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에피타이저 (2)
그것은 연기로 이루어진 아서스의 환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서스는 연기를 원료 삼아 정말로 실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서스가 완전히 강림하였을 때, 작열통에 시달리던 세 사람은 탈진하듯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반가워.”
동행자는 없었다.
나타난 것은 아서스 혼자뿐이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아서스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헨리는 즉시 소리쳤다.
“잡아!”
“옛!”
짝!
헨리의 외침에 일곱 현자가 순식간에 합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닥에 양손바닥을 붙이며 결박술의 시동어를 외쳤다.
“결박!”
파지지짓!
헨리를 비롯한 일곱 현자의 행동은 마치 절제된 군인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결박술이 발동되자 손바닥이 닿은 바닥으로부터 각 현자들의 개성이 녹아든 마력 사슬들이 뱀처럼 튀어나와 아서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서스는 일곱 현자들의 행동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조금도 회피하려 들지 않고 도리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의 행동을 구경했다.
파지지직!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갖가지 속성을 띤 마력 사슬들이 맹렬한 기세로 뻗어져 나가 아서스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력 사슬들이 아서스를 휘감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슬들은 마치 죽은 뱀처럼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일곱 현자의 결박술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쯧쯧, 아직도 이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아서스는 몹시 실망한 기색을 띠었다.
그러곤 어깨 위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듯 손으로 팔뚝 언저리를 털어 내곤 헨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직이다!”
파지지지직!
마치 수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듯, 귓전의 고막을 갉아 대는 날카로운 소리가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그 굉장한 여파에 근방의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귀를 틀어막기도 전에 모두 눈부터 감아야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잔뜩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서스의 머리 위로 천년 묵은 고목만 한 엄청난 크기의 벼락이 작렬했으니까.
파지지지짓!
벼락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5초, 10초…….
아니, 거의 15초 가까이 지속된 벼락 속에서 사람들은 차츰차츰 광명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벼락으로 된 폭포가 쏟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벼락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벼락의 속성은 물론이거니와 상대가 가진 모든 것들을 마비시키듯 결박시키는, 헨리가 새롭게 창조한 8서클 단위의 결박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너는 좀 다르구나.”
“……!”
쏟아지는 벼락 속에서도 아서스는 태연하게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이윽고 벼락이 그쳤다.
아서스가 그치게 한 것이 아니었다.
헨리가 벼락을 거둔 것이었다.
벼락을 거두자 쏟아지는 벼락 속에 갇혀 있던 아서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서스는 여전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 전과는 달리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두 손을 모았다.
“그사이에 한 단계 더 성장을 이루었나 보군.”
막대한 신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마법에 대해선 조금도 알지 못했기에, 아서스가 내릴 수 있는 감상평은 이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확실히 놀랐다.
7서클씩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일곱이나 달려들어 결박술을 펼쳤지만 아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는 달랐다.
쏟아부은 화력 탓이었을까?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반신에 가까운 아서스조차도 따끔한 정도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기랄……!’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헨리는 알지 못했다.
도리어 웃는 낯짝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아서스를 보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뿌득!
‘역시 역부족인 건가?’
8서클 단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마법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다.
이이상의 발악은 단순한 감정 소모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벼락을 닮은 결박 마법을 중지시킨 것이다.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서클을 이룬 직후, 그 누구보다도 아서스에게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이가 바로 헨리였다.
비록 그 결과가 처참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나름대로 실패에 대한 소득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소득을 얻은 건 얻은 것이고, 분한 것은 분한 것이었다.
헨리가 이를 부득 갈며 손을 거두자 그 모습을 본 아서스가 말했다.
“좋은 판단이야. 이제 슬슬 재롱을 기다려 주는 것도 지치려던 참이었거든.”
헨리의 발전에 조금 감탄하긴 했지만 한 달이나 기다린 식사치곤 에피타이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호기롭게 수저를 들었던 아서스는 더 이상 에피타이저에 손을 대지 않고 상을 물리기로 했다.
아서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표정이 좋네. 반가운 얼굴들도 섞여 있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지난 한 달간 너희들은 나를 위해 어떠한 시간들을 보냈지?”
아서스는 장난스럽게 물음을 건넸다.
그러나 아서스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아서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대답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눈빛의 투지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군. 드라칸, 내가 말했지? 내가 직접 행차하는 것만큼 확실한 응원은 없을 거라고 말이야.”
아서스는 분명히 혼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드라칸에게 말을 건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늉 따위가 아닌 자신의 권능을 이용한 초장거리 대화였다.
대화를 마친 아서스가 말했다.
“뭐…… 모쪼록 응원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기대들 할게. 지난 한 달간 너희들을 위해 나도 꽤나 준비를 했거든. 그러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나를 즐겁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
예고했던 한 달이 지났고 막판에 바꾼 계획대로 몸소 무슈에 강림했다.
아서스는 보고 싶은 것들을 보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음 식사가 나오기까지 여유 있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서스가 헨리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헨리, 리자르크 언덕으로 오렴. 나는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 참! 웬만하면 텔레포트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 말을 어기고 단숨에 리자르크 언덕으로 온다면 그땐 대륙에 남은 모든 인간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신도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거든. 그럼 리자르크 언덕에서 봐, 헨리.”
할말을 마친 아서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아서스가 모습을 감춘 직후.
-키에에에에!
두두두두두!
선명하게 진동하는 대지.
그리고 지평선 너머,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거대한 검은 파도.
그것들은 다름 아닌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키메라 군단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아서스의 초대를 해석할 겨를도 없이 헨리는 쏟아져 오는 키메라들의 파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지난 한 달간 단 하루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오직 녀석을 죽일 생각만으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되찾은 8서클의 경지로는 녀석에게 약간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래서 헨리의 기분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
헨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헨리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녀석의 태도를 미루어 보건데, 헨리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것은 순전히 자신의 유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기다림이었음을 말이다.
물론 어찌 됐든 놈의 바람대로 일이 흘러갈 수밖에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는 분노를 통해 의미 없는 심력 소모를 하고 싶진 않았다.
“제기랄!”
아서스가 사라지고 키메라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기사들은 이를 부득 갈며 허리에 맸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검을 뽑고 오러를 출력시키려 할 때 헨리가 말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의미 없는 심력 소모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풀이가 필요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때마침 분풀이하기에 좋은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헨리의 명령에 칼을 뽑아 든 기사들이 검을 뒤로 물렸다.
헨리의 두 눈에 차가운 분노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윽고 헨리는 손을 들었다.
그런 다음 들어 올린 손을 벌려, 반딧불이 같은 에메랄드 빛의 점들을 손아귀에 응집시켰다.
소환되는 지팡이.
세상의 지혜, 위즈덤이었다.
위즈덤은 훌륭한 마력 저장고.
동시에 헨리의 마력을 증폭시켜 주고 헨리의 마법 연산을 더욱 가속시켜 주는 특별한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헨리는 소환된 위즈덤을 왼손에 쥐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린 후 검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지평선을 지우듯이 재빠르게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퍼벙! 퍼버벙! 콰광! 콰과광!
콰직! 콰드드득!
“……!”
“……!”
다가오는 검은 물결에 크고 작은 검붉은 폭발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폭발을 보며 연합원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 힘은……!’
단 몇 초였다.
헨리가 가벼운 손짓으로 허공에 선을 긋자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검은 파도와 더불어 대지를 울리던 거대한 진동들이 멈추었다.
헨리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손짓으로 분명히 수만에 달하는 키메라들을 죽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마력 고갈 현상은커녕 수많은 마법 연산에 의한 어지럼증도 호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다름 아닌 7현자들이었다.
‘이, 이게 바로!’
‘저것이 바로 8서클의 힘이란 말인가……!’
경탄과 부러움, 그리고 동시에 박탈감이 들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지금 헨리가 가진 힘이었다.
이윽고 헨리는 위즈덤을 역소환시킨 후 몸을 돌려 쓰러진 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성녀님.”
“예!”
헨리의 부름에 성녀가 급히 다가와 세 사람에게 치유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등짝에 난 흉터와 상처, 그리고 흐르는 고름과 물집들은 결코 아서스의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성녀의 치유술은 대륙 제일이었으니까.
더불어 헐떡이는 숨소리도 멎기 시작했고 식은땀도 마르기 시작했다.
헨리가 바할드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후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바할드.
바할드 정도 되는 기사라면 이까짓 작열통쯤은 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될 테지만 바할드에게 적용된 불꽃은 평범한 불꽃 따위가 아닌 신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불꽃’이었다.
그렇기에 가진 온도 자체가 보통의 불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
헨리는 상처가 아물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아서스의 상흔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에 바할드가 마른 입술을 벌려 헨리를 불렀다.
“사령관님…….”
“예?”
헨리가 연합의 총사령관이 되고 연합원 모두가 헨리에게 경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친분의 문제를 떠나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격식을 차리자는 의미에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헨리가 쓰던 경어를 접고 반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평소처럼 연합원들에게 예를 갖추며 경어를 사용했다.
바할드의 말이 계속됐다.
“제 등짝에…… 아직도 놈이 새긴 흉터가 남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사령관님, 혹시 제가 저의 등을 볼 수 있게 거울을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헨리는 바할드의 부탁대로 큼지막한 거울을 소환해 주었다.
거울 앞에 선 바할드.
바할드는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에 성녀가 놀란 눈초리로 바할드를 말리려 하였으나.
푸슉!
말릴 틈도 없이 자신의 등짝에 칼날을 쑤셔 넣었다.
아서스의 상흔이 새겨진 자신의 등짝에 칼날을 박아 넣는 바할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바할드는 주위의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칼날을 놀렸다.
투둑, 툭!
바할드는 자신의 생살을 도려냈다.
자신의 칼로 자신의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이야 어마어마하겠지만, 계속해서 아서스의 흔적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게 더 수치스럽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바할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살갗에 칼날을 박아 넣은 것이다.
이윽고 살갗을 떼어 내자, 보기 싫은 아서스의 흉터를 바할드는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신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성녀에게 공손한 어투로 부탁했다.
“치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
“예, 예!”
등짝의 흉터를 도려낸 후 바할드와 시선을 맞춘 헨리.
헨리는 볼 수 있었다.
대륙 최고의 기사왕, 바할드의 두 눈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격렬한 분노와 증오심이 불타오르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