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
지옥의 구원자 (1)
사건의 발단은 후문을 지키던, 공포에 질린 어느 병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병사는 몇 년째 후문을 지키는 요새의 경비병으로 근무해 왔다.
그에게 보직에 대한 불만은 딱히 없었다.
하루 종일 성벽 위에서 똑같은 풍경을 봐야 한다는 것 이외엔 다른 병사들처럼 목숨을 걸고 마물들과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요새의 다른 병사들보단 수당이 적어도 요새 밖의 병사들보다는 많은 돈을 벌기에, 기쁘게 자신의 책무를 성실히 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그 평화가 깨져 버렸다.
병사는 숲의 마물들이 폭주한다는 소식을 다른 부대원들을 통해서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이따금씩 벌어지는 연례행사 같은 일이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어느 날부터 모습을 드러낸 정체를 알 수 없는 좀비 떼에 있었다.
처음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곳은 요새의 후문이었고, 마물의 숲과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한두 명으로 시작된 좀비들은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수천에 이르는 대군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좀비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다는 것 정도.
다시 말해 좀비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도구를 사용하여 공성전을 펼치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성벽을 두드릴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병사는 처음엔 좀비들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비병 업무 특성상, 병사는 하루 종일 성벽 위에서 성벽 바깥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좋든 싫든 항상 좀비 떼를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병사의 정신을 좀먹기 시작한 최초의 공포였다.
-쿠어어어…….
-크어어어…….
멕아리 없이 반복되는 좀비들의 울음 속에서, 병사의 정신은 점점 더 썩어 문드러져 갔다.
그러나 병사는 자신의 정신이 부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의 그 누구를 둘러봐도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한 사람들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병사는 자신의 정신이 공포에 침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고목이라 할지라도 기생충이 마음만 먹는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반드시 고목을 함락시키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병사는 고목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고목들로 빼곡히 들어찬 숲속의 고목.
하지만 제아무리 숲속의 고목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은 고목은 아니었다.
병사의 심력은 유난히 나약했다.
그래서 그에게 침식된 공포가 마침내 극에 달했을 때, 병사는 마침내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살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한시가 멀다 하고 귓전을 긁어 대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아무리 지긋지긋해도, 직접 자신의 목에 창칼을 들이대고 성벽 아래로 몸을 투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그렇기에 병사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성문의 개방.
성문이 개방됨으로써 좀비들이 요새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자신이 굳이 용기를 내지 않아도 반드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더불어 혼자서 죽는 게 아니니 외로움도 덜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성문의 개방은, 병사가 혼자 스스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용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병사는 모두가 잠든 새벽, 그믐달이 가장 높게 떠올랐을 때, 성문을 여는 레버를 당겼다.
의심은 받지 않았다.
때마침 자신의 근무지가 성문의 조종실과 가까웠다.
그리고 병사는 이 성벽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온 병사들 중 하나였으니까.
“크흐흑, 미안하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드르르륵!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조종실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적은 힘으로도 힘차게 도르래가 돌아가며 거대한 성문이 개방되었다.
성문이 개방된 직후, 병사는 조종실의 문을 안쪽에서 잠갔다.
병사들이 좀비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침입해야 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이 조종실로 몰려왔지만, 애석하게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개방된 성문을 닫기 위해 달려온 수많은 그의 동료들은 조종실의 입구에서 좀비 떼에게 물려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키아아아아!
개방된 성문, 그것은 흡사 지옥의 입구가 열린 듯이 비쳐졌다.
닿지 않는 곳임을 알기에 고작해야 성벽을 두드리는 것에 그쳤던 맹신자들은, 어느 겁 많고 이기적인 병사 한 명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멍청한 맹신자에서 모두에게 지옥을 안겨 줄 악마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옥으로 변해 버린 광경 속에서 뒤늦게 도착한 이셀란이 비탄했다.
상황은 끔찍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이셀란은 시선을 옮겨 개방된 1성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내부자가 열지 않는 한 절대로 열리지 않는 곳이 바로 1성문이다.
그런데 그 1성문이 지금 보란 듯이 열려 있다.
이셀란의 시선은 곧이어 1성문을 여닫는 조종실로 옮겨졌다.
굳게 잠긴 문.
그리고 그 앞에 쓰러져 있는 몇 명의 병사들.
아마도 뒤늦게 성문을 닫으려 했겠지만 안에서 문이 잠긴 터라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좀비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리라.
간단한 추리였다.
그리고 추리 끝에 얻은 것은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분노였다.
“어떤 놈이 감히……!”
으득!
이셀란은 부서질 듯이 이를 갈았다.
분노는 피로를 잊게 했다.
또한 다시 한번 검을 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이셀란은 시선을 옮겨 두 번째 성문인 2성문을 바라보았다.
요새의 후문은 총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가장 튼튼한 1성문과 진짜 요새로 입장하기 전에 임시 대기소로 설치된 2성문이 있었다.
지옥도는 1성문과 2성문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옥도를 견뎌 내기엔 2성문의 내구도가 너무 나약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셀란이 요새의 사령관으로서 해야 할 일은 저 빌어먹을 좀비 떼를 헤집고 들어가 1성문을 닫는 것이었다.
이셀란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피로조차 잊게 만든 서슬 퍼런 분노를 오러로 승화시켜 냈다.
“사령관님……!”
이셀란이 검을 뽑아 들자 장교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셀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셀란은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문을 닫고 올 테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2성문을 지켜라.”
명령을 끝으로 이셀란은 지옥도가 펼쳐진 1성문과 2성문 사이로 뛰어내렸다.
-키아아아!
서걱!
칼끝이 선을 그릴 때마다 몇 개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잘린 몸통에서 피가 뿜어지기도 전에 다음 목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아수라(阿修羅).
그 모습은 흡사 전장의 귀신, 아수라 그 자체였다.
이셀란은 눈빛에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신속하게 휘두르고 정확하게 베었다.
칼끝에 스치는 것들은 모두 좀비들의 살점이었고 떨어져 나가는 것들도 좀비들의 머리통이었다.
이셀란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또한 자비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쉽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난전도 없었다.
1성문과 2성문 사이에는 일방적인 학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던 병사들은 어느 순간부터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경외의 표정으로 성벽 아래의 아수라를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났다.
문과 문 사이에는 침묵이 도래했고 그 사이엔 피로 범벅된 귀신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비켜라.”
“예, 옛!”
더 이상 벨 것이 사라지자, 귀신은 조종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래서 대각선으로 문을 벴다.
우드득!
잘린 문의 윗부분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문은 비스듬하게 잘린 아래쪽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문 너머에는, 레버 옆에서 웅크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사태의 원흉이 있었다.
우드득!
이셀란은 남은 문짝 전부를 악력으로 뜯어냈다.
고작해야 문짝이었을 뿐임에도 이셀란의 손끝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원흉은 더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문을 개방시켰으니 모두가 죽을 테고 모두를 죽인 좀비들이 문짝을 뚫고 들어와 자신까지 죽여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셀란이 등장함으로써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의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저지른 이기심에 대한 책임.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엄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면서, 병사는 앞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될지도 모를 것들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이셀란은 그런 병사 앞에 섰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병사는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분명히 겁을 집어먹은 것이겠지.
하지만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들라고 말했다.”
두려움에 여전히 고개 숙인 병사에게, 이셀란은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했다.
병사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덜덜덜덜…….
병사의 얼굴에는 병사의 복잡한 심경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병사의 표정을 본 이셀란은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병사의 눈동자 속에 고여 있는 감정들을 읽어 들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끝에 이셀란이 말했다.
“일어서라, 뉴크.”
“……!”
병사의 이름은 뉴크였다.
뉴크는 이셀란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말단 병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이었을까?
뉴크의 떨림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뉴크는 벽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다.
이셀란이 말했다.
“뉴크,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분명히 두려웠겠지. 하나 너는 살아남았고, 네 동료들은 조종실 밖에서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넌 바깥의 네 전우들에게 사죄해야만 한다.”
“……아, 알겠습니다.”
이셀란은 처음에 가졌던 뜨거운 분노 대신 온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다독였다.
그 덕분인지 뉴크 또한 저항하지 않았다.
이윽고 이셀란이 먼저 조종실을 벗어났다.
그의 뒤를 뉴크가 따라나섰다.
그러나 조종실을 벗어나기 직전, 뉴크는 조종실 문 앞에 드리운 달빛을 밟기가 몹시 두려웠다.
뒤따르는 기척이 없자, 이셀란이 다시금 뉴크를 불렀다.
“용기를 내라, 뉴크.”
이셀란은 다시 한번 뉴크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런 뉴크를 다독이는 것은, 수많은 맹신자들을 베어 넘긴 전장의 투귀 같은 이셀란이었다.
요새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자신을 다독인다.
그것은 또다시 큰 위로가 되었다.
투귀의 격려에, 뉴크는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용기를 어떻게든 쥐어짜 내 조종실 밖으로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에게로 시선이 쏟아졌다.
쏟아지던 시선은 곧,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집중된 시선들은 맹신자들에게 쏘아 보내던 화살보다 더 날카로운 것들이 되어 뉴크에게 박혀 들었다.
뉴크 혼자선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셀란은 그런 뉴크에게 말없이 등을 보여 줌으로써 다시 한번 무언의 위로를 전했다.
두 사람은 곧 2성문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화살을 쏘던 병사도, 그들을 아우르던 장교도, 문과 문 사이에서 살아남은 병사들도 모두가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셀란은 뉴크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성벽의 끝자락에 세웠다.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뉴크에게 말없이 턱짓했다.
사죄해라. 너의 이기심이 불러온 참사에 대해.
뉴크는 이셀란의 턱짓에 떠밀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많은 원망의 눈초리가 커다란 해일이 되어 자신을 덮쳤다.
두려웠다.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그저 악몽과도 같은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고 싶었을 뿐인데 대체 왜 나에게 죄를 물으려는 거지?
사라졌던 두려움이 이기심과 뒤엉켜 새로운 논리들을 만들어 냈다.
뉴크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시선들이 뉴크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성벽에 서 있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억겁의 시간 속에서 뉴크는 최종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뉴크가 두 눈을 차분히 감으며 중얼거렸다.
“……난 못해.”
말을 마친 뉴크는 성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이셀란이 소리쳤다.
“안 돼!”
자살.
죽음을 결정하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운 좋게 살아난 세상은 전보다 더한 악몽이 되어 찾아왔다.
극과 극은 통했던 것일까?
모순적이게도, 그 덕분에 뉴크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몸을 내던졌다.
이 지독한 고통의 연쇄를 끊어 줄 편안한 나락으로.
중력이 뉴크의 육체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떨어지는 뉴크를 보며 좌중은 침묵했다.
누군간 짧게 숨을 삼켰지만 그마저도 곧 침묵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벽 아래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 왔다.
“…….”
뉴크를 붙잡기 위해 이셀란은 성벽 난간 끝으로 단숨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뉴크를 붙잡지 못했다.
성벽 아래에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뉴크의 참혹한 잔해들이 맹신자들의 시체와 뒤엉켜 있었다.
“왜…… 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뉴크가 비록 이 사달의 원흉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셀란은 뉴크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건 뉴크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간 악몽 같은 현실 때문이었으니까.
이셀란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부서질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강하고 유능했더라면……!”
이셀란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고지식하게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셀란은 뉴크의 죽음을 막아 내지 못한 게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셀란이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검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그는, 이미 검의 정점을 이룬 최상급 소드 마스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마법 같은 기적의 힘만 있었더라면 이러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검생(劍生)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부하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낳은 어리석은 자책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낯선 목소리가 이셀란의 슬픔을 위로한 것은.
아니, 낯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에 이셀란은 충혈된 두 눈의 동공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
돌아본 그곳에는 다름 아닌 헨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