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70화 (270/522)

# 270

슬픈 다짐 (2)

날이 밝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헨리로부터 기적의 비밀을 전해 들은 의사들이 빠른 속도로 그 사실을 전달했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헨리를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들뜬 분위기도 잠시, 성녀와 엘라곤의 치유술은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할 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해 주진 못했다.

생존자들이 얻은 마음의 병.

그것은 괴물들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의 심정이었다.

병원은 다시 물을 끼얹은 것처럼 숙연함이 잔뜩 맴돌았다.

헨리 또한 그러한 분위기를 읽었다.

그래서 곧바로 회복을 마친 동료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물론 개중에는 동료가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이젠 그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복수심을 품게 되었으니, 오히려 동료라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소집된 장소는 시청 근처에 마련된 임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원탁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모두들 갑옷이 아닌 평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소집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회장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들 모두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병원의 여느 환자들처럼 적잖은 마음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는 더더욱 큰 것이었다.

침묵이 얼마간 유지되자, 도리어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다름 아닌 반이었다.

반이 주먹으로 원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다들 넋 놓고 지금 뭐하는 건가!”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내지름 고함이었다.

그러나 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특히 헤라리온의 경우엔 여전히 어두운 낯빛과 함께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그에게 말했다.

“전하.”

“……예.”

무거운 음색으로 간신히 대답을 내놓는 헤라리온.

그러나 헨리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사도에게 한 번 패했다고 해서 남은 샤하트라까지 전부 아서스에게 떠넘기실 작정입니까?”

“…….”

샤하트라의 심장부라 불리는 수도 칸의 왕궁은 확실하게 궤멸됐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제사장과 제사종들이 죽었고 신전을 포함한 각종 제사 도구들까지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라리온이 태양신 라의 신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헤라리온은 단지 그 특유의 유약함에 잠겨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심정은 이해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학살로 아내와 어머니까지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샤하트라의 왕이었고 그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헨리가 모두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에게 패했다고 한들 저희는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남았고 아직도 이렇게 발붙일 수 있는 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슬픔에 빠져 남아 있는 것들까지 모조리 빼앗길 작정입니까?”

응원은 때때로 야단을 가장하기도 해야 한다.

따뜻한 위로보단 따끔한 충고가 더 나은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이에 침묵을 지키던 맥도웰이 말했다.

“너, 사도라는 놈들과 검은 섞어 보고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

혹여나 헨리가 탁상공론이나 펼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심술을 가득 담아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중에서 유일하게 사도를 이긴 존재가 바로 헨리였다.

이에 헨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섞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놈을 갈기갈기 찢어 사막에 뿌려 주고 왔습니다.”

“……갈기갈기 찢었다고?”

맥도웰이 상대했던 녀석은 글러트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도였다.

그리고 맥도웰은 글러트니를 상대하는 내내 헥터와 같은 문제에 빠져 놈에게 조금도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헨리의 대답에 놀라는 것은 맥도웰뿐만이 아니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알렌과 바할드까지 모두가 놀란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헨리가 말했다.

“다들 어떠한 부분에서 놀라시고 있는 지는 어림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가지고 왔습니다.”

“해결책을 가지고 왔다고?”

“예, 여러분은 지금 대체 어떤 방식으로 놈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는지, 그 부분이 궁금하신 것 아닙니까?”

정확했다.

헨리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시원하게 궁금증부터 풀어 주기로 했다.

전후 사정을 포함한 당시의 증언 같은 자잘한 것들은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니까.

헨리가 이어서 말했다.

“문제는 신력에 있었습니다.”

“신력?”

“예, 제가 수집한 정보들을 분석해 본 결과, 사도들은 총 아홉. 아니, 제가 한 놈을 죽였으니 이제 여덟이겠군요. 여덟 명의 사도들은 아서스로부터 신력을 받은 진화된 키메라들이었습니다.”

“아서스……!”

사도들이 아서스의 경배를 강요했으니 배후에 아서스가 있음을 알았고 팔이 잘려도 다시 자라나는 걸 보고 그 근본이 키메라라는 것 또한 예상했다.

하지만 신력이라니?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모두의 시선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것은 성녀님과의 추론 끝에 얻은 결과입니다. 그러니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여러분들은 사도들이 가진 아서스 특유의 신력 때문에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당한 것입니다.”

“그럼 녀석들은 어떻게 상대하면 되는 거죠?”

헨리의 설명을 듣던 알렌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헨리에게 질문했다.

그는 지금 몹시 분노해 있었다.

그는 사도 시온을 상대로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을 밟고 왔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도 신력을 가지면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신력만 생긴다면 그때는 사도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력이라……. 하지만 헨리, 내가 알기로 신력은 신에게 선택받은 이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바로 그렇습니다. 신에게 선택받는 것. 하지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느 종교의 말단 사제든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신력이니까요.”

“그럼 네 말인즉슨, 신력을 가지기 위해 종교를 가져라?”

“그렇습니다.”

“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으로썬 헨리가 이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할드가 물었다.

“그런데 헨리.”

“예, 바할드 님.”

“우리들은 평소 신을 믿지 않아 신력이 없었다곤 하지만……. 너한테는 종교가 있었나 보구나, 사도를 쓰러뜨렸다는 걸 보면.”

바할드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들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신력의 유무라면, 이중에서 유일하게 사도를 쓰러뜨린 헨리는 신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헨리가 처음에 고민했던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예,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따로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렇군.”

개인적인 종교가 있다는 말에, 바할드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는 헨리가 이들에게 내뱉는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당장 해명할 수 없는 것을 애써 해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어찌 됐든 일단 이들을 사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누군가 투덜거렸다.

“근데…… 한평생 믿지 않던 신을 믿으라니, 없던 신앙심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거야 원…….”

맥도웰이었다.

맥도웰은 자신의 패배가 신력의 유무 때문이라는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툴툴거리듯 짜증을 냈다.

하지만 짜증 속에 섞인 그의 의견은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헨리를 포함한 이들 모두가 신을 믿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의탁할 만큼의 신앙심은 품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특히 이러한 마음가짐은 고위직 기사나 마법사일 경우 더더욱 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위직 기사나 마법사들의 경우, 신의 선택이나 운명 따위가 아닌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 모든 것들을 이루어 왔으니까.

예컨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신보다는 스스로 모든 것을 개척해 온 나 자신을 더 믿는 것이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저 또한 공감하는 바입니다만, 그래서 그러한 점 때문에 제가 생각해 본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예, 하지만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헤라리온 전하께서 동의해야 하는 방법이므로 괜찮으시다면 여러분들께선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헨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헤라리온에게로 몰렸다.

이에 헤라리온 또한 놀란 눈초리로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헨리는 아무런 염려말라며 헤라리온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지.”

곧 헨리와 헤라리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동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에게 헨리가 말했다.

“여러분, 바깥으로 나가서 시청으로 가시면 무슈를 다스리는 불카누스 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신 분들은 그곳으로 가 주시겠습니까?”

헨리는 단 한 줌의 시간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헤라리온과 면담을 나누는 동안, 저들을 불카누스에게 보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도들에게 패하면서 넝마가 된 장비들을 버리고 새로운 무구들을 갖추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모두가 회장을 빠져나갔고 회장 안에는 헨리와 헤라리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헨리였다.

“전하.”

“예.”

“지금부터 제가 전하께 드릴 말씀은, 아니 부탁은, 어쩌면 전하의 입장에선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저로선 이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하께 이러한 방법을 여쭈려는 것입니다.”

헨리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제아무리 헤라리온이 심적으로 지쳤다고는 하나 공과 사는 뚜렷이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리의 진지한 경고에 헤라리온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허락이 떨어졌다.

이에 헨리는 가감 없이 질문했다.

“성녀님께 들었습니다. 현재 아서스가 가진 신력은 본래 전하께서 모시던 야누스 신의 신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로써 야누스와 가장 대척되는 신은 다름 아닌 ‘태양신 라’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전하, 저희들에겐 야누스에 대항할 막강한 신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신력으로 라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

용건이 발설됐다.

현재 헨리 일행에겐 신력이 필요하고 헨리는 그 신력으로 라의 권능을 택했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올바르게 작동되기 위해선 라의 신위를 가진, 라의 최고 대리자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래서 헤라리온의 허락을 받기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좋고, 다시 독기를 품는 것도 좋다.

그러나 기존의 사람들과 인의를 지키는 것 또한 몹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헨리가 헤라리온에게 하는 부탁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신앙심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의 침묵.

헤라리온은 지금 헨리가 자신에게 어떠한 제안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만약 헤라리온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임의로 신력을 얻을 수 있게끔 돕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신을 능멸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마법사님 저는……!”

한참의 고민 끝에 헤라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대답은.

“……죄송합니다.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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