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73화 (273/522)
  • # 273

    뜻밖의 조력자 (2)

    “진심이냐?”

    단호한 헤라볼라의 대답에 헨리가 싸늘하게 물었다.

    이에 헤라볼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지! 이거, 두 번 농담하다간 이미 죽었는데도 또 죽게 생겼네.”

    “……재미없는 농담이었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평소라면 유쾌하게 들렸을 농담이 지금은 썩 반갑지가 않았다.

    이에 헤라볼라가 부드럽게 헨리의 긴장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많이 긴장했나 보군. 헨리, 긴장 풀어. 여긴 내가 사는 곳이고, 내가 신으로 군림하는 공간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막 대할 이유는 없지. 우린 오랜 친구잖아, 안 그래?”

    “적어도 전생에는 친구였지. 지금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비밀 친구고.”

    “비밀 친구라…… 그것도 꽤나 적절한 단어군.”

    헤라리온의 말 그대로였다.

    이곳은 헤라볼라의 영혼이 안치된 영혼의 무덤.

    그리고 헨리의 영혼이 과거의 진짜 모습으로 이곳에 드러났기에, 헤라리온의 말대로 이곳에서 그는 절대적인 신일 것이다.

    ‘그러니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봤겠지.’

    헨리는 그사이에 수 계산을 모두 끝마쳤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헤라볼라도 수 계산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헨리가 아는 헤라볼라는, 적어도 친구 사이에 수를 운운할 만큼 팍팍한 녀석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그래서 헨리는 헤라볼라의 말에, 그제야 긴장을 한 꺼풀 내려놓았다.

    헤라볼라가 말했다.

    “상황이 안 좋군.”

    “안 좋은 정도가 아니야. 최악이지.”

    “무능한 아들 때문에 고생이 많군. 녀석, 그러기에 평소에 검 좀 배워 놓으라니까 내 말은 곧 죽어도 안 듣더니, 내가 죽고 나서야 남의 말을 수용하는군.”

    “물이 엎질러지고서야 움직이는 부류가 있긴 하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 네 아들은 그렇게까지 어리숙하진 않아.”

    “아니, 어리숙해. 나도 그렇고 내 아버지도 그렇지만, 아니 당장 나랑 비교해 봐도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놈이잖아?”

    뛰어난 아버지가 뒤떨어지는 아들을 질책하는 건, 아니 친구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는 건 꽤나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헤라볼라가 헨리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헨리를 진정한 친구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남 앞에서 자신의 아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얼마간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한참의 잡담 끝에 헤라볼라가 말했다.

    “이거, 간만에 원 없이 주절거릴 수 있어서 참 좋네.”

    “많이 외로웠나 보군.”

    “그렇게 외롭진 않아.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아버지? 아버지라면 헤드자온 1세를 말하는 것이겠군.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지?”

    “어디 계시긴, 손주 놈을 보고 계시지.”

    “손주? 아까는 헤라리온이 벌을 받고 있다더니?”

    “나 대신 잔소리를 해 주실 테니까. 나름대로 엄한 분이시거든.”

    분명히 두 명의 영혼이 안치된 곳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왜 헤라볼라만 보이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래도 뭐, 아버님이야 워낙에 손주 놈을 좋아하시니 적당히 하시겠지만…… 할아버지와 손주의 재회는 둘째 치고, 우리는 어른들이니 아들놈이 싸질러 놓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냐?”

    “아들놈이 싸질러 놓은 것이라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아서스 그놈이야, 네 아들이 아니라.”

    “물론 원흉은 아서스 그놈에게 있지. 애초에 그놈이 야누스의 힘을 탐내지만 않았더라면 이 사달이 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베네딕의 반란도 잘 저지한 놈이, 왜 여자 하날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이 사달을 냈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이 사실을 너에게 전해 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헤라리온이 왕비를 데리고 야누스의 신전에 입성한 날, 아서스는 셀렌을 통해 야누스와 접촉했다.”

    “셀렌을 통해?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너희들은 몰랐겠지만 아서스가 셀렌의 몸에 이상한 술수를 부려 놨거든. 그로 인해 아서스와 야누스는 신전에 함께 들어온 셀렌의 몸뚱이를 통해 교감할 수 있었고, 아서스의 야망을 확인한 야누스는 아서스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지.”

    헤라볼라는 그동안 칸의 눈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헨리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헨리는 헤라볼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찰 뿐이었다.

    “설마 그런 경로로 힘을 얻었을 줄이야……!”

    “이곳이 왜 칸의 눈이라고 불리는지 아나? 여기에 있으면 가지고 있던 신력이 극대화되어서 사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지켜볼 수 있거든.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다 확실한 이야기다 이거지.”

    헤라볼라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야누스는 위험한 놈이야. 애초에 놈의 신전이 발견된 곳도 현재 수도 칸의 지하였지.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그곳에 칸이라는 나라를 세우신 것이고.”

    “야누스의 신전 하나 때문에?”

    “그렇지. 우리는 원래부터 라를 모시고 있어서 어느 곳에서 라를 모시는지는 별로 상관없었거든. 하지만 야누스는 아니야. 내 아버지께선 진즉에 야누스의 위험성을 눈치채셨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칸을 건국한 것이지.”

    “위험한 걸 알았다면 없애 버리면 되잖아?”

    “허튼 소리! 사막에서 사는 사람이 사막신의 신전을 부수라고? 제아무리 야누스가 위험하다지만 그건 신성모독이야.”

    결국 없애지 못해 숨겨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야지만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야누스의 힘을 통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

    헤라볼라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삼대에 걸쳐 억제해 왔다면 꽤나 길게 버텼다고 생각해. 그렇잖아도 야누스 그놈, 툭하면 짜증이었거든.”

    “꼭 야누스와 꽤나 가까웠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가깝다기보다는 놈이 나를 많이 탐냈지. 난 아버지나 아들놈에 비해선 많이 호기로운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야누스는 자신의 힘을 빌려 세상을 집어삼키라고 숱한 제안을 해 왔지. 하지만 난 거절했어. 언젠간 그 힘이 결국엔 날 집어삼킬 것이란 걸 알았거든.”

    “그렇다면 아서스도 언젠간 야누스에게 집어삼켜진단 뜻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아서스 그놈이 원하는 바는 잘 모르겠지만 야누스가 원하는 바는 잘 알거든.”

    “그게 뭔데?”

    “세상으로의 현신(現神).”

    ‘……!’

    현신.

    헨리는 그 두 글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이 이 세상에 직접 현신하기를 원한다니?

    이는 대륙 종교 역사에 대해 박식한 헨리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야.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 그리고 평생토록 나만 알려던 이야기이기도 했고.”

    “왜지? 애초부터 후손에게 알려 주면 자네의 말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 아닌가?”

    “아니, 말이란 건 언젠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 당장 아서스만 해도 비밀로 부쳐 놓았던 야누스의 힘을 알았잖아? 그러니 애초부터 입을 닫고 있는 게 나아. 커다란 힘에는 그만큼 더러운 것들이 달라붙기 마련이니까.”

    “그런 비밀을 나에게 말해 줘도 되나?”

    “넌 상관없지.”

    “왜?”

    “넌 애초에 신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너는 마법에만 미쳐 사는 놈이잖아?”

    헤라볼라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리고 헤라볼라의 지적에 헨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안목 하나는 여전하군.”

    “그럼. 내 아들놈도 그렇겠지만 나에겐 라의 눈이라는 절대적인 혜안이 있는 걸.”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원래는 적당히 너의 유품이나 빌려 아서스를 상대하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비밀들을 알게 됐으니 말이야.”

    “빌려 가다니, 내 허락이 없으면 제아무리 내 아들놈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도굴인 거 몰라?”

    “빌려갔다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지 뭐.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잖아?”

    씨익.

    명백한 고인 능욕이었다.

    하지만 헤라볼라는 그러한 능욕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미친놈!”

    “그래서, 가진 신물이 얼마나 되는데?”

    “얼마나 필요하기에 이렇게 날강도처럼 굴어?”

    “적어도 열 개는 필요하다.”

    “흐음, 열 개라…….”

    상대해야 할 적이 열 명이니 신력을 가진 자가 적어도 열은 되어야 했다.

    물론 이는 최소한의 숫자였다.

    다다익선.

    신력을 가진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아서스를 상대하긴 더 쉬워질 테니까.

    “열 개라……. 못 내줄 것도 없지!”

    헤라볼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곧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허공에 손짓한 후 그가 말했다.

    “됐어.”

    “뭐한 거야, 방금?”

    “잠에서 깨어나면 주머니를 한번 확인해 봐. 그 안에 넣어 놨으니까.”

    “전능하군.”

    “그럼! 이 안에서만큼은 나도 나름 신이라고? 그러니까 약속이나 지켜. 모든 일이 끝나면 신물을 반납한다는 거. 네 눈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왕국에선 꽤나 귀중한 보물이거든.”

    “물론이지. 신물을 빌려준 대가로 일처리만큼은 확실하게 해 줄게.”

    “그럼, 그래야지.”

    시원시원한 일처리.

    헤라볼라가 헨리에게 이렇듯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헤라볼라가 헨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못난 자식 놈을 잘 보필해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아서스 때문에 왕국이 멸망하긴 했지만 헤라리온 혼자만의 힘으로는 왕국의 복수도, 재건도 그 무엇 하나 온전히 이뤄 낼 수 없을 테니까.

    볼일을 마친 헨리가 말했다.

    “그럼 이제 다시 바깥으로 보내 주는 게 어때?”

    “나 참,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네. 어떻게 용건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겠다고 하냐?”

    “알면서 물어? 고작해야 한 달이야,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아직 아버님께서 손주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고 하시니까 차나 한 잔 마시고 가. 그리고 너한테 해 줄 이야기도 남아 있고 말이야.”

    “나한테?”

    “그래.”

    용건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헨리를 헤라볼라는 능숙한 화법으로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휘젓자 곧 두 사람 사이에 티테이블이 마련되었다.

    헨리는 능숙하게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해 줄 이야기가 뭔데?”

    “해 줄 이야기야 많지. 하지만 내가 먼저 해 줄 이야기를 떠나서. 네가 궁금해하던 것들이 더 많지 않을까?”

    “궁금해하던 것…… 너 설마?”

    “그래, 기회는 지금뿐이야. 네가 다음번에 이곳에 왔을 때, 내가 너를 다시 초대할지 안 할지는 모를 일이잖아?”

    헤라볼라는 제법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 헨리의 호기심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덕분에 헨리는 곧 선물꾸러미를 받아 든 아이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선물 폭탄을 안아 든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헤라볼라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헤라리온을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지 몰라. 그러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걸?”

    “재촉 안 해도 돼. 그렇잖아도 지금 물어보려고 했으니까. 그럼 먼저 첫 번째, 샤하트라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니 이해가 빠르겠네. 그럼 넌 혹시 알아? 내가 대체 어떻게 사도를 쓰러뜨렸는지?”

    “무슨 말이냐, 그게?”

    “아서스도 사도도 모두 신력을 가진 존재야. 하지만 난 사도를 죽이는 덴 성공했지만 아서스는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농락당했어. 그리고 난 신을 믿지 않지.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모순적이라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너한테 신력이 없다고?”

    “그래, 내가 알기로 신력은 신을 믿음으로써 생기는 신앙심을 통해 얻는 힘으로 알고 있다.”

    “맞긴 한데 좀 달라. 헨리, 너는 조금이지만 신력을 가지고 있긴 해. 단지 네가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내가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 신이란 신의 권능.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검과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이능(異能)을 뜻해. 그리고 넌 그 이능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이잖아?”

    “그렇지, 하지만 그건 이능이나 신력이 아니라 어느 능력 부족한 꼬맹이가 벌인 우연한 실수였어. 그것도 ‘흑마술’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이라는 능력으로 말이야.”

    “흑마술. 너는 아직도 그것을 마법의 한 종류로 치부하고 있냐?”

    “그럼?”

    “둔하네. 네가 의심하고 있는 흑마술의 언어와 마계어, 그리고 환술에서 쓰이는 환어까지. 여태껏 이것들에 대한 상관관계를 그렇게 의심해 놓고도 흑마술을 단순한 마법으로 치부하다니.”

    “그럼 설마?”

    “그래, 네가 의심하고 있는 게 맞아. 단지 쓰임새가 다르니 그 쓰임새에 따라 이름이 달랐을 뿐. 그 언어들의 근간은 모두가 같다. 그리고 넌 그 같은 근간에 뿌리를 둔 흑마술에 의해 다시 태어났고. 그런 네가 키메라들과 다를 게 뭐지?”

    사도가 된 키메라들.

    키메라들이 현재의 단계까지 진화할 수 있는 까닭은 간단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잔인한 실험 속에서, 드라칸은 아서스가 획득한 야누스의 권능에 도움을 받았다.

    그 권능의 힘은 바로 ‘죽음의 박탈’.

    그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목숨이 다시 새롭게 태어난 몸뚱이에 붙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었다.

    그리고 헤라볼라는, 그러한 키메라의 진화 과정과 헨리가 타인의 몸에서 강림 부활한 것을 같은 이치 정도로 여겼다.

    헤라볼라의 지적에, 헨리는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