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389화 (389/522)

# 389

비운의 천재 (4)

“타, 탑주님?”

드라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하지만 확실히 놀랄 만도 했다.

현재 황궁 옆에 지어진 대륙 유일의 마탑의 주인이 8서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아무리 작은 탑이라 할지라도 탑주가 4서클인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헨리는 드라칸이 왜 놀라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능글맞게 반문했다.

이에 드라칸이 황급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제, 제가 탑주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현 마탑의 부탑주님이 현재 6서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저 따위는……!”

“따위라니, 자네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군그래.”

“예?”

“자신감을 가지게, 드라칸. 만약 자네의 비밀 연구가 아니었다면 킬라이브에 탑은커녕 의료 지원도 없었을 것이란 걸 생각하게.”

“하, 하지만!”

“쉿.”

흥분한 드라칸은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가만히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차피 한번 마음을 굳힌 이상 의견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드라칸. 정 그 자리가 부담스럽다면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겠느냐?”

“실력…… 말씀이십니까?”

“그래, 분야를 막론하고 실력만 확실하다면 모두의 존경을 받는 것이 불변의 진리지. 만에 하나 너의 낮은 서클을 보고 무시하는 이가 있다면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서서 그 녀석을 처리해 주마.”

헨리는 어차피 드라칸의 뒷배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왕 뒷배가 되어 주기로 했다면 확실하고 절대적인 뒷배가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어차피 미래에 7서클이 될 남자가 바로 드라칸이다.

그는 아서스의 지원하에 어렵사리 7서클의 경지를 이루었는데 이런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준다면,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7서클의 경지를 이룰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드라칸의 두 눈에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발락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라칸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절대로 대마법사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 젊은 마법사라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흡족한 반응이었다.

헨리는 드라칸의 어깨를 토닥인 후 잠시 드라칸에게 자리를 비워 줄 것을 부탁했다.

그것을 본 발락이 말했다.

“마법사님께 킬라이브의 안내를 도와줄 병사 한 명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한 식구가 되실 분인데, 킬라이브의 지리를 익혀 두시면 분명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드라칸은 발락의 배려로 병사 한 명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에는 이제 헨리와 발락,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헨리의 시선이 발락을 훑는다.

‘확실히 이때의 발락은 좀 유들유들한 면이 있구만.’

킬라이브 내에서 징벌왕이라고 불렸던 남자가 바로 발락 더 오니르다.

하지만 미래에서 헨리의 철퇴가 되어 주었던 발락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발락은 감정 표현도 제법 풍부하고 살가운 면이 보였다.

‘피를 너무 오래 봐서 그랬나?’

발락이 어떤 계기로 그런 차가운 남자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에는 그런 사정 따윈 궁금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평화가 찾아왔다.

느긋하게 추억을 되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신경을 좀 써 줘야겠지.’

발락은 헨리의 든든한 철퇴였지만, 결국엔 아서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갚는다기보다는 고마움에 보답하는 정도로 발락을 돌봐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킬라이브 내에 세워질 의탑이었다.

‘이곳에 의탑이 생기면 분명히 킬라이브 전체의 삶의 질이 향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발락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헨리는 문득 아서스 편에 있던 발락을 데려오기 위해 그를 설득했을 때를 떠올렸다.

거칠고 냉혈하기 짝이 없던 발락이 헨리의 든든한 철퇴가 되어 주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발락은 대륙에서 가장 정의로운 인물.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오직 정의로움에만 가치를 두는 가장 순수한 인물이기도 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자신의 죽은 스승인 헨리 대공의 유지를 이어 멸망 직전에 다다른 세상을 다시 재건해 내겠다고 발락에게 약속했다.

다소 낯간지러운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발락은 대륙에서 가장 정의로운 남자였다.

통일 전의 썩어 빠진 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발락은 자신이 본 썩어 빠진 세상, 그 모든 것들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희망을 헨리에게서 보았다.

그것이 발락이 헨리의 철퇴가 된 이유였다.

발락이 말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마법사님.”

“아닙니다. 범죄 없는 정의로운 세상이 오려면 아직 이 정도로는 한참이나 부족하니까요.”

“대마법사님……!”

정의.

이 시대에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쁜 마음 없이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입신양명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범죄를 완전히 척결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발락이 원하는 세상이 올 수 있게끔 그를 도와주는 것, 그것이 현재의 헨리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헨리는 생각했다.

* * *

헨리는 드라칸과 함께 마탑으로 복귀한 직후, 의탑 건설에 대한 뜻을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밝혔다.

마탑이 발칵 뒤집혔다.

킬라이브에 의탑을 짓는 것에 놀란 게 아니다.

이름도 겨우 들어본 4서클짜리 마법사를 새 마탑의 탑주로 앉힌 것에 놀란 것이다.

처음엔 드라칸을 탑주 자리에 앉히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듯싶었다.

부탑주인 로어를 의식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로어는 헨리의 선택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되레 이간질하듯 로어에게 분노를 부추기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멍청하긴! 탑주님을 그렇게 보고 아직도 몰라? 탑주님께서 과연 아무 생각 없이 드라칸을 의탑주 자리에 앉히셨을까? 천만에! 드라칸 그자는 어쩌면 탑주님을 이을 희대의 천재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런 쓰잘머리 없는 걱정일랑 하지 말고 가서 하던 연구나 마저 해!”

벼락같은 꾸짖음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헨리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로어의 꾸짖음을 전해 들은 헨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로어답군.’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드라칸을 탑주 자리에 앉힘으로써 약간의 잡음은 발생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지나갈 소나기이리란 도 예측했다.

로어의 심성을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잡음이 잦아들어갈 무렵, 헨리는 마탑 내에서 인간학을 전공하는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의탑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탑 곳곳에 모집 공고가 붙었다.

인간학 마법사들이 술렁였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공고에 적힌 내용이 생각보다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실험에 필요한 ‘인간’ 무제한 제공!

모두가 공고에 적힌 내용을 보고도 두 눈을 의심했다.

실험에 필요한 인간의 ‘무한한 제공’이라니?

이것은 마탑의 인륜적 지침에 확실히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고를 본 마법사들은 처음엔 하나같이 모두 다 입을 모아 그 점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헨리는 그들의 비난에 대해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공고 날짜가 카운트 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모여 있을 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맹렬히 공고를 비난하던 마법사들이었지만, 해가 지고 달이 뜰 때쯤이 되어서야 한두 명씩 몰래 접수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인간학을 공부하는 마법사치고 이런 조건을 놓칠 바보는 없을 테니까.’

접수처를 통해 접수된 지원서들을 보며 헨리가 혀를 찼다.

이 또한 예상한 바다.

아무리 4서클 마탑주를 인정할 수 없고 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비난해도…… 결국은 개인의 욕심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헨리는 욕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결코 비난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의 행동이 모순된다고 해도 그들의 욕망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탑으로의 이주에 대한 모집 공고가 마감되었다.

신청서를 확인한 헨리는 마탑 내에 기거하는 대부분의 인간학 마법사들이 의탑으로 이주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운 자식들.”

* * *

공고가 마감되고 의탑으로 이주하던 날, 마탑 로비에 모여 서로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인간학 마법사들은 또 다른 볼거리였다.

로비에 모인 인간학 마법사들에게 헨리가 말했다.

“이런 모순적인 놈들.”

비난이 아니었다.

뼈가 실린 농담일 뿐이었다.

헨리의 농담을 들은 인간학 마법사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핀잔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헨리가 분위기 환기를 위해 얼른 용건으로 넘어갔다.

“됐고. 다들 모집 공고에 응해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또한 그대들이 의탑에 지원서를 낸 것은 드라칸을 초대 의탑주로 인정하고 오직 인간학의 발전에만 관심을 두겠다는 사실로 해석하고 그대들을 기쁘게 수용토록 하겠다.”

헨리는 연설을 짧게 끝냈다.

연설이나 축사를 길게 하는 건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허례허식이라는 이유 말고도 헨리가 연설을 짧게 끝낸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헨리는 단상에서 내려온 후 뒤에서 대기 중이던 드라칸을 끌어다가 단상 위로 밀어 올렸다.

헨리가 단상에서 내려가며 드라칸에게 속삭였다.

“준비됐지?”

꿀꺽.

드라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의탑으로 이주하던 날, 선배 마법사들에게 축사든 소감문이든 단상에 서야 할 것이라고 헨리에게 미리 귀띔을 받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미리 귀띔을 받았다고 해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라칸은 오늘을 위해 지난 며칠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않고 취임식을 준비했으니까.

단상 위에 오르기 전 드라칸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런 다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단상 위로 올라섰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드라칸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눈빛에 드라칸은 숨구멍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나 견뎌야만 했다.

지금 저 시선을 견뎌내지 못하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테니까.

드라칸은 과거, 음지에 숨어 혼자서 외롭고 고독한 실험을 하던 음울했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 저 눈빛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칸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을 준비했다.

드라칸은 입을 열기 전 가볍게 목례했다.

선배 마법사들에 대한 예우였다.

“존경하는 선배 마법사님들.”

드라칸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드라칸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연구에 필요한 인간 실험체를 공급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고에 적힌 대로 지원서를 내긴 했다.

하지만 지원서를 냈다고 해서 진심으로 드라칸을 의탑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라칸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제가 의탑주가 된 것에 대해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좌중이 침묵했다.

침묵은 금이고 긍정이다.

드라칸이 말했다.

“저 또한 여전히 얼떨떨합니다. 하지만 대마법사님께서 맡겨 주신 이 자리, 단순히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어찌 됐든 저에겐 소중한 기회였으니까요.”

말을 잇는 드라칸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킬라이브를 다녀오고 일주일. 정확히 일주일간 의탑으로의 이주에 대한 모집 공고가 내려진 동안,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께 제 의지를 증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생기가 도는 드라칸의 눈빛에 점점 더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드라칸을 바라보는 좌중들 또한 점점 더 드라칸의 다음 말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사실 저도 고리 4개짜리 마법사가 탑주가 된다는 것에 좀 양심의 가책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저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고 그 결과를 일주일 만에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결과?”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떤 마법사의 입에선 ‘설마!’라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드라칸이 말했다.

“저 드라칸 로티크. 오늘 부로 4서클 수석 마법사가 아닌 5서클의 경지에 오른 정식 마도사가 되었습니다.”

“……!”

“……!”

좌중이 다시 침묵한다.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어떤 마법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서클을 한 단계 증진시켜 냈다고?”

“대체 무슨 수로?”

경악과 경탄이 뒤섞여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중의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라칸이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여러분! 이 모든 건 여러분 앞에 당당히 서고 싶은 제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보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저 드라칸 로티크는! 빠른 시일 내에 아크 메이지가 되어 의탑주에 어울리는 훌륭한 마법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부단한 노력을 곁에서 지켜봐 주시겠습니까?”

드라칸의 목소리에는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비 전체가 드라칸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드라칸의 외침이 끝났을 때, 좌중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드라칸의 패기 있는 취임사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침묵의 한쪽에서 조그마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짝- 짝- 짝-.

드라칸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옮겨졌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헨리가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헨리의 박수를 잇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로비 전체를 가득 메웠다.

“멋지다!”

“그래! 한번 해 봐라!”

“좋은 패기다, 드라칸!”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드라칸이 진정한 의탑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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