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아포칼립스 (3)
맹신자들이나 사도에 의해서 감정을 절개당하지 않은 인류.
그런 인류는 이제 고작해야 3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무슈, 샤하트라, 세인트 홀, 두스카인.
그리고 삼대사선이라 불리는 곳들 정도.
이외의 크고 작은 도시들은 대부분 맹신자들에 의해 점거되었거나 사도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대륙 역사상 유래 없는 아포칼립스가 벌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재앙이 이루어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
그러나 아서스는 이제 남은 3할의 인류마저 고작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불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해하려고 했다.
두두두두…….
대지가 울렸다.
떼를 지어 이동하는 어느 대륙의 물소 떼가 만드는 소리처럼, 그러한 종류의 울림이 일었다.
그러나 그러한 울림을 만드는 존재들은 결코 물소 떼 따위가 아니었다.
검은 파도.
지평선을 기점으로 휘몰아치는 검은 파도 속에는 기괴한 소리를 내뱉는 맹신자들이 있었다.
“온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존재들.
맥도웰이 그것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사전에 비슷한 작전을 세워 뒀고 헨리의 빠른 판단 덕택에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고 해서 모든 상황들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무슈, 샤하트라, 세인트 홀, 그리고 두스카인.
남은 네 개의 도시들 중 두스카인은 진즉에 방어를 포기하고 무슈로 합류시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은 지형적인 불리함을 포함해 두스카인 왕국 자체가 가진 군사의 수가 적어 수억에 달하는 맹신자들과는 애초부터 게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샤하트라.
샤하트라의 경우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다.
수도 칸에 임시 왕궁을 다시 세우며 샤하트라 산맥에 둘러져 있던 결계를 다시 활성화시켜 낸 덕분에 맹신자들이 산맥을 타고 넘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하트라의 대문으로 불리는 협곡은 여전히 무방비하게 뚫려 있었기에 그곳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말로 이동해도 며칠이나 걸릴 거리를 도보로 이동하는 맹신자들이 그 흔한 물주머니 하나 없이 사막을 횡단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막에는 사막만의 마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샤하트라는 모든 지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자연의 수호를 받는 천혜의 요새인 셈이었다.
이제 남은 곳들은 신성국 세인트 홀과 무슈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자들은 두스카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성국의 주민들 또한 모두 무슈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유는 두스카인과 같았다.
교황을 비롯한 최고 성전사들이 둘이나 죽었고 성녀까지 자리를 비운 마당에, 세인트 홀이 맹신자들을 상대로 농성을 펼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들은 신성국의 주민들을 무슈로 이동시켜야만 했다.
물론 남은 성전사나 사제들 또한 한 명도 빠짐없이 무슈로 이동시켰다.
최고 지휘관들만 사라졌을 뿐이지, 그들은 여전히 훌륭하기 그지없는 양질의 전력이었으니까.
“모두 준비해.”
검은 파도 정도로 여겨졌던 맹신자 무리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전투의 준비는 끝났다.
제아무리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은 잡탕식 군대라곤 하지만 책사 마실라를 비롯해 무슈로 다시 돌아온 기사들은 모두들 한때 제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최고 지휘권자들이었으니까.
-키에에에에!
-크아아아아!
무슈의 장인들도 오늘부터는 더 이상 무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아닌 인류의 수호를 위해 맞서 싸우는 전사들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싸움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단순히 무기를 쥐었다고 해서 모두가 하루아침에 용맹한 전사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싸움에 익숙지 않은 장인들은 몰려오는 맹신자들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또한 무슈로 이동해 온 세인트 홀의 사제들은 몰려오는 맹신자들을 보며 저마다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들이 들은 바로는 저들 모두 한때는 자신들과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같은 여신을 믿던 평화교의 신도들이었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녀가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로 수호 결계만 펼칠 생각은 없다.
무슈의 사제들은 리자르크 언덕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모든 사정들을 전해 들었다.
그럼에도 융통성 없이 교단의 교리만을 내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산 자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사제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맹신자들과의 거리가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마법진을 발동하라.”
명령을 내린 것은 로어였다.
헨리가 없는 지금 헨리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은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로어의 명령에 일정 간격으로 거리를 벌려 성벽 전체를 점거한 부학파장들이 일시에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부학파장들의 얼굴엔 묘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크 메이지가 된 이후로 새롭게 터득한 마법들을 마음껏 사용해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아크 메이지가 된 부학파장들이 일시에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흩어진 부학파장들을 중심으로 각각 그룹을 만든 마법사들 또한 일시에 마력을 공명시켰다.
그러자 성벽 전방에 거대한 푸른 띠가 둘러지기 시작하며 무형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키아아아!
맹신자들과 푸른 띠가 닿기 몇 초 전.
띠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리고 맹신자 무리가 띠에 닿는 바로 그 순간!
파지지지짓!
띠에 응축되어 있던 푸른 전류가 전방을 향해 미친 듯이 흩뿌려졌다.
-키아아아아!
전류가 덮쳐지며,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맹신자들은 곧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비명은 얼마 가지 못해 끊어졌다.
그러나 끊어진 비명 사이로 새로운 비명이 고개를 비집고 내밀며 소리를 이었다.
고통의 연쇄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연쇄가 길어질수록, 그리고 잿더미가 되어 쌓여만 가는 시체가 늘어날수록, 누군가는 안도했다.
저들이 죽어야지만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더 늘어날 테니까.
파지지지짓!
마치 수천 마리의 뱀 떼를 풀어놓은 것처럼, 푸른 전류는 맹신자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배 속에 집어넣고서 새카맣게 소화시켜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키아아아!
끔찍한 비명들이 합주를 맞추어 사방을 가득 메꾸었다.
그러나 내지르는 비명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음에는 그 끔찍함에 귀를 틀어막던 이들도 어느 샌가 실눈을 뜨고 그 광경을 훔쳐보더니,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이젠 완전히 무감각해진 표정으로 그 광경들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불카누스가 로어에게 물었다.
“로어 님, 척 보기에도 규모가 있어 보이는 마법인데…… 저런 마법을 저렇게 오랫동안 유지시켜도 되겠습니까?”
“예, 아마 컨디션만 좋다면 반나절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
“대마법사님께서 이 또한 예상하셨는지는 몰라도, 원정을 떠나기 전에 그분께서 저희들을 전보다 몇 배나 더 강하게 만들어 주셨거든요.”
로어의 말대로다.
지금 전선에 투입된 마법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의 마법사는 다름 아닌 부학파장급인 아크 메이지들이었다.
그러니 바꿔서 말하자면 아직 상위 등급에 해당하는 현자들이 예비군으로 남아 있으니 이 정도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블랙 티어에 의해 아크 메이지급 마력량을 갖게 되었다곤 하지만 그들의 마력 또한 언젠간 바닥이 날 터.
그래서 마련된 비책이 하위 마법사들을 몇 그룹으로 나누어 부학파장에게 마력을 공급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개발한 마법들 중에는 서로의 마력을 공유하되, 한 사람에게 마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마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포지션은 그야말로 마법 포격의 정석적인 전술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키아아…….
털썩!
마침내 비명을 내지르던 마지막 맹신자가 쓰러지며, 성 앞의 초원에는 때 아닌 탄내로 가득 찼다.
푸른 띠를 기점으로 넓게 파장을 그리듯 퍼져 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거무죽죽하게 타 마치 마계의 죽은 땅을 떠올리게 했다.
그 광경을 본 마도사가 부학파장에게 물었다.
“부학파장님. 시체들은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그대로 둔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체더미들은 훌륭한 장애물이 될 테니까.”
대규모 단위의 전력 마법을 뿌리면서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눈앞에 밀려오는 저놈들은 단지 숫자만 많을 뿐이지, 그 본질 자체는 보통의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아무런 도구도 전술도 가지지 못한 채 악다구니만 가지고 덤벼드는 맹신자들은 그 수가 어떻게 됐든 마력 수급만 원활히 이루어진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맹신자들의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으니 장담할 순 없었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저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곳에서 저들과 맞서 싸우며 최대한 버티는 것뿐이다. 대마법사님께서 아서스 그놈을 쓰러뜨릴 때까지 말이야.”
남은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직 하나.
이곳에 남은 인류를 지키며 최전선에서 아서스와 맞서 싸우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헨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리자르크 언덕.
리자르크 언덕에 리자르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매해 이맘때쯤이면 ‘리자르크’라는 꽃들이 잔뜩 피어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물론 세상에는 수많은 꽃들이 존재하고, 이 언덕 주변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꽃들이 즐비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자르크 꽃이 언덕의 이름이 된 것은, 대륙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리자르크 꽃이 핌과 더불어 리자르크 꽃의 꽃잎 색이 무지개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곳 리자르크 언덕에는 푸르른 초목들 사이로 색채가 화려한 리자르크 꽃들이 마음껏 기지개를 펼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꿀과 꽃향기가 가득해야 할 리자르크 언덕에는 때 아닌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바람의 중심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한 미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앉아 있었다.
“뭐야, 이럼 곤란한데?”
미남자는 아서스였다.
아서스 앞에는 넝마가 된 갑옷을 입고 자신이 흘린 핏물 위에 쓰러져 있는 헨리가 있었다.
아서스가 말했다.
“뭐해? 얼른 치료하지 않고.”
아서스가 성녀를 재촉했다.
“마, 마법사님…….”
성녀의 가녀린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었다.
몇 차례의 공방이 이루어지면서, 아서스는 성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도륙했다.
물론 절대로 죽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온 최후의 장난감인 만큼 그리 쉽게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중에서 유일하게 치유가 가능한 성녀만을 남겨 두고 다른 녀석들만 몇 번이고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안겨 주었다.
“치료 안 해?”
두려움에 떠는 성녀를, 아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재차 치료를 재촉했다.
그러나 가까운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해 성녀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치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다.
아서스는 고개 숙인 성녀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치료하지 않지? 설마 이제 와서 내빼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린은 정말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여신이로군. 왜 지금은 페일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림하지 않는 거지? 응? 어디 한번 대답해 보라고.”
아서스는 진심으로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 이죽거림의 대상은 성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녀를 보듬고 있는 여신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서스는 화면 속에서 눈을 마주쳤던 여신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이력이 있었으니까.
이에 성녀는 여전히 흐느껴 울었다.
“어이가 없군.”
아서스는 그녀의 턱을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그 순간.
푸욱!
“음?”
아서스는 자신의 가슴팍에서 길쭉한 칼날이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칼날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쇠의 느낌이 전해졌다.
“호오?”
방심한 탓일까?
제아무리 반신의 경지에 오른 아서스라 할지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이렇듯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까짓 관통상쯤, 아서스에겐 그다지 큰 위해가 되지 못했다.
아서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거의 넝마가 되어 균형조차 잡기 힘들어 보이는 헥터가, 독기 가득한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팔을 내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