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아포칼립스 (2)
“끝까지 네놈은……!”
헨리는 뒷목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여태껏 저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놈의 장단에 맞춰 준 것인데, 이렇게 돼 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고개를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현자들은 들어라!”
“예, 대마법사님!”
“당황하지 말고 모두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모두들!”
헨리의 외침에 헨리와 눈을 맞춘 기사들이 서둘러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한데 모아 헨리에게 건넸다.
헨리가 반지를 건네받으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맡겨 두십시오, 사령관님.”
헨리는 반지를 건네받으며 기사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이에 기사들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자신감을 내비쳤다.
우웅!
이윽고 현자들과 함께 기사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혹여나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기사들에게 각각 지켜야 할 구역들을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미리 구역을 나누어 놓길 잘했군.’
원래는 혹시 모를 사도의 2차 침공을 대비해 구역을 나눠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준비가 이런 식으로나마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광명이 번쩍이며 원정대원들이 사라졌다.
이제 자리에 남은 것은 헨리를 제외한 네 사람, 헤라리온과 성녀, 그리고 후슬러와 헥터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지가 없어도 모두들 신력을 소유하고 있거나, 그와 비슷한 힘을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남은 이들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고작해야 다섯 명이라…… 그마저도 나보다 훨씬 적은 양이네.”
양은 아마도 신력의 양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서스의 말은, 객관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런 객관적인 데이터를 따지기엔 의미가 없었다.
헨리에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부딪쳐 보아야만 했다.
그런 속사정을 눈치챘는지 아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헥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전신에 오러를 틔워 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서스에게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부웅!
거대한 대검이 섬뜩한 바람소리를 내며 궤적을 그렸다.
도무지 대검을 휘두른다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죽어라!
헥터의 대검이 아서스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혀 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대검이 아서스의 살갗에 닿으려던 그 순간.
콰아앙!
전혀 보지 못했던 얇고 긴 검신 하나가 헥터의 대검을 막아섰다.
-넌……!
“간만이네, 이 언데드 자식아.”
헥터의 어마어마한 완력을 버텨 내며 아서스 앞을 막아선 남자.
킹턴이었다.
“킹턴?”
갑작스러운 킹턴의 등장에 헨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킹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킹턴이 오러를 폭발시키며 거리를 좁힌 헥터를 다시 저만치 밀어냈다.
부웅!
검압으로 흙먼지를 걷어 내는 헥터.
걷힌 흙먼지 사이로 킹턴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꽤나 반갑군, 헨리.”
“네놈은 또……!”
“닥쳐라!”
헨리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녀석을 질책했다.
하지만 못 본 새에 기세등등해진 킹턴은 헨리의 말허리를 자르고 한껏 거만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난 아서스 님의 충실한 심복! 그러니 아서스 님께 위해가 되는 네놈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그 태도가 너무 뻔뻔한 나머지, 원정대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을 수가 있을까?
물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킹턴의 로그 스톤 또한 로난과 함께 이곳 리자르크 언덕으로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어찌 보면 살기 위해 저런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해해 주고 싶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으니까.
킹턴의 외침에 잠깐의 침묵에 맴돌았다.
그리고 침묵 끝에 헨리가 물었다.
“혹시…… 로난을 이렇게 만든 것도 네놈 짓이냐?”
“그래, 내가 그랬다!”
“그렇군.”
이 이상은 물어볼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당당함에 헨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헨리는 손에 쥔 위즈덤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푸른 하늘에 짙은 회색빛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곧 고목나무만큼 거대한 벼락을 떨어뜨렸다.
꽈르릉!
벼락은 킹턴을 포함한 아서스까지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헨리는 벼락을 떨어뜨리는 와중에도 다음 영창을 시전했다.
영창을 시전하자 바닥에서 강철로 된 가시들이 솟아올라 두 사람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솟구친 강철 가시는 이내 곧 회전했고, 회전함과 동시에 화염을 내뿜었다.
화르륵!
바닥에서 용암이 역류하고 대기가 폭발했다.
헨리가 위즈덤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온갖 고위 등급의 마법들이 두 사람에게로 작렬했다.
그러기를 한참.
헨리는 몇 번이나 더 마법을 퍼부은 후에야 새로운 마법을 영창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쯧.”
영창을 그만둔 직후, 헨리가 짧게 혀를 찼다.
눈앞에는 좀 전까지 퍼부은 마법들로 인해 작은 재앙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앙 사이로 여전히 하나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서스의 것이었다.
아서스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서 재앙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말했다.
“이런…… 모처럼 새로 얻게 된 칼잡인데 이런 식으로 날려 먹게 될 줄이야…….”
아서스의 말대로 킹턴은 죽었다.
제아무리 궁극기를 익힌 최상급 소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8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몇십 개나 견뎌 낼 리는 만무했으니까.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던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허무하게 한줌의 재도 남지 않았다.
헨리는 아서스의 말을 무시한 채 로난의 머리를 주워 들며 말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머리를 주워 든 헨리는 그것을 클레버의 체스트 속에 수납시켰다.
“미안하다, 로난.”
죽은 전우에게 달리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고, 원정에 참여한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난.
녀석은 헨리가 환생한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또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로난 만큼은 헨리에게 있어 조금은 더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로난이 죽었다.
그것도 평생 증오해 마지않았던 자신의 양아버지 손에 말이다.
참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서 굳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복수를 해 주겠다고.
이로써 헨리가 아서스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헨리의 표정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설마, 고작 칼잡이 하나 죽었다고 분노하는 건 아니지?”
아서스의 물음.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헨리가 말했다.
“헥터.”
-알겠다.
콰앙!
그래서 헥터를 대답으로 대신했다.
헨리의 부름을 받은 헥터는 새롭게 태어난 헨리의 검답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아서스에게 검을 내질렀다.
좁혀 낸 속도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헥터의 검은 아서스의 코앞에서 멈추어 섰다.
마치 투명한 결계에 가로막힌 것처럼 말이다.
헥터를 본 아서스가 말했다.
“데스나이트라…… 제법 머리를 쓰긴 했네. 하지만.”
우웅-! 콰앙!
헥터의 붉은 안광을 가까이서 본 아서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서 손끝에 에너지를 응축시켜 폭발시켜 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일어난 폭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러나.
“호오?”
헥터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여전히 아서스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헥터의 전신에 보랏빛 예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그 기운의 끝에는 서둘러 주문을 영창하고 있는 후슬러가 있었다.
“사령관님, 지금입니다!”
후슬러의 외침에 헨리는 위즈덤을 역소환시킨 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헤라리온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검사는 이내 곧 각자가 가진 힘을 폭발시켜 내며 대치 중인 헥터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돌진했다.
콰아앙! 쩌적!
“……!”
세 명의 기사가 각기 다른 힘을 가지고서 일시에 공격을 가하니,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아서스의 무형 결계에 조그마한 균열이 일었다.
균열의 소리를 들은 헨리가 외쳤다.
“성녀님!”
“예!”
헨리의 신호에 성녀 또한 곧장 무릎을 꿇었다.
그런 다음 전시 상황에만 빛을 발하는 수호 성법들을 서둘러 전개했다.
쩌저적!
효과가 있었다.
성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세 사람의 몸에 여신의 축복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신력이 한층 더 강화됐으니까.
세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더 큰 힘을 폭발시켜 내며 한 번 더 발진했다.
그러자 무형 결계에 맞닿은 검이 매섭게 진동하기 시작하며 금방이라도 결계를 부숴 놓을 것처럼 무섭게 폭주했다.
“으아아아!”
쩌적- 쩌저적-! 채애앵!
“……!”
‘됐다……!’
결계가 깨졌다.
한 번 더 발진한 세 명의 검사들은 기어코 그 결실을 맺어 낸 것이다.
결계가 부서지며 아서스 또한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어이가 없군.”
부웅!
콰아앙-!
결계를 부순 세 개의 칼끝이 아서스에게 닿기 직전, 아서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같은 극에 밀려난 자석처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순식간에 튕겨져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서스가 부서진 결계를 보며 말했다.
“엄청난 발전이군. 솔직히 놀랐어. 난 너희가 결계는커녕 나한테 접근조차 못할 줄 알았거든. 그러니 인정해 주지. 확실히 한 달간 많은 준비를 한 것 같네, 헨리. 하지만 준비한 게 이게 전부라면 너희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말을 마친 아서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서스의 주위로 시커멓게 이글거리는 ‘창’들이 소환되었다.
“나를 더 즐겁게 만들어라, 헨리.”
수와아!
아서스가 말과 함께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오른 창들이 마치 살아 있는 화살처럼 날아가 헨리의 팔과 다리를 관통했다.
팔다리에 극심한 고통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헨리는 피가 뿜어지는 걸 자신의 눈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신음도 내뱉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는구나.”
콰드득!
조금의 신음조차 내뱉지 않는 헨리를 보며 아서스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펼친 손을 주먹 쥔 다음 오른쪽으로 반 바퀴 정도 회전시켰다.
그러자 헨리의 팔다리를 관통한 어둠의 창들 또한 오른쪽 방향으로 회전했다.
“크아아아아!”
“그래. 진즉에 그랬어야지.”
헨리의 비명에, 아서스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주먹을 거두었다.
아서스가 주먹을 거두자 시커멓던 어둠의 창들 또한 금방 사라졌다.
창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겼고, 구멍 사이로 핏물들이 울컥 쏟아졌다.
“대마법사님!”
놀란 성녀가 서둘러 헨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로 나가떨어졌던 헥터 또한 다시금 후슬러의 지원과 함께 아서스에게 달려들었다.
헤라리온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신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크하하하! 그래! 그런 식으로 계속 발버둥 쳐라! 그렇게 발버둥 쳐서 너희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나를 기쁘게 만들어라!”
파지지짓!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원정대원들을 보며 아서스는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터뜨린 광소와 함께 다시금 어둠의 창들을 소환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