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98화 (398/522)

# 398

외전 (7)

은퇴.

물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은퇴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정의 대부분을 도맡고 있는 헨리는 언제 과로사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헨리가 말하는 은퇴는 단지 자신이 맡고 있는 일들의 상당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담해서 번 시간으로 오래 전부터 미뤄 왔던 마지막 계획을 실행시킬 생각이었다.

‘바로 정식으로 9서클에 도전하는 것이지.’

9서클!

8서클에 도달한 헨리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것이었으나 미래에선 허무하게 이뤄 버리고 만 경지.

물론 아직도 헨리의 머릿속에는 마신에게서 건네받은 차원의 힘에 대한 지식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 지식으로 또다시 허무하게 9서클의 경지를 이뤄 낼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온전한 헨리의 힘이 아닌 타인에 의한 강제적인 경지 상승이었으니까.

게다가 헨리에게 있어 9서클은 오랜 염원이자 숙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소소한 여흥거리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화롯불 앞에서 뜨개질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는 노인네들의 여흥거리 같은 것.

물론 과거였다면 만사 제쳐 두고 9서클 증진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그만큼 마법적 증진은 헨리에게 있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만사를 제쳐 둘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획에 우선순위를 세울 때 9서클로의 증진은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 둔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헨리에겐 넘쳐 났으니까.

그러나 이젠 그 중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말끔히 해치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드라칸의 7서클로의 성장!

헨리의 얼굴이 함박웃음이 폈다.

드라칸 또한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광대에 미소를 걸었다.

헨리가 말했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드라칸, 자네는 나를 이을 천재가 틀림없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그래서 말인데. 이제 그만 마탑으로 돌아오는 게 어떤가?”

“예? 마탑으로 돌아오라니요?”

“생각해 보게. 지금 나를 제외한 아크 메이지 이상급의 마법사가 누가 있지?”

“아무도…… 없죠?”

“그렇지. 근데 지금 막 나타나지 않았는가! 드라칸, 난 이제 늙고 노쇠하여 슬슬 힘이 부치네. 그래서 일선에서 물러난 다음 느긋하게 뒤나 좀 봐주고 싶어. 근데 마침 내 뒤를 이을 적격자가 나타났으니 내가 기쁘겠는가, 안 기쁘겠는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로어가 아닌 드라칸이 계속해서 마법적 증진을 이뤄 낸다면 제아무리 로어가 마탑의 현 부탑주라 할지라도 드라칸을 탑주 자리에 앉혀야 하는 게 맞았으니까.

물론 드라칸을 탑주 자리에 앉힌다고 해서 로어가 반발할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드라칸은 오랜 시간을 들여 제 실력을 증명해 냈다.

그리고 로어는 예전에 드라칸이 의탑주로 임명되었을 때 시답잖은 소리들을 단칼에 일축시킨 사람이었다.

덧붙여 현재의 마탑은 시샘과 질투가 없는 공정하고 정당한 질서가 흐르는 곳이었다.

헨리의 말에 드라칸이 심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됐다.

비록 드라칸이 7서클을 이뤄 내긴 했지만 탑주라는 자리는 단순히 마법적 소양만 갖췄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녀석에겐 지금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헨리가 웃으면서 드라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핫! 농담일세, 농담.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야!”

“그, 그렇습니까?”

드라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헨리는 드라칸이 내쉰 안도의 한숨 속에서 약간의 아쉬운 기색을 알아챌 수 있었다.

‘허허, 이놈 봐라?’

역시 드라칸은 야망이 있는 놈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뻤다.

드라칸에게 차기 탑주에 대한 생각이 아주 없진 않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헨리가 말했다.

“하지만 또 모르지. 사람 앞날이란 알 수가 없는 법이니까. 당장 몇 년 전의 자네만 해도 그렇지 않았나? 그러니 내 말을 아주 흘려듣진 말게. 자네라고 2대 탑주를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니…….”

헨리는 말끝을 흘렸다.

그런 다음 서류 더미가 잔뜩 쌓여 있는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은 후 말했다.

“의탑주를 이을 차기 후계자를 미리미리 정해 놓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

후계자 선발.

헨리는 드라칸 로티크라는 야망가에게 은은하게 부채질을 하면 될 뿐이었다.

‘의탑주의 후계자라…….’

드라칸이 헨리가 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헨리가 한 말을 곱씹어 봄과 동시에 서류 더미가 가득한 헨리의 자리에 앉아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곳은 마치 왕좌처럼 느껴졌다,

과로사로 쓰러져 죽을 만큼 쌓여 있는 서류 더미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말이다.

드라칸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헨리가 힘차게 대답하는 드라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제대로 불씨를 당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헨리는 천천히 자신의 업무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다.

처음엔 염려스러웠다.

지금 당장 과로사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수많은 업무들을, 과연 다른 사람들이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헨리가 담당하던 업무의 일부를 나눠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들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목숨 걸고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 뭐……. 그럴 것까진 없는데…….”

“아닙니다! 무려 대마법사님께서 직접 해 오시던 일을 저에게 주신 것이니 만큼 절대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절대 대마법사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한결 같은 반응들이었다.

열에 아홉은 헨리가 자신에게 직접 업무를 맡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다.

그만큼 헨리는 그동안 황궁에 있어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인물이자, 모든 업무의 중심이며, 심장이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나눠 주는데 대체 왜 좋아하는 거지?’

물론 헨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덕분에 업무 분산에 대한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이다음에 해야 할 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헨리가 갑작스레 업무 분담을 시작한 이유가 원인 모를 병을 앓아 급하게 은퇴를 준비 중이라는 헛소문을 잡는 것이었다.

헨리가 중얼거렸다.

“나 참, 소문이란 건 어딜 가든 반드시 생겨나는구만.”

아마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 않아 생긴 소문이리라.

이에 헨리는 공개 석상에서 드라칸의 7서클로의 증진을 알리고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랜만에 8서클 마법들을 대중에게 시연하는 것으로 소문을 가볍게 일축시켜 냈다.

특히 마법 시연을 마친 후 헨리가 대중들에게 했던 말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때의 헨리는…….

“내 건강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난 제국에서 가장 좋은 식사와 가장 좋은 잠자리에서 자고 있으니까. 난 그저 제국이 안정화가 되어 이제야 좀 쉬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자기 앞가림에나 신경을 쓰도록. 난 그대들의 손주들보다 더 오래 살 테니.”

헛소문을 믿는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말해 주고 싶은, 헨리의 진심이 아주 꾹꾹 담긴 시원한 일갈이었다.

이로써 나름대로의 정리가 끝나갔다.

이제 헨리가 최소한의 업무를 제외하고 황궁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황궁 행사에 얼굴을 내비치는 것과 실버를 비롯한 모리스 차일드들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탑 꼭대기 연구실 한편에 마련된, 비밀 저택에 기거하는 네프람 교단을 보살피는 것 정도였다.

정리를 마친 헨리가 말했다.

“그럼…… 슬슬 새 연구실을 한번 마련해 볼까?”

9서클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연구실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거창하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다.

어차피 연구실은 헨리 혼자서 사용할 것이고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마탑 꼭대기로 돌아와 이따금씩 업무도 봐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마탑 꼭대기 연구실 한쪽에, 네프람 교단이 기거하는 비밀 저택 같은 새로운 비밀 공간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클레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클레버.

그리운 이름.

헨리는 문득 클레버를 떠올렸다.

그 녀석에겐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간을 되돌리면서 헨리는 많은 것들을 다시 원래대로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미래의 인연들까지 챙기는, 그런 욕심은 부릴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클레버는 기억 한쪽에 묻어 두기로 했다.

딱!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의 업무 책상 뒤편에 새로운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 만들어졌다.

“으음.”

짧은 신음과 함께 헨리는 문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같았다.

분명히 방이었어야 할 공간은 드높은 창공과 더불어 끊임없이 부서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변이 펼쳐진 것도 아니었다.

썰물과 밀물이 교차되며 파도가 굽이치는 곳의 끝에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연구실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헨리의 취향을 십분 반영한, 오직 헨리만의 새로운 연구실이 탄생한 것이었다.

헨리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웅-! 웅-! 웅-! 웅-!

웅장하진 않았지만 나름 전율 돋는 진동이 사방을 메꾸었다.

사방을 메꾼 진동의 정체.

그것은 다름 아닌, 그동안 헨리가 꼼꼼하게 메모해 온, 앞으로 연구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이를 테면 ‘지식의 버킷리스트’같은 것들, 그 수는 무려 999개나 되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계획표는 며칠 전에 드라칸이 7서클이 됨으로써 완전히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헨리의 눈앞에 떠오른 것들이야 말로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난, 헨리가 억눌러 온 욕구의 결집체 같은 것들인 셈이었다.

헨리가 뒷짐을 지고 동굴의 박쥐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는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래, 한때는 이런 것도 연구해 보고 싶었지.’

다양한 분야와 장르에서 비롯된 기록들이 한껏 피어난 꽃송이처럼 헨리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얼른 연구를 시작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할 정도였다.

기록을 한참 구경하던 차였다.

헨리는 문득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주름이라…….’

주름.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

과거의 헨리는 8서클을 이루는 동안 두 번이나 각성을 해 생각보다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했다.

하지만 시간을 한 번 되돌린 직후 8서클을 이루었을 땐 무슨 이유에선지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신체의 나이가 어려진다는 건 여러모로 많은 이점들이 있었으니까.

헨리는 같은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성하지 않은 이유로 무언가 깨달음이 부족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서클의 증진이 절실했다.

신체 나이가 젊어져야, 하고 싶은 연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할 수 있을 테니까.

헨리는 금방 얼굴에서 손을 뗐다.

나름대로 적절한 동기부여가 됐다.

사실 신체의 나이를 젊어지게 하는 건 현 의탑의 기술로도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그런 편법보다 자력으로 젊음을 되찾고 싶었다.

각성을 통한 회춘은 마법사에게 있어 둘도 없는 자랑이었으니까.

헨리는 얼굴에서 손을 뗀 다음 다시 허공 가득히 수놓인 자신의 기록들을 구경했다.

헨리가 자신의 기록을 전부 살펴보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중 문득 어떤 기록 앞에서 멈춰 섰다.

헨리는 멈춰 선 기록에 손을 뻗었다.

우웅-!

기록에 손을 대자 허공에 수놓인 기록이 종이로 인쇄되어 헨리의 손에 쥐여졌다.

헨리가 개발한 고도의 기록 마법들 중에 하나였다.

기록을 읽어 내려가던 중 헨리가 중얼거렸다.

‘차원의 힘에 대한 지식이라…….’

헨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것을 손으로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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