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
단서 (4)
마신의 일그러진 미간은 더더욱 구겨졌다.
헨리의 무례함을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말이다.
휘오오오!
분노한 마신을 중심으로 마계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대화나 좀 나누자니까, 그게 그렇게 들어주기가 어려운 일이냐?”
-닥쳐라!
마신의 성난 외침 한 번에 주변 공기가 사정없이 일그러지며 둥근 풍압파를 내뱉었다.
헨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러나 휘날린 건 머리카락뿐이었다.
아무래도 보통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기는 좀 무리일 듯했다.
헨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사이 마신은, 가가의 육체를 빌려 마계로 완전히 현신한 다음, 명주실 같은 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헨리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여전히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마신이 헨리에게 말했다.
-네놈, 대체 나를 화내게 하는 이유가 뭐지?
“그게 무슨 소리야?”
-가증스럽구나! 가면을 벗고 그만 본색을 드러내라! 네놈은 분명 얼마 전에 너의 그 하잘것없는 욕심으로 내게서 차원의 힘을 받아 가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의 힘에 대해 묻다니! 정신 차려라! 네놈은 마법의 신이지, 탐욕에 찌든 인간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쩌렁쩌렁!
속사포 같은 분노의 외침에 헨리는 그제야 왜 마신이 화가 났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마신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힘에 취한 헨리가 이제는 다른 힘까지 탐내게 되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마신이 오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 헨리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일단은 진정하고 말로써 오해를 푸는 게 어떨까? 너야말로 이렇게 쉽게 흥분하는 모습이 네가 돌보는 마물들과 다를 게 뭐지?”
헨리를 탐욕에 찌든 인간과 비교했으니 헨리 또한 짐승 같은 마물과 비교하여 말했다.
헨리의 비유에 마신은 잠시간 헨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곧 천둥 같은 기세를 사그라뜨리며 부풀렸던 몸체를 조금 줄여 냈다.
그러자 휘몰아치던 바람도 더 이상 불지 않았고, 소용돌이치던 하늘도 다시금 잠잠해졌다.
일단은 화를 참아 낸 마신이 헨리에게 물었다.
-말해라. 하지만 날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같은 신이라고 해도 절대로 봐주지 않겠다.
“좋으실 대로.”
폭주하는 마신을 진정시켰으니 반쯤은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했다.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금방 티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마신은 준비된 티 테이블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내 곧 자리에 착석한 뒤 헨리를 노려보았다.
헨리가 말했다.
“홍차 괜찮아?”
-쓸데없는 소리.
“쯧, 교양 없긴.”
마신이 차를 마실지 안 마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 차를 내주었다.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신 헨리가 사족을 겸하여 투덜거렸다.
“나 참, 원래는 집주인이 손님한테 대접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마신은 헨리의 농담 섞인 투덜거림을 받아 주지 않았다.
도리어 매섭게 눈빛을 번뜩일 뿐.
마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고지식하단 걸 느낀 헨리는 다시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여유 있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세계에 문제가 생겼어. 엄밀히 따지면 야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신 때문에 생긴 문제라 내가 해결을 못하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어떤 빌어먹을 신 때문에 생긴 문제를 해결도 못하고 있으니, 만약 시간의 힘이 신의 영역이라면 다른 신의 도움으로 문제를 좀 해결하잔 거지.”
-욕심이 과하다.
“전부터 자꾸 욕심이 과하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욕심이 과하다는 거야?”
헨리는 숨김없이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신은 헨리의 말을 모두 들은 직후 여느 때와 같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좀 짜증이 났다.
혹시나 싶어 야누스의 이름을 들먹여 본 건데 고민하는 시늉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니 말이다.
헨리의 말을 들은 마신이 말했다.
-그건 네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신이 현세에 자주 개입하게 되면 그로 인한…….
“혼란을 야기해서 안 된다고?”
-잘 알고 있군.
헨리가 곧잘 대답하자 마신이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이번엔 헨리가 화를 냈다.
“그 말, 개소리란 건 잘 알고 있지? 그러는 넌 뭔데 자꾸 마왕 같은 걸 점지해서 내가 사는 세상을 침공하는데?”
-그건 내 뜻이 아니다. 난 마계의 유일한 신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마왕들의 행보는 오로지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신들이 잘못한 걸 신의 힘으로 바로잡자는 거 아냐. 너도 그런 이유로 나한테 차원의 힘을 부여해 준 거고. 아냐?”
-아니다!
쾅!
헨리의 넘겨짚기에 마신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내려친 테이블이 부러지진 않았다.
이럴 줄 알고 특별히 단단한 테이블을 소환한 거긴 하지만.
흥분한 마신이 말을 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분의 뜻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네게 힘을 빌려준 것이다.
“그분? 그분이 누군데?”
-알 필요 없다.
“‘알 필요 없다.’라…….”
마신씩이나 되는 자가 그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높은 양반인 모양이다.
‘가만, 마신보다 높은 양반?’
마신보다 높은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자 헨리는 자연스럽게 한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일전에 라가 언급한 적이 있던 신들의 왕이었다.
‘신들의 왕…….’
이름은 모른다.
라가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라 또한 그를 어려워하는 걸 보니 확실히 모든 신들의 왕이 맞는 듯했다.
그러던 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그럼 그분은 대체 무슨 뜻으로 나한테 너의 힘을 나눠 주라고 지시한 거냐?”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알려고 들지도 마라. 그분은 네놈 따위가 감히 생각을 가늠해선 안 될 분이시니까.
“신씩이나 돼서도 계급이 있다는 게 참 웃기긴 하다만, 아무튼 난 그분 덕분에 너한테 차원의 힘을 부여받은 것이니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네.”
-당연한 소리!
“그럼 이번에도 좀 물어봐 주면 안 되나? 솔직히 말해서 야누스가 벌려 놓은 일들 때문에 죽을 맛이거든.”
-허튼 소리! 건방 떨지 말고 정도를 지켜라!
“같은 신끼리 건방은 무슨……. 물론 당장은 내가 불완전한 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죽고 나면 동등한 입장이 되잖아?”
헨리는 마신이 엄포를 놓을 때마다 빙글거리며 엄포를 회피했다.
동시에 아쉬움도 느꼈다.
솔직히 말해 도와주는 김에 한 번 더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예?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신이 혼자서 갑작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지껄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언질이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마신의 미간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주먹을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왜 저래?’
왜 저러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이윽고 어느 정도 화가 진정이 됐는지 호흡을 고르던 마신이 헨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뭘?”
-그분의 뜻을 말이다! 대체 왜 네놈 따위가 뭐라고 이리도 후하게 배려해 주시는 건지……!
‘음?’
막연하게 저리 말하니 도통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정황만 놓고 보건대 분명히 헨리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헨리는 말을 아끼고 마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신의 표정은 딱 그 짝이었다.
자신은 극구 반대였지만 상부의 지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억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의 그것 말이다.
헨리는 그 고집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의 예상대로 결국 명령에 승복한 마신이 헨리에게 말했다.
-……알려 주마, 시간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오, 그게 정말이야?”
명령에 승복한 마신의, 억지로 입술을 달싹이는 표정이 심히 가관이었다.
헨리는 그 모습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지만 굳이 그 모습을 조롱하진 않았다.
마신이 말했다.
-신들은 각자가 맡은 관할 구역에 따라 특수한 힘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난 마계를 관장하는 유일한 신으로서 마계의 존립을 이유로 차원에 대한 힘을 그분께 부여받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이유로 시간의 힘을 부여받은 신이 있다.
“그게 누군데?”
-천계의 신이다.
“천계의 신이면…… 천신?”
-그렇다.
“천신이라……. 좋아. 그 천신이란 작자가 시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럼 네가 나랑 같이 천신한테 가서 시간의 힘을 얻어다 주는 건가?”
-허튼 소리! 내가 그분께 받은 명은 시간의 힘을 가진 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과 천계로 이동할 수 있는 ‘좌표’가 전부다.
“뭐야, 그럼 만약 천신이 나한테 시간의 힘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
-그건 네 사정이지, 내 알 바가 아니다.
“그게 무슨…….”
-욕심이 과하다! 이것만 해도 너는 네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루었지 않느냐!
그렇긴 했다.
단서라곤 조금도 없던 상황에서 시간의 힘을 가진 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아낸 것은 분명히 엄청난 진전이었으니까.
‘더 물어본다고 해도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헨리는 이쯤에서 체념키로 했다.
이 정도면 마신도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리가 남은 홍차를 마저 들이켠 후 홍차의 끝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끝 맛을 음미하면서 잠깐 동안 상념에 빠졌다.
장고 끝에 헨리가 말했다.
“좋아.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충분해. 근데 말이야……. 만약 천신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그땐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겠지?”
-네 마음대로 해라.
“그 정도면 됐어. 정보는 고맙다. 나중에 차원의 힘까지 해서 한꺼번에 사례하도록 할게.”
-네놈의 답례 따윈 필요 없다.
“그럼 됐고.”
대화가 종료된 직후, 마신은 잠시간 헨리를 노려보더니 이내 자욱한 탁기와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자리에는 꽤나 수척해진 가가만이 남아 있었다.
헨리가 쓰러진 가가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일어나라, 가가.”
헨리가 발끝에 마력을 실어 가가를 툭툭 건드리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가가가 괴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는 꼴이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한 표정이었다.
가가가 숨을 헐떡이며 헨리를 바라보았다.
가가와 눈을 마주친 헨리가 말했다.
“뭘 봐?”
-아, 아닙니다……! 단지 기억이 날아간 듯해서……!
“됐고. 너 혹시 가니스엘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가니스엘 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알고 있긴 한데…… 모, 모시겠습니다! 지금 당장!
“그래, 못 본 새에 눈치가 제법 늘었구나.”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가가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헨리는 가가와 함께 이동하는 동안 생각했다.
‘천계라…… 결국은 천계에도 가 보게 되는군.’
천계.
하마터면 반년 전쯤에, 그러니까 마계의 시간으로는 5년 전쯤, 천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뻔했다.
마계에서 맺은 가니스엘과의 인연 때문에 말이다.
하나 가니스엘은 스스로 복수를 이루겠다고 말하며 헨리의 호의를 거절했고,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천계와는 인연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천신이 시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어차피 가는 길이라면 가니스엘이라는 히든카드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헨리는 생각했다.
‘쩝, 모쪼록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헨리는 부디, 천신이 융통성을 가진 존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