?”
“…….”
거인들의 요새 본부.
닫히지 않는 차원의 틈 앞.
그곳에 라훔을 비롯한 거인병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툼스의 말에 라훔이 입을 굳게 다물고 팔짱을 낀 채 침묵을 고수했다.
“아, 요새장님! 그리 입만 꾹 다물고 계시지 마시고 뭐라고 말씀이라도 좀 해 보세요! 벌써 보름째입니다. 근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는 건……!”
“기다려.”
“하지만…!”
“씁.”
“하이씨!”
결국 다시 자리에 주저앉는 툼스.
헨리가 제단으로 떠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간부들은 일주일이 지났을 때부터 불안했고 열흘째가 됐을 때부턴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보름이 됐을 땐 그냥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모두 나가.”
“요새장님!”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가서들 일봐. 때가 되면 부를 테니까.”
“…….”
요새장 라훔.
그는 권위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아랫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며 항상 귀를 열고 소통하며 살아왔다.
거기에 거인으로서의 긍지도 버리지 않고 항상 자신이 아닌 일족의 미래를 생각했다.
그렇기에 부하들은 말없이 일어나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방 안에는 라훔 혼자만 남게 되었다.
혼자 남게 된 라훔은 눈동자를 움직여 시야 한 켠에 자리한 어떤 표시를 보였다.
녹색 원.
그것은 파티원의 체력을 표시해 주는 아이콘이었다.
부하들과 유대 깊은 그였고 어비스에 살기로 하면서 한 명의 플레이어로 분류된 그였지만 그는 여지껏 한 번도 파티 시스템을 이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게 없어도 큰 불편함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파티를 맺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하찮게 여기는 플레이어 중 하나인 헨리와 말이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일족의 미래를 생각하라고 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자신의 고리타분한 고집보다는 일족의 미래가 중요했으니까.
라훔의 시선이 헨리의 체력 표시 아이콘에 고정됐다.
녹색 원이 가득 찼다는 건 컨디션이 최고라는 거고 녹색 원이 반절이 지나 붉은색이 되어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상태가 위태로운 거라고 했다.
처음 얼마간의 원은 완연한 녹색이었고 보름달이었다.
그런데 헨리가 제단으로 떠난 지 반나절도 안 됐을 때부터 원은 급격히 요동쳤다.
녹색 보름달이었던 게 붉은 반달이었다가 붉은 초승달이었다가, 또 어떨 땐 녹색 보름달이 되었다.
그런 현상이 이어진 게 벌써 보름째였다.
이상했다.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훔은 일전에도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바로 자신과 대련 중이던 헨리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이유도 알았다.
뱀의 운명을 사사받은 자는 사경을 헤매고 역경을 이겨 내면 껍질을 탈피하듯 더 큰 생명력을 품게 된다 했으니까.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체력 표시 아이콘을 보고 헨리의 상태를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과 대련이 아닌 제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 멀리 떠났다.
그런데도 같은 현상이 벌써 보름째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거냐, 너는.’
기다리는 것.
그것이 라훔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요동치던 아이콘이 완연한 녹색 보름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