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
불편한 재회 (1)
하반신만 남아 꿈틀대고 있는 베가루스를 보며 헨리는 이마를 찡그린 채 고개를 숙였다.
‘젠장, 힘 조절 좀 할 걸.’
완벽하게, 덧붙여 단번에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센 마법을 준비한 게 이번 사태의 원인인 듯싶었다.
헨리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올린 후 로브의 깃으로 하관을 가리며 생각했다.
‘베가루스 이 약해 빠진 놈은 고작 마법 한 방을 못 견뎌서 이 사달을 일으켜? 저게 말이나 돼?’
소리 없는 질책이었지만 그 질책을 들어야 할 베가루스의 상반신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덧붙여 헨리가 날린 마법의 여파로 상반신이 날아간 베가루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족들 또한 대부분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모든 게 마왕의 증오를 부수기 위한 헨리의 마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토벌군의 입장만 애매해졌다.
마왕군을 토벌하겠다고 심기일전해서 여기까지 헤쳐 왔건만,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 때문에 더 이상의 토벌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골든이 난처한 표정으로 헨리에게 물었다.
“헨리.”
회귀한 직후, 처음으로 골든에게 불린 이름이다.
원래라면 만감이 교차하며 울컥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후우…….”
헨리는 골든이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안다.
자신은 대마법사이기도 했지만 토벌군의 최고 참모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헨리 또한 예상치 못한 일.
잠깐의 고민 끝에 헨리가 말했다.
“그냥 잔존 병력이나 처리하고 돌아가자.”
“뭐? 그걸로 끝?”
“그럼? 잡지도 않은 마왕을 우리가 잡았다고 할 순 없잖아? 물론 우리가 잡은 것처럼 포장해서 너를 신격화할 순 있겠지만……. 거짓말은 결국 들키게 돼 있어. 너무 욕심부리지 마, 골든.”
“끙, 아쉽구먼. 마왕 잡을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는데 말이지.”
“아쉬우면 마왕 발모가지라도 잘라 가지 그래? 기념으로 박제해 놓든가.”
“그래, 그게 좋겠다.”
“휴, 마왕의 사체는 내가 챙길 테니 남은 놈들이나 깡그리 정리해.”
최고 참모가 의견을 제시하고 토벌 군단장인 골든이 의견을 수용하니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빠르게 잔존 병력의 처리가 시작됐다.
헨리는 그 틈에 마계의 틈 앞으로 다가갔다.
고오오오.
벌어진 차원의 틈 사이로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엉켜 죽음의 물결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게 얼마나 밉던지…….’
아무리 마왕을 처치한다고 한들, 이 빌어먹을 구멍만 있으면 마왕은 끊임없이 나타날 테니까.
더불어 마왕이 아니더라도 차원의 틈은 끊임없이 마족과 마물들을 뱉어 대는 통에 매년 칼리번 요새의 병사들만 죄 없이 죽어 나갔다.
헨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원의 틈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이딴 게 차원 재해의 일종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것을 닫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일전에 마신으로부터 전수받은 차원의 힘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선 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시간을 되감는 조건으로 신력을 포함한, 가진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결국 안전하게 방어하는 것이 고작인가?’
아쉬웠다.
희생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주신과의 약속을 도로 무를 수도 없다.
어찌 됐든 선택을 한 건 헨리였으니까.
‘그래도 언젠간 반드시……!’
마계의 틈을 바라보는 헨리의 눈빛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틈 구경을 마친 헨리가 시선을 돌렸다.
다들 부지런하게 잔존 병력들을 처리하고 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친우의 공적을 가로챈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좀 들었지만, 크게 괘념치는 않기로 했다.
그에게 마왕을 잡았다는 전설 같은 업적을 주진 못했어도, 그보다 더 소중한 목숨을 건지게 해 주었으니까.
물론 골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를 테지만 말이다.
“자, 다들 슬슬 돌아가자!”
“예!”
잔존 병력의 처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골든은 전군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골든은 복귀를 명령하면서도 내심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아쉬운 건 골든뿐이다.
병사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그렇잖아도 마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잔뜩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횡재로 마왕이 반쯤 죽어 있으니 큰 힘 들이지 않고 목숨과 명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챙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왕 처치를 위해 구성되었던 토벌군이 회군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골든과 함께 선봉에 섰다.
물론 선봉에 두 사람만 있진 않았다.
선봉에는 골든, 헨리와 함께 대륙 제패를 했던, 오래 전에 죽어 볼 수 없었던 미안한 얼굴들도 함께였다.
헨리는 그제야 회귀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는 듯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었고 동시에 미안한 얼굴들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계획표에 적어 두었던 대로,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행복과 저들의 안위를 위해 살 것을 다짐했다.
‘이제 시작인가?’
마왕의 죽음, 그리고 저주로부터 탈피.
친우에게 죽음의 운명을 빗겨 가게 한 것이 헨리가 생각했던 첫걸음이자 가장 큰 바람이었다.
헨리는 자신의 계획이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뿐이라며 다시 한번 정신의 끈을 바짝 조였다.
* * *
1급 구역을 벗어나 어느덧 9급 구역에 당도했다.
9급 구역 너머에는 오랜 세월, 대륙의 안녕을 위해 마물의 숲과 대치해 온 곳이 있다.
바로 칼리번이다.
이때의 칼리번은 제국군에 편성된 정식 군대가 아닌 임시로 조직된 자경단 느낌의 군대였다.
이를 테면 가까운 인근 국가들에게 배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목숨을 걸고 대륙을 지키는 이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마왕을 저지한 직후, 이곳 칼리번 최고 책임자를 만나 제국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곳을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성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그 영예로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칼리번의 최고 책임자를 만났다.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제왕님.”
이 시기의 칼리번은 요새가 아닌 기지 정도로 분류되어, 칼리번 요새가 아닌 칼리번 기지라고 불리었다.
그렇기에 칼리번 기지의 현 최고 책임자인 기지장, 덱스터 칼리번이 골든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덱스터 칼리번에게 칼리번의 정규군 편입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골든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마왕을 저지했으니 대륙의 중심으로 이동해 대륙을 대표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영광을 그대들과 함께 나누겠다. 그때까지 먹고 쓸 식량과 무기, 그리고 술과 고기를 두고 갈 테니 작게나마 병사들과 회포를 풀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제왕님!”
골든은 헨리가 일러준 대로 남은 군량미 전부를 칼리번에 기부했다.
어차피 물자는 또 공급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어서 골든은 칼을 뽑았다.
그런 다음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덱스터의 양어깨, 그리고 머리에 한 번씩 칼을 올려 둠으로써 덱스터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대는 영예로운 조상님들의 뜻을 이어 지금까지도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해 대륙의 안녕에 이바지해 왔다. 그러므로 통일 제국의 황제, 나 골든 잭슨 에드워드는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를 칼리번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하며, 또한 새롭게 건국할 나의 나라의 백작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제왕님……!”
“감동할 것 없다. 난세가 끝나고 드디어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어긋났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덱스터 칼리번, 그대는 그 어긋남을 바로 잡는 내 첫걸음일 뿐이다.”
작위의 수여.
아직 정식으로 제국이 건국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골든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함과 동시에 대륙 전체를 지배할 황제가 된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덱스터 또한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오랜 세월,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칼리번 가문의 봉사 아닌 봉사로 인해 얼마나 모진 고통을 겪어 왔는가?
그러나 그동안의 희생은, 이제 단순한 고통이 아닌 대륙 전체가 알아주는 명예로운 업적이 되었다.
“헨리.”
골든이 헨리를 불렀다.
“왜?”
“마왕의 왼발을 좀 잘라 주겠어?”
“왼발을?”
“응, 내가 내린 첫 작위인데 하사품 정도는 있어야지.”
“음, 좋은 생각이야.”
하사품으로 베가루스의 왼발을 내린다는 말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왕의 사체 일부를 하사품으로 내린다는 건 헨리의 기억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당시의 골든은 마왕의 증오로부터 나온 저주에 고통받느라 이동하는 내내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바뀌고 있군.’
과거를 바꾼다는 건 미래가 바뀌어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바뀐다는 건 역사 또한 크게 변화한다는 의미가 된다.
헨리는 새삼스럽게 주신이 시간을 되돌려 준 일이 얼마나 큰일을 해 준 것인지 깨달았다.
“여기 두고 가지.”
헨리는 아공간에서 능숙하게 마왕의 왼발을 잘라 꺼내 놓았다.
피 냄새나 썩은 내와 같은 사체에서 나오는 특유의 악취는 없었다.
진즉에 마법으로 다 처리해 뒀으니까.
덱스터는 자신의 몸뚱이만 한 베가루스의 왼발을 보며 잠시 놀라움에 잠겼다가, 정말 귀한 보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제왕님. 아니 폐하!”
자신을 ‘폐하’라고 칭하는 덱스터의 대답에 골든은 꽤나 흡족해했다.
토벌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덱스터를 포함한 칼리번 용사들의 노고를 치하해 준 뒤에야 칼리번을 벗어났다.
* * *
토벌군이 이동했다.
목적지는 새롭게 건국될 나라의 수도이자 현 대륙의 중심지로 불리는, ‘린드버그 벌판’.
린드버그는 헨리가 골든과 함께 전 대륙을 돌면서 봐 두었던, 새로운 제국의 심장이 될 도읍지였다.
린드버그가 수도가 된 까닭은 간단했다.
우선 대륙의 중심부에 있어 대륙 어디에 문제가 생겨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훌륭한 지리적 이점을 가졌다.
그리고 곡창지대만큼이나 고른 들판과 린드버그 인근에 흐르는 커다란 강은 주민들에게 원활하게 식수를 공급해 줄 것이다.
계획표를 짤 때 헨리는 고민이 많았다.
미래에 이곳은 아서스에 의해 버려진 땅이 된다.
유라시아 제국이 무너진 후 아서스 그놈이 자기가 살던 곳을 수도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도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 다른 곳을 수도로 정할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곳을 찾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감도 있고, 이미 이곳에서 골든을 기다리며 수도의 건설에 힘쓰는 사람들이 많아 도읍지의 변경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마음을 고쳐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땅에는 죄가 없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보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헨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린드버그를 이롭게 할 것들에 대해 이동하는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린드버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보이는군.”
린드버그가 보이기 시작하자 골든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저곳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우면, 그야말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온 동료들 또한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버지이!”
린드버그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어느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이제 겨우 소년이 되었을 법한 아이의 모습.
헨리는 멀찍이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찌푸린 눈살은, 곧 정말로 헨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실버?”
헨리의 입에서 탄식 같은 이름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