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새로운 마왕 (4)
“그럼 슬슬 출발하지.”
헨리가 가니스엘에게 이동을 제안했다.
그러나 가니스엘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난 천계에 가지 않겠다.”
가니스엘의 갑작스러운 거절.
거절에 헨리는 그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호의는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너라는 인간관 인연을 맺게 된 것에 대해서도 몹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하지만 역시 복수는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든다.”
헨리는 가니스엘의 대답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가니스엘.
생각보다 똑똑한 놈이다.
지금 당장 헨리를 이용하지 않아도 언젠간 천계를 엎을 수 있는 원군을 얻었으니 당장의 실리를 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복수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가니스엘의 의중을 파악한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괜찮겠어? 난 일이 있어서 이제 슬슬 내가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 봐야 해서 말이야.”
“괜찮다. 대신 날개만 좀 치료해 줬으면 한다. 비록 날개를 치유하는 동안엔 서열 싸움에서 밀려나겠지만 날개만 회복된다면 언제든지 왕좌에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생각이야.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날개를 치료해 주도록 하지.”
가니스엘의 의지를 확인한 헨리는 가니스엘의 부탁대로 날개를 치료해 주기로 했다.
헨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서클을 회전시켰다.
원래대로라면 즉각적으로 치유 마법을 펼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서클을 회전시켰다.
9서클을 이뤄 낸 직후 처음 사용하는 마법이었으니까.
아홉 번째 고리가 나머지 여덟 개 고리와 맞물려 기분 좋은 회전 음을 만들어 냈다.
오직 헨리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이었다.
그런 소소한 쾌락을 즐기며 헨리가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봉합, 재생, 회복.”
9서클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자 언령에 대한 비효율성이 대폭 줄어들었다.
새롭게 생겨난 아홉 번째 고리가 많은 부분에서 효율성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언령이 즉각 발현되자 헨리의 손에 들려 있던 여섯 짝의 날개가 자석처럼 가니스엘의 환부에 붙었다.
그리고 회복을 시작했다.
헨리는 가니스엘의 회복에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이젠 마력을 아낄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성심성의껏 마력을 퍼부어 주었다.
헨리는 가니스엘의 날개를 치료하는 동안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사제들의 회복 능력은 신의 힘을 빌려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신력이다. 근데 나는 신이 돼서 마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으니 그럼 이제 나도 사제인 셈인가?’
가니스엘을 치료하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쿡쿡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아냐, 갑자기 좀 웃긴 게 생각났거든.”
“그렇군. 날개가 완전히 붙은 것 같으니 치료는 이 정도면 됐다.”
“그래? 회복이 빠르네.”
“상처는 치료됐지만 소실된 힘은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그 또한 금방 회복할 테니.”
“그럼. 차기 마왕인데 그 정도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지. 근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없는 동안 정말로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다. 처음 마계로 추방당했을 때부터 난 쭉 혼자였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은 내게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아,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 내 이름은 헨리야. 풀네임은 헨리 모리스. 유라시아 대륙 출신의 마법사지.”
“헨리 모리스.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정식으로 다시 한번 소개하겠다. 내 이름은 가니스엘. 천계의 전 대천사장이었다.”
“그래 가니스엘, 네가 무슨 이유로 천계에서 추방당했는지는 묻지 않을게. 너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아 참, 이럴 게 아니라 잠시만.”
통성명을 마친 헨리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지인들에게 흔히 나누어 주었던 호출지였다.
헨리는 꺼내 든 호출지에 새로운 마법 몇 가지를 부여했다.
그런 다음 가니스엘에게 호출지를 내밀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있어. 이걸 찢으면 언제든지 날 소환할 수 있거든.”
“고맙다.”
“좋아, 그럼 전달해 줄 건 대부분 전달해 줬네. 그럼 이제 정말 가 볼게. 나중에 내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나면 그때 다시 놀러올 테니 그때까진 마왕 자릴 꿰찼길 바란다.”
“알겠다, 헨리.”
헨리는 가니스엘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주입받은 지식대로 허공에 차원의 틈을 열어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마물의 숲 끝자락에 어느 허공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허공 속에서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다.
헨리였다.
‘윽, 토할 것 같아.’
헨리는 마계에서 인간계로 돌아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복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낯선 지식이라 그런지 차원의 힘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멀미가 났다.
이른바 차원 멀미.
인간들 중에서 차원 이동으로 인해 멀미를 앓은 건 헨리가 최초였다.
헨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멀미를 가라앉혔다.
그런 다음 그리웠던 인간계의 공기를 있는 힘껏 폐부로 들이마셨다.
“으음, 이 탁한 냄새.”
이왕이면 진짜 맑은 공기가 있는 산맥 같은 곳으로 좌표를 잡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마물의 숲 끝자락인 1급 구역.
멀쩡한 생명체도 중독되어 버리는 죽음의 땅이었다.
물론 헨리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므로 헨리는 멀미를 가라앉힌 직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헨리는 자신이 도착한 위치를 대강 파악했다.
그래서 곧바로 걸음을 옮겨 마계의 틈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크레이터, 검은 양수로 가득 찼던 그곳에는 이제 마계의 틈만 외로이 남겨져 있었다.
애석하게도 마계의 틈은 그대로였다.
헨리의 마법이 실패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땐 차원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터라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어찌해 보려 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이젠 차원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헨리는 자신이 개발한 마법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새삼 부끄럽네.’
못을 박아야 하는데 망치가 아닌 톱을 가져온 격이었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
하지만 이젠 용도에 맞게 질 좋은 망치를 구비해 왔다.
그래서 헨리는 곧장 못질할 준비를 했다.
딱!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몇백 년 동안 벌어져 있던 마계의 틈이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주문이나 마력은 필요 없었다.
차원의 힘은 마법이나 신력이 아닌 마신에게 부여받은 미지의 힘이었으니까.
“이렇게 쉬운 것을…….”
애초에 마신이 손짓 한번 해 줬으면 사라질 틈이었다.
그런데도 몇백 년 동안이나 틈을 방치해 두었으니 새삼 화가 났다.
하지만 마계의 틈은 마신이 만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마신에게 따질 순 없었다.
애초에 인간계는 마신의 관할이 아니었으니까.
헨리는 마계의 틈이 있던 자리를 보며 시원섭섭함을 느꼈다.
그 빌어먹을 구멍 하나 때문에 대체 몇 사람이 죽었는지 회한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다 끝났다.
죽음의 땅이라고 불렸던 마물의 숲의 악명도 이제 끝이다.
숲은 이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산천초목으로 뒤덮일 것이고 푸른 생태계를 되찾을 것이다.
헨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계에서 며칠을 보냈으나 마계의 시간과 인간계의 시간 축이 다르다고 하니 이곳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약속은 어겼겠군.’
해가 뜨기 전에 요새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마계에서 며칠을 보냈으니 당연히 약속은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헨리는 돌아가는 대로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지 고민하며 천천히 요새로 걸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고 걸어가는 이유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숲의 마지막을 느긋하게 봐 두기 위해서였다.
헨리는 이젠 황무지로 변해 버린 마물의 숲을 보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 도시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땅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역시 살아있는 자의 생기일 테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요새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헨리는 가볍게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런 다음 정문의 성벽 위에 안착했다.
그런데.
“음?”
성벽 위에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모두 골아떨어져 있었다.
‘피곤했나?’
어차피 더 이상 마물이 나타날 리도 없으니 헨리는 그들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대를 보니 새벽.
이젠 더 이상 힘들게 밤을 새며 야간 경계를 설 필요가 없었으니까.
성문에서 내려온 헨리는 이번에도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요새 내부를 거닐었다.
이유는 전과 같았다.
마계의 틈이 사라졌으니 이제 요새 또한 철거될 테니까.
그래서 요새의 마지막을 두 눈에 담아 두기 위해 모두가 잠든 새벽에 천천히 구석구석 살피기로 했다.
헨리의 산보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1년이나 근무를 했으니 정든 곳이 많았다.
산보 끝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이셀란의 숙소.
숙소가 조용한 걸 보니 이셀란도 잠에 든 모양이었다.
‘쉴 만큼 쉬었겠지.’
며칠이나 자릴 비웠으니 아마 그동안 못 잔 잠들을 몰아서 잤을 것이다.
그래서 헨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셀란만큼은 깨우기로 했다.
날이 밝은 다음에 헨리의 복귀 사실을 알리면 요새가 발칵 뒤집어질 테니 미리 이셀란에게만 귀띔하기 위해서였다.
헨리는 조용히 이셀란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잠든 이셀란을 본 순간, 헨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면 마법?’
이셀란에게 작동 중인 한 가지 마법.
그것은 헨리가 이셀란에게 걸었던 수면 마법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마법사가 자신이 건 마법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으니까.
여전히 작동 중에 있는 수면 마법을 본 헨리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 다음 다급히 이셀란의 침소를 벗어나 요새의 다른 이들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벽에 기대 잠든 병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벽 위에서 본 병사는 대충 흘겨보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발견한 병사에겐 뚜렷하게 느껴졌다.
헨리가 마물의 숲으로 출정하기 전에 걸어 두었던 수면 마법의 잔재를 말이다.
“하?”
요새 어디를 가도 똑같았다.
헨리가 숲으로 떠나기 전에 모두에게 선물했던 긴 단잠.
그 긴 단잠을 위해 사용했던 광역 단위의 수면 마법.
그 수면 마법이 아직까지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째서? 슬립은 열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손을 써 두었는데? 그렇다면 설마?’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인간계와 시간 축이 다른 마계.
어쩌면 시간 축이 다르다는 뜻은 마계의 시간에 비해 인간계 시간의 흐름이 훨씬 더 느리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였나?’
몇십 년마다 나타나는 마왕.
그리고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마물들.
헨리는 그제야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아무리 죽여 무찔러도 마물들의 씨가 마르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이가 없네…….’
헨리가 허탈함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마물의 숲에 숨겨진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될 때마다 참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헨리는 이셀란이 잠에서 깨기 전에 걱정하는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헨리는, 그 빌어먹을 마계의 시간 축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약속을 지킬 수가 있었다.
헨리는 잠자코 동이 트는 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이셀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기분 좋은 새벽이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