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
새로운 시작 (2)
헨리의 마법에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놀라기도 잠시, 입이 떡 벌어졌던 마실라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헨리에게 물었다.
“저, 대마법사님? 기적 같은 힘을 앞에 두고 이런 말씀드리기가 외람되오나 이런 식이라면 굳이 저희가 농사에 투입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물 한 방울, 흙 한 줌 없이 작물의 고속 재배에 성공했으면서 대체 왜 많은 인력을 투입해 굳이 농사를 지으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수확한 옥수수를 마실라에게 내밀며 말했다.
“한번 드셔 보세요.”
가벼운 권유.
마실라는 갓 수확한 옥수수를 받아들어 알맹이 몇 개를 앞니로 뜯어내 씹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졌다.
“맛이……?”
“그렇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마력으로 길러 낸 작물은 성장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도 담고 있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사실상 쓸모없는 마법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마법은 실패작이 아닙니다. 탑에서는 맛과 영양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연구했고 그 결과 토양에서 최소한의 성장만 거친다면 얼마든지 고속 재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농사를……!”
“그렇습니다.”
작물로부터 맛과 영양소를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작물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싱싱한 쓰레기일 뿐이었다.
헨리는 최소한의 농사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마친 후 모두에게 말했다.
“현자나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들은 현재 맹신자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 연구를 위한 소수의 마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마법사들 모두를 작물 생산에 투입시킬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다름이 아닌 모두가 입에 풀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까요.”
“좋은 생각이군. 마법사들만 있다면 식량 문제 따윈 금방 해결할 수 있겠어.”
“난 보리 위주로 심어야겠어. 보리가 많아야 술을 담글 수 있을 테니까.”
이로써 식량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모두들 들뜬 목소리를 하고서 각자 재배할 작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화에 끼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불카누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괜찮은 계획이로군. 그런데 헨리, 자네의 계획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네.”
“문제요?”
“뭐, 어찌 보면 자네에겐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네만……. 우선 무슈는 생각보다 땅덩어리가 작아. 그래서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지던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특수 작물인 경우가 허다하지. 예를 들어 담뱃잎 같은 것들 말일세.”
“특수 작물들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도 경작지가 부족합니까?”
“적어도 내 생각엔 그럴 것 같군. 아무리 땅을 효율적으로 놀린다고 해도 좁은 땅덩이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경작 효율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음,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에 헨리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노동력과 생산력을 확보했는데 정작 경작지가 부족해 농사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맥도웰이 말했다.
“뭐야, 그럼 결국 또다시 칼을 들 수밖에 없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이 그렇잖아. 경작지가 부족하면 땅덩이를 넓히면 될 일. 우리 같은 칼잡이들이 놀면 뭐 하겠어? 바깥에 나가 맹신자들이라도 내쫓아야지.”
맥도웰은 지극히 정석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땅이 부족하면 땅을 넓히면 된다.
하지만 부족한 경작지를 넓히기 위해선 바깥에 나돌아 다니는 맹신자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맹신자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경작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맹신자들은 끊임없이 몰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또 살생을 해야만 했으니까.
딜레마였다.
그렇게 되면 최대한 맹신자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다짐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비튼 입술을 곱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말인즉슨 맹신자들이 없는 노는 땅이 필요하단 얘긴데…….’
대륙 전역에 걸쳐 맹신자들이 분포되어 있다 보니 맹신자들이 없는 빈 땅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빈 땅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샤하트라나 세인트 홀처럼 맹신자들이 침범하지 못한 곳도 있다.
하지만 사막은 농사짓기에 부적합하고, 세인트 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시로 경작지라곤 한 평도 없었다.
그렇다고 경작을 위해 도시를 부수자니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꼴이었다.
헨리가 고뇌하고 있는 사이, 여러 의견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셀란이 나직한 목소리로 헨리에게 말했다.
“헨리, 그러니까 지금 농사를 지을 만한 빈 땅이 필요하단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마물의 숲은 어때?”
“……예?”
“듣고 보니 그렇잖나. 맹신자들이 없는 데다가 거대한 밭을 일구기에 적합한 노는 땅, 지금 그런 곳이 마물의 숲 말고 더 있어?”
“그건 그렇지만…….”
이셀란의 말을 들은 헨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마물의 숲은 독기가 가득해 경작에는 알맞지 않다.
헨리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던 중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네. 그런 방법이 있었네.”
“네?”
“성녀님, 저랑 잠시 어딜 좀 다녀오시겠습니까?”
“지금요?”
“잠깐이면 됩니다.”
헨리는 모두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후 성녀의 손을 붙잡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헨리가 웃으며 말했다.
“결정됐습니다.”
“뭐가?”
“무슈의 새로운 경작지는 마물의 숲으로 정해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녀님의 정화 능력이 마물의 숲에서 아주 큰 활약을 해주실 것 같네요.”
헨리의 설명에 다른 사람들이 그제야 감탄사를 내뱉었다.
일차적인 관점에 갇혀 잠시 성녀의 능력을 잊고 있었다.
평화교의 사제들이 가진 능력 중에는 ‘정화’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헨리는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성녀를 데리고 테스트에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
잠깐 확인하는 용도로 5급 구역의 토양을 대상으로 정화 능력을 시험해 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발군의 효과를 발휘했다.
‘5급 구역이 통했다면 그 이하 구역들은 안 봐도 뻔하다. 게다가 설사 4급 구역부터 정화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정도면 경작지로는 충분해. 9급 구역부터 5급 구역까지만 쳐도 무슈의 몇 배쯤은 되니까. 사제들만 좀 고생해 준다면 경작지 문제는 가볍게 해결할 수 있겠어.’
헨리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준 이셀란의 기지를 칭찬했다.
이에 이셀란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고마우면 요새로 돌아갈 때 솜씨 좋은 요리사나 좀 더 데리고 가자고.”
병사들을 챙기는 사령관다운 대꾸였다.
이에 헨리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럼 마침 회의도 대강 정리되었으니 곧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우선 신국의 건국 선포는 좀 미뤄 두는 걸로 하고 우선은 식량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녀님, 제가 설탑에 다녀올 동안 여기 계신 사령관님과 함께 먼저 칼리번 요새로 출발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군사 조직 개편이나 건국 선포 등 세부적인 일정들은 식량 문제를 먼저 해결한 후에 진행키로 했다.
헨리는 설탑으로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모두에게 계획들을 정리해 주며 각자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계획이 뚜렷해졌으니 헨리는 즉각 설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설탑 내부에 마련된 거대한 연구실.
연구실 내부에는 피 냄새로 가득했다.
피 냄새는 인간의 것이었다.
웅덩이진 핏물 위로 무미건조한 표정을 가진 사람들이 보였다.
부학파장과 학파장급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실험대 중심에서 고정되어 꿈틀거리는 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흐아아아…….
청년이었다.
그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뱉는 신음 속에는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속이 텅 빈 봉제 인형을 연상케 하는 다소 소름이 돋는 신음이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실험대에 전신이 고정되어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키아아아…….
이젠 기력조차 없는지 내뱉는 신음조차 무기력했다.
청년의 눈동자에는 로어의 얼굴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로어가 말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로어가 무거운 음색으로 시작을 알렸다.
이윽고 로어를 중심으로 청년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이 광명을 내뿜으며 번뜩였다.
나선형으로 그려진 마법진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빛을 더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진의 중심에 빛이 가득 메워졌을 무렵,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던 청년이 격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키아아아! 캬오오오! 캬악!
청년은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마치 화형에 당하는 마물처럼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한낱 인간이 마법사들의 포박 마법을 이겨 낼 순 없었다.
발버둥 치는 격렬함의 세기가 더더욱 거세졌다.
발버둥이 거세질수록 청년의 전신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노끈에 오래 묶인 팔뚝처럼 점점 파랗게 말이다.
그리고 그 색의 전이가 얼굴까지 미쳤을 무렵.
-키아아아아!
고통에 찬 비명이 유리창을 긁어내듯 섬뜩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퍼엉!
청년의 머리통이 폭발하고 말았다.
“…….”
청년은 그렇게 죽었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청년의 섬뜩한 잔해들이 연구실 이곳저곳에 튀었다.
터져서 사라진 목 위로부터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뿜어진 핏물은 청년의 몸을 타고 흘러 연구실 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아니, 이미 다른 이들의 피로 고여진 웅덩이 위에 한 줌의 핏물을 더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연구실 내부의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 로어가 말했다.
“맹신자의 정신 복구 실험, 마흔여덟 번째 실험, 실패.”
로어는 담담하게 실험의 실패를 알렸다.
벌써 쉰 명에 가까운 맹신자들로 실험을 했다.
처음엔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이나마 불쌍함을 느꼈지만 이젠 실험용 모르모트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로어가 실험 결과를 읊어 내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학파장 한 명이 실험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를 받아 적는 부학파장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로어가 말했다.
“마흔아홉 번째 실험을 진행하기 전에 실험실 청소나 한번 하고 시작하지.”
“예, 알겠습니다.”
로어의 제안에, 학파장 중 한 명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방에 튀긴 핏방울을 비롯해 바닥 가득히 고인 핏물들이 순식간에 한 군데로 모여 각진 큐브 모양으로 굳어졌다.
학파장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겨 굳힌 혈액 큐브를 연구실 한쪽에 던져두었다.
연구실 한쪽에는 그렇게 던져진 큐브 더미가 가득했다.
시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터져 몸뚱이만 남게 된 육체는 아쉽지만 소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어는 시체를 소각하기 전에 짧은 목례를 해 보인 다음 폐지를 태우듯이 가볍게 전소시켰다.
화르륵!
시신에 불이 붙으며 고기 굽는 냄새가 잠깐 동안 피어올랐다.
로어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곧바로 냄새를 와해시켰다.
‘얼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학 전공의 두 마법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자마자 곧바로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이 시작되고 나니 실험체로 포획된 맹신자 마흔여덟 명의 죽음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설탑 지하에는 쉰 명에 가까운 맹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지하 감옥이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백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어는 반복된 실험으로 점점 더 감정이 무뎌져 감을 느꼈다.
위험한 징조였다.
로어는 그런 낌새를 느낄 때마다 억지로라도 슬픈 감정을 끌어 올렸다.
‘이것도 참 못할 짓이군.’
감정이 무뎌져 간다는 것.
꽤나 고역이었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없는 지금, 자신이 다른 마법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로어는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청소가 이루어진 직후, 스탠이 말했다.
“다음 실험체 데리고 와.”
“예.”
명령을 받은 부학파장이 지하 감옥에서 맹신자 하나를 마법으로 끄집어 올렸다.
그런데 연구실에 끄집어져 올라온 맹신자를 확인한 순간,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키아아아…….
전 실험체와 똑같이 신음을 내뱉는 실험체.
그러나 그 실험체는 다름 아닌 일곱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우웨에엑!”
초점 없는 동공과 더불어 침을 질질 흘리는 맹신자를 보며 누군가 구역질을 했다.
아이의 모습이 역겨워서가 아니었다.
이 아이에게 곧 닥칠 불행한 미래를 차마 보통의 비위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구실 바닥에 토악질을 한 건 다름 아닌 생물학의 인간학 부학파장 휴마니아였다.
그녀가 구토와 함께 눈물을 흘리자 로어가 나직이 말했다.
“……데리고 나가서 다독여 줘.”
“예.”
다른 이의 부축으로 그녀는 곧 연구실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연구실을 벗어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로부터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지직!
그녀는 다시 한번 속을 게워 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