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
서열 정리 (2)
“……?”
그러나 정작 가니스엘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니스엘이 갑작스러운 기가탄의 목숨 구걸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가니스엘이 헨리에게 물었다.
“그대, 무슨 짓을 한 건가?”
“응?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얘가 이상한 거야.”
“확실한가?”
“그럼.”
거짓말은 아니었다.
헨리가 기가탄에게 쏘아 보낸 살기는 정말 그저 노려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진심을 좀 집어넣긴 했지만.’
그래서 가니스엘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기가탄에게만 특정된 살기였으니까.
헨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아함을 표하자 가니스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기가탄은 자신보다 훨씬 똑똑해서 싸워 보기도 전에 헨리가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깨달음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로 인해 트러블은 없었다.
헨리에서 기가탄으로 시선을 돌린 가니스엘이 검을 어깨에 얹은 채 기가탄에게 말했다.
매우 한심하다는 눈빛을 하고서.
“실망스럽군, 기가탄. 이게 정녕 마계 서열 2위의 모습이란 말인가?”
“닥쳐라! 네놈은 정녕 느껴지지 않는 게냐? 이분의 위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말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뭐? 근데 네놈은 어떻게……!”
“네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는 내 친우이기도 하다. 그러니 난 너처럼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다.”
“그런……!”
적색거인족의 천재, 기가탄은 타고난 피지컬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그는 머리도 비상했다.
그래서 작금의 사태를 머릿속에 정리하며 얼른 수 계산을 시작했다.
‘가니스엘 이놈은 기껏해야 3위 나부랭이. 놈이 어떤 비장의 수를 감추고 있는 건진 몰라도 적어도 이놈에게 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만약에 이놈을 잘못 건드렸다가 눈앞의 인간이 복수라도 한다면?’
그건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덧붙여 기가탄은 죽고 싶지 않았다.
승리와 전투에 열광하는 게 마족의 본능이긴 했어도, 본능보다 이성에 더 충실하기에 기가탄이 다른 마족들과 달리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살아남는 자가 결국 웃을 것이고 왕관도 거머쥘 수 있을 테니까.
기가탄은 계산 끝에 다시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의 항복을 선언합니다.”
기가탄은 결국 서열전에서 패배를 선언했다.
기가탄이 내놓은 최적의 수였다.
그것을 본 헨리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초승달처럼 웃었다.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네.’
사실 기가탄이 명예로운 결투를 제안하며 헨리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했어도 어떻게든 방해할 생각이었다.
가니스엘과의 친의도 중요하지만 지금 헨리에게 더 중요한 건 얼른 가니스엘이 마왕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기가탄이 영리한 덕에 일이 잘 풀리자 헨리가 가니스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의를 상실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인정해 주는 게 어때? 어차피 중요한 건 이놈이 아니라 다음 놈이잖아?”
“음, 알겠다.”
이로써 가니스엘은 공식적으로 마계 서열 2위가 될 수 있었다.
헨리는 기가탄으로부터 확실한 서열 약속을 받아 낸 직후 다음 상대를 찾아 이동하기로 했다.
기가탄은 죽이지 않기로 했다.
기가탄을 살려 주는 이유는 놈이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음?”
기가탄이 다급한 목소리로 떠나는 발걸음을 붙잡았다.
기가탄이 말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널?”
“예! 두 분께선 지금 그레텔에게 도전하러 가시는 길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혹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새로운 마왕 후보의 탄생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
기가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헨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현명한 대처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면서 갑자기 싸움 구경을 하고 싶다고?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더불어 기가탄의 입장에서 좀 전의 패배 선언은 굴욕에 가까운 일이었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탄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열의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헨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가탄을 바라보았다.
놈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허나 기가탄의 의도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그레텔은 나완 달리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레텔과의 전투를 지켜보며 놈들의 전력을 대강 파악한 후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린다.’
이른 바 전략적 항복이었던 셈이다.
눈앞의 인간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레텔과 함께라면 어찌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탄의 의도를 헨리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가니스엘에게 처분을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서열도 높아졌으니 가니스엘이 선택하는 게 맞겠지.’
이럴 땐 서열을 한 단계 더 높인 가니스엘에게 처분을 맡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을 헨리 마음대로 처리한다면 차기 마왕이 될 가니스엘의 위엄이 서질 않을 테니까.
헨리가 가니스엘에게 물었다.
“어떡할래?”
“음…….”
결정권이 손에 들어오자 가니스엘이 잠시간 고민했다.
고민 끝에 가니스엘이 말했다.
“기가탄.”
가니스엘이 기가탄의 이름을 부르자 기가탄이 짐짓 긴장한 눈빛으로 가니스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가니스엘이 말했다.
“사실 난 다음 서열 후보인 그레텔을 쓰러뜨리고 천계를 칠 생각이다.”
“……뭐라고?”
“너도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만 난 본디 천계에서 태어나 천계의 대천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던 몸.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추방당한 탓에 이 꼴이 됐지만 난 꽤나 오래 전부터 날 이곳으로 추방시킨 천신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기가탄은 심히 놀랐다.
가니스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목표가 천계와의 전쟁이라니?
심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보통 새로운 마왕이 된 마족들은 마신에게 부여받은 힘을 통해 인간계를 침략하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은 천족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쉬운 놈들이니, 그렇게 손에 넣은 인간계를 바탕으로 전력을 보강해 천계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가니스엘은 인간계가 아닌 천계를 목표로 두고 있었다.
기가탄의 머리가 다시 한번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눈앞의 가니스엘은 정말 잘 쳐줘도 자신과 힘이 비슷했다.
그렇기에 가니스엘의 힘으로는 그레텔은커녕 자신에게 패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계와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다는 건 잡스러운 악조건들 따윈 무시해도 될 정도의 엄청난 히든카드가 그의 손에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가탄은 그 히든카드가 눈앞에 있는 저 인간 남자라고 생각했다.
‘저 인간 남자가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라고……?’
기가탄의 눈빛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이름도 모를 저 인간 남자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가니스엘이 천계와의 전쟁을 생각할 만큼 믿고 의지한단 말인가?
계산은 금방 끝났다.
기가탄은 기본적으로 자존심 강한 싸움꾼이었지만 큰 그림도 그릴 줄 아는 영리한 싸움꾼이었다.
그리고 촉도 좋았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레텔과의 전투를 보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아닌, 좀 더 큰 그림을 보고 저들과 한 배를 타자고 말이다.
그러나 현재 두 마족 사이에는 어떠한 제안도 오가지 않았다.
기가탄이 짐짓 놀란 눈빛을 천천히 거두며 대꾸했다.
“……그렇군.”
“네가 무슨 꿍꿍이로 대결을 구경하겠다는 건진 잘 안다.”
“무슨…… 뜻이지?”
“시치미 뗄 것 없다, 기가탄. 네가 이렇게 쉽게 굴복할 마족이 아니란 건 전 마계인들이 아는 사실이니까. 그러니 생각을 바꾸는 게 어떻겠나, 기가탄?”
“…….”
본심을 파악당했다니 할 말이 없었다.
가니스엘의 간파에 기가탄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가니스엘이 말했다.
“내 오른팔이 되어라, 기가탄.”
“……!”
놀란 건 헨리였다.
기가탄의 본심을 알았으니 곧 녀석을 처리하거나 동행을 거부하는 정도로 끝낼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수하가 될 것을 제안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 말에 놀란 건 기가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
자신의 본심을 간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민다.
마계인이라면 좀처럼 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화근의 싹을 잘라 두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알맞은 조치였으니까.
그런데 가니스엘은 오히려 본심을 간파하고도 손을 내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기가탄의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가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밌군.’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다.
동료도 아니고 오른팔이라니?
그 말인즉슨 자신의 수하가 되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 오만함이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이곳은 마계.
동료애나 전우애 따위는 없다, 오직 힘에 의한 질서만이 있을 뿐.
그렇기에 가니스엘의 제안은 지극히 마계인다운 제안이었다.
‘천계 출신이라 너무 얕잡아 봤군. 내 생각이 짧았어.’
가니스엘의 사연은 마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한번 천족은 영원한 천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겪어 보니 그것은 선입견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가탄은 가니스엘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자신보다 약한 반푼이 마족이겠거니 했건만 가니스엘은 어쩌면, 자신보다 그릇이 더 큰 마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고할 이유가 없었다.
기가탄이 의도했던 것과 가니스엘의 바람이 맞아떨어지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가탄이 가니스엘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니스엘의 눈빛은 멍청한 천계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한 마계인의 눈빛이었다.
기가탄이 입꼬리를 올리자 가니스엘 또한 입꼬리를 올렸다.
가니스엘이 손을 내밀었다.
기가탄이 가니스엘이 내민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오른팔은 거절이야. 등을 맡기는 사이 정도로 해 두지.”
가니스엘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가탄.
이로써 기가탄은 헨리 이후에 가니스엘이 마계에서 얻은 두 번째 친우였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속으로 감탄했다.
‘흐음,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왕 자리에 어울릴 수도 있겠는데?’
헨리가 가니스엘의 생각지도 못한 리더십에 감탄했다.
무엇이 됐든 가니스엘이 정말로 마왕의 자질을 갖고 있다면, 헨리로썬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으니까.
기가탄이 정식으로 일행에 합류하자 기가탄은 그제야 아까부터 꾹 참고 있던 궁금증을 가니스엘에게 물어보았다.
“가니스엘. 혹시 저분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분의 정체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직접 묻기엔 용기가 나지 않아 가니스엘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니스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친우다. 헨리 모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계 최고의 마법사지.”
“친우라…….”
예상대로 인간은 맞았다.
하지만 관계가 친우일 줄은 몰랐다.
친우는 말 그대로 동등한 관계였으니까.
가니스엘의 대답을 들은 기가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니스엘의 친우라면 좀 더 용기를 내도 될 것 같아 깍듯한 예를 차리며 헨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헨리 님.”
“어, 그래. 넌 가가보다 더 똑똑한 것 같아서 좋다.”
“가가가…… 누구입니까?”
“있어, 그런 도마뱀이.”
쓸모를 다한 가가는 진즉에 두고 왔다.
지금쯤 헨리의 손아귀에 벗어났다며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사냥감을 찾고 있을 것이다.
가니스엘이 말했다.
“그럼 이제 곧장 그레텔을 만나러 가지.”
“그레텔은 어디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마계 서열 1위와 2위의 영역은 항상 붙어 있으니까.”
“자신 있지?”
“물론이다.”
전 마왕은 브릴린테였고, 그다음 마왕 후보는 가니스엘이었다.
그런데 헨리에 의해 날개가 뜯기는 바람에 다시 이 자리까지 오는 데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헨리의 도움이 조금 있긴 했지만 가니스엘 입장에선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그레텔의 영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헨리가 물었다.
“근데 그레텔은 뭐 하는 놈이냐?”
“그레텔은 리치다.”
“리치? 저번에 금역에서 봤던 아크리치 같은 놈?”
“그 이상의 경지다. 놈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 모든 마족들 위에 군림했다. 놈은 아크리치보다 더 높은 경지라고 알려진 네오리치다.”
‘네오리치?’
본적이 없으니 그 위엄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띄워 주는 걸 보니 분명 한가락 하는 녀석임은 분명한 듯했다.
일행은 곧 네오리치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네오리치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왜 그가 모든 마족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키야오오오!
마계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섬뜩한 울음소리.
네오리치의 영역에 들어선 순간 일행은 볼 수 있었다.
네오리치의 영역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본 드래곤’의 존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