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6화
제단.
애초에 처음 보는 곳이었고 관리자도 죽었으며 종말을 죽여도 알림 한 줄 안 뜨는 곳이었기에 해체 방법이나 순서 따위는 몰랐다.
그렇기에 그냥 파괴했다.
쾅! 쾅! 쾅!
마치 괴물 영화의 괴물이 도시를 부수듯, 거인화가 된 헨리는 제단 전체를 무자비하게 파괴했고 마침내 그곳에 제단이라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헨리는 파괴를 멈추었다.
이번에도 딱히 알림 같은 건 뜨지 않았다.
‘어이가 없군. 이게 전부라고?’
허무했다.
관리자가 사라져서 그런 걸까?
헨리는 이만 복귀하기로 했다.
어쨌든 거인들과의 약속은 지켰으니까.
헨리는 라훔이 주었던 시야 오브젝트를 활용해 제단에 올 때 이용했던 차원의 틈을 찾기로 했다.
아니, 찾으려 했다.
갑자기 기후 변화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휘오오오!
변화는 갑자기 일어났다.
갑자기 밤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달빛을 품은 구름처럼 하늘에 탁하고 푸르스름한 빛깔이 하늘 중심에 원을 그렸다.
태풍의 핵?
그 중심에 무언가가 있었다.
“우어어어!”
“키아아아아!”
이름 모를 것이 등장하자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종말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단순히 흥분한 게 아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눈을 까뒤집고 하늘에 나타난 그것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었다.
펄럭!
하늘의 중심에서 나타난 그것은 날개로 추정되는 거대한 것을 펼쳤다. 그리고 정확히 헨리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하강해 왔다.
사람?
생김새는 그러했다.
녀석은 보랏빛 머리칼에 비르파처럼 새하얀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에 헨리도 도망치지 않고 마법으로 몸을 띄웠다.
거인단을 사용해 한동안 에테르가 나오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보일 때쯤, 헨리는 그가 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서로의 목소리가 전달 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헨리는 그와 눈높이를 바로 맞춘 채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입은 열지 않았다.
대신……
[ <여왕의 눈>이 발동됩니다. ]
여왕의 눈을 발동시켰다.
발동 효과는 관조.
그러나.
[ <여왕의 눈>으로부터 <관조> 효과를 발생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
관조 효과의 발생이 실패했다.
생각지도 못한 현상에 놀랐지만 비르파처럼 내색하지 않았다.
허나 상대방은 헨리의 실패를 바로 알아채고 눈꼬리를 휘었다.
“재밌는 놈이네? 반가워, 난 상급 관리자 엘이라고 해.”
상급 관리자?
관리자들 사이에 등급 개념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클레버가 알려 준 것들 중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으니까.
자신을 엘이라고 소개한 상급 관리자가 계속 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디 보자…… 네 이름은 헨리 모리스군. 이레귤러 출신에 스탯도 제법 높네? 이야, 중층 아래서 신체도 3개나 모았고.”
겨우 얼굴 본 게 다다.
그런데 엘은 헨리의 모든 것들에 대해 꿰고 있었다.
헨리가 말했다.
“상급 관리자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그럴 수도 있지. 중층 이하의 것들은 아니, 중층의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우릴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렇군. 여긴 왜 온 거지?”
“내가 관리하는 구역이니까 왔지. 그나저나 너 꽤 재밌는 짓을 해 놨더라?”
“비르파를 죽인 걸 말하는 건가?”
“그래. 거기다 소중한 우리의 시설까지 파괴했잖아? 덕분에 내가 아주 곤란하게 됐어.”
곤란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엘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마치 신발에 진흙이 묻어 곤란하다는 신사의 그런 표정이었다.
말을 잇던 엘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비르파를 대신해 여길 관리해 줘야겠어.”
“…뭐?”
생각지도 못한 제안.
엘의 말이 계속 됐다.
“내 부하를 죽여 업무의 공백이 생기게 했으니 이 정도 후처리는 당연한 거잖아? 설마 이 난리를 쳐 놓고 입 싹 닦으려던 건 아니겠지?”
“지금 나더러 이곳의 관리자라도 되라는 말인 건가?”
“그래, 바로 그 말이야. 말귀가 트여 있어서 다행이네.”
상식 밖의 제안.
어이가 없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관리자가 되라니?
헨리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자 엘이 후훗 웃었다.
“왜? 거짓말 같아? 상급 관리자인 내게 그 정도 권한은 있어. 관리자가 뭐 별 거라고. 아, 물론 너희들한테는 큰일이겠지. 그러니 영광인 줄 알아. 내 눈에는 종놈이지만 너희한테는 벼슬이잖아?”
“……어이가 없군. 만약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거절하려고?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왜지? 거절하면 날 죽일 거니까?”
“뭐? 푸하하핫!”
헨리의 말에 엘이 크게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엘이 검지손가락으로 눈물을 쓱 훔쳐내며 말했다.
“중층 이하의 것이라 그런지 역시 뭘 잘 모르네. 내가 널 죽이긴 왜 죽여? 목숨 아깝게.”
“그럼?”
헨리의 되물음에 엘이 검지로 아래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여전히 발광하고 있는 종말들을 가리켰다.
“관리자가 하기 싫으면 저걸로 만들어 줄 게. 그거 알아? 너희가 어비스 갓이라 부르는 놈들은 사실 다 정신이 살아 있다는 거?”
“…뭐?”
엘의 말에 헨리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을 본 엘이 쿡 웃었다.
“놀라긴. 우린 쟤네를 비스라고 불러. 솔직히 난 너희가 왜 쟤네를 어비스 갓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비스들은 그냥 우리가 만든 잡졸들에 불과한데.”
어비스 갓, 혹은 종말이라 불리던 놈들의 진짜 이름은 비스였다. 그리고 비스를 만드는 자 또한 처음 보았다.
엘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설마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서 비스를 만드는 줄 알았니? 천만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정말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그래서 우린 드넓은 차원에서 넘쳐 나는 인적 자원들을 활용하는 거란다. 그런 의미에서 넌…….”
헨리를 보는 엘의 눈이 음험하게 바뀌었다.
“적어도 중상급 비스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자, 그러니 어떡할래? 감옥 같은 육신에 갇혀 평생을 말 못할 비스로 살아갈 테냐, 아님 내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의 관리자가 될 테냐? 아, 참고로.”
말을 잇던 엘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 <기권>의 권리가 일시적으로 잠금 상태가 됩니다. ]
“……!”
층계를 건너는 플레이어들의 유일한 권리였던 ‘기권’마저 잠가 버렸다.
‘이런…….’
솔직히 기권을 마지막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카드를 이런 식으로 찢어 버리다니.
“아하하, 표정을 보니 역시 기권을 쓰려 했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내가 관리자 생활만 몇 년을 했는데 일개 플레이어인 너희 속 하나를 모를까봐서. 자, 그러니…….”
엘이 두 눈을 음험하게 좁히며 물었다.
“이제 그만 선택하렴. 비스가 될 건지 아님 하급 관리자가 되어 충실한 내 부하 직원이 될지 말이야.”
외통수.
그리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상념 끝에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수납돼 있는 아이템 중 하나를 들어 찢어발겼다.
[ <초대장>을 사용하셨습니다. ]
[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곳에 손님 신분으로 즉시 이동합니다. ]
헨리가 사용한 것.
다름 아닌 일전에 손에 넣은 아이템 중 하나인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이 사용되자 이동 이펙트가 뿜어졌고 엘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드리웠다.
“그럼.”
작별 인사.
일이 꼬였음을 알게 된 엘은 뒤늦게 상급 관리자의 권한을 발동시켰지만.
[ 대상이 없습니다. ]
헨리는 이미 떠나 버리고 난 뒤였다.
*
[ <염가원>에 입장합니다. ]
이동 이펙트가 뜨고 헨리의 시야가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그와 함께 아카이브 알림이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곳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염가원.
어비스에서 가장 뜨거운 곳의 이름은 염가원이었다.
밝아진 시야 속에 색체가 채워지고 선과 면이 원래의 형태를 찾았을 때, 헨리는 사위가 빨갛고 노란, 그리고 주황색과 검정색이 적절히 섞인 염가원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지옥?
아니, 그런 곳이라기엔 이곳은 꽤 아름다웠다.
마치 단풍으로 꾸며 놓은 정원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자신이 보고 싶어 어비스를 통해 초대장을 보내 왔는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좀 전에 만난 엘 같은 미친놈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래서 여지껏 초대장의 사용을 미뤄 온 것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크후후, 드디어 초대에 응했구만.”
목소리가 들린 건 위였고 보인 건 주황색 솜사탕 같은 모양새의 주황빛 구름이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하강하듯 천천히 내려오더니 이내 곧 헨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구름의 주인은 노인이었다.
그것도 키가 꽤 작은.
아니, 드워프만큼이나 작았다.
그는 큼지막한 코에 덥수룩하고 흰 수염, 그리고 옥황상제 같은 복식을 입고 있었다.
그는 엘처럼 힘을 갈무리하고 있는지 어떠한 에테르도 느껴지지 않았다.
헨리가 물었다.
“당신인가? 날 보고자 한 자가?”
“뭣? 크하핫!”
헨리의 물음에 이름 모를 노인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보통은 존대를 할 법도 한데 참으로 격조 있는 자로군. 뭐, 상관없지. 애초에 자넬 초대한 건 나고 손님이 왕이라 했으니. 만나서 반갑네, 난 염왕이라고 하네. 이곳 염가원의 주인 되는 자지.”
염왕.
그는 스스로를 염왕이라 소개하였다.
게다가 이곳 염가원의 주인이라 하였으니 염왕의 왕은 단순한 이름 따위가 아닌 왕(王)의 의미로 사용했을 터.
염왕의 정중한 인사에 헨리도 예를 갖추었다.
“헨리 모리스라고 하네. 지금은 일개 플레이어라 딱히 날 소개할 수 있는 말이 없군.”
“흘흘, 어비스의 플레이어라면 대부분 그런 법이니까. 그나저나 초대장을 보낸 지가 꽤 되었는데 왜 이제야 초대에 응한 건가?”
그 사실이 무척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게 일부러 초대장에 이곳에 대한 힌트를 가득 담아 주었기 때문이다. 차원상인에게 물으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헨리는 염왕의 물음에 잠시 고민한 끝에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원래는 이곳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응하려 하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급히 초대에 응했다.”
“상황?”
“상급 관리자에게 쫓기고 있었거든.”
“아?”
예상치 못한 답변에 염왕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그러더니 곧 박장대소로 이어졌다.
“크하핫! 내 자네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구만! 상급 관리자는 어디서 만났는가? 중층? 상층?”
헨리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낸 만큼 염왕은 헨리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에 헨리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어떤 경위로 상급 관리자를 만났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염왕은 헨리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크!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하긴 하층로에서 워로베로스를 죽이고 나중엔 티탄까지 죽였을 정도인데, 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고말고!”
“나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군.”
“크큭, 상급 관리자 나부랭이도 아는 사실을 나라고 모를까. 게다가 내가 아니더라도 현재 탑에서 자네한테 눈독 들이고 있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나?”
“눈독?”
“그래, 눈독. 내가 자넬 왜 초대하려 했다고 생각하나? 차나 한 잔 마시려고? 후후, 절대 그렇지 않네. 난 자넬 후원해 주고 싶어 초대장을 보낸 거야.”
후원.
그 말에 헨리의 눈이 일순 커졌다.
클레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