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69화 (269/522)

# 269

슬픈 다짐 (1)

달빛은 여전히 밝은 빛으로 무슈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의료인들 또한 달빛 아래에 지친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폭풍 후에 닥친 고요한 평화였다.

“커어어…….”

“푸후우……!”

병원 내부엔 코를 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지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틀 밤낮을 환자들과 씨름해야 했으니까.

물론 모두가 잠든 것은 아니었다.

여느 병원이 그렇듯, 혹시 모를 응급 상황을 대비해 당직을 서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모두 지친 나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무슈의 의사인 게를린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는 온종일 피를 지혈하고 상처를 봉합하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동료 의사들과의 제비뽑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오늘 하루 당직에 당첨되고 만 것이다.

“큼냐냐…….”

그는 의자에 앉아 꽤나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었다.

불편한 자세를 통해 깊은 잠에 들지 않기 위한 그만의 작은 지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전신이 뜨뜻해지기 시작했다.

“커어어……!”

그러나 몸이 너무 피곤한 나머지 게를린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따뜻함이 사라진 직후에도 그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이윽고 헨리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따뜻함의 정체는 아이리네였다.

아이리네는 병원의 바깥에서 헨리의 도움으로 병원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 수호 성법을 펼쳤다.

그녀가 펼친 성법은 ‘광범위 초회복술’.

제방 전투에서 보여 주었던 수호 성법들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엘라곤도 함께 있었다.

-뀨뀨!

“그래, 너도 수고했다.”

헨리는 엘라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녀 혼자서 행했다면 제법 벅찼을 치유술이었지만 치유의 정령 엘라곤까지 합세하니 한결 치유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성녀님, 늦은 시간까지 협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제가 또 도울 일이 생긴다면 그땐 교황님이 아닌 저를 찾아 주십시오.”

성녀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헨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시 성국으로 복귀했다.

무슈로 되돌아온 헨리.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앙켈만으로 날아가 도시 전체를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에도 순서란 게 있다.

제아무리 헨리가 독한 마음을 먹고 다시 초심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들, 이미 관계를 맺은 주변 사람들과의 인의까지 저버려 가며 독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헨리 곁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지원군들이었기 때문이다.

성녀를 배웅한 헨리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병원 내부에는 성녀의 광역 치유술 덕분에 무너질 듯 쏟아지던 코골이가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병원은 이제 숲속과 같은 평화가 도래해 있다.

헨리는 맥도웰의 병실을 찾았다.

맥도웰의 병실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반은 맥도웰의 병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도 좋은 놈.’

반은 다행스럽게도 아서스의 화를 피해 간 지역의 보초를 맡았다.

그래서 피떡이 된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헨리는 오른손을 들어 반에게 손짓했다.

허공 위로 떠오르는 반.

반을 들어 올린 헨리는 곁눈질로 맥도웰의 상태를 살폈다.

맥도웰은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느낄 수 있었다.

고통에 떨던 맥도웰의 상태가 성녀의 치유술 덕분에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치유가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헨리는 허공에 반을 들어 올린 채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텔레포트.”

슈앙!

목적지는 당연히 앙켈만이었다.

* * *

후우웅!

앙켈만에 도착하자 차가운 밤공기가 반의 단잠을 깨웠다.

으음…….”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뜨는 반.

반은 주위의 풍경이 변함을 인지하자마자 습관처럼 머리맡에 둔 검을 찾았다.

그러나 헨리는 반의 검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허공을 더듬는 반.

“으음?”

반이 짧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접니다, 형님.”

“헨리!”

자신을 이동시킨 자가 헨리라는 것을 확인한 반은 그제야 경계심을 풀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하품을 했다.

“아우 피곤…… 음? 왜 이렇게 개운하지?”

“간밤에 성녀가 다녀갔습니다. 성녀와 엘라곤이 힘을 합쳐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을 회복시켰습니다.”

“뭐? 대체 언제?”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대다수의 환자들이 자신이 치료됐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그건 그렇고…… 형님,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여기? 여긴……!”

헨리의 물음에 반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앙켈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는 앙켈만이 아닌 산처럼 거대한 빙하가 보일 뿐이었다.

“여긴 어디냐? 이 얼음덩이는 또 뭐고?”

“얼음덩이가 아닙니다. 여긴 전에 말씀드렸던 앙켈만입니다.”

“뭐, 이곳이?”

빙하 덩어리가 앙켈만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는 반.

그리고 반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임시 조치로 도시 전체를 얼려 놓았다는 헨리의 말을 그제야 기억해 냈다.

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이 빙하 덩어리가 앙켈만이라는 말에, 반은 아무 말 없이 꽁꽁 얼어 버린 도시로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진한 냉기 탓에 손바닥이 얼음장에 쩍쩍 달라붙었다.

하지만 반은 손을 떼지 않았다.

곧 손바닥 전체가 빨개지고 동상 특유의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은 손을 떼지 않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까짓 동상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향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반의 마음을 날카롭게 찢어 놓았기 때문이다.

“…….”

반은 그렇게 한참을 더 빙하에 손을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헨리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반의 슬픔을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반이 나지막이 물었다.

“헨리.”

“예.”

“이 야밤에 날 데리고 왔다는 건 역시 작별 인사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시민들이 좀비가 되었다더니……. 성녀님의 힘으로도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나?”

“엄밀히 말하자면 좀비는 아니었습니다. 좀비의 특성을 많이 닮긴 했지만 앙켈만의 시민들이 그렇게 된 까닭에는 아서스가 가진 신력의 영향이 컸습니다.”

“신력…… 신력이라…….”

반은 한동안 신력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리고 다시금 질문했다.

“그럼 아서스만 죽이면 앙켈만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냐?”

“그건…….”

반의 물음은 헨리로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로썬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확정된 것이 없었으니까.

헨리가 말끝을 흐리자 반은 더욱 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차오르는 슬픔을 애써 삼키며 초연한 척 대꾸했다.

“그래, 방법을 알았다면 네가 진즉에 손을 써 줬겠지.”

“……죄송합니다.”

“아니다. 죄송할 건 네가 아니라 아서스 그놈이지. 그래도 참 고맙군, 앙켈만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게 해 줘서.”

유라시아 제국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 왔던 해상왕국 앙켈만.

반은 그 앙켈만에서 나고 자란 유일한 소드 마스터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제국에 헌신해 앙켈만의 존재를 끝끝내 유지해 왔다.

그리고 그 역사는 헨리가 죽임을 당하고 권력을 잃으면서도 쭉 유지해 왔으며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제국이 들어서도 건재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자신의 고향 앙켈만을,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물론 헨리가 없애고자 하는 것은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좀비처럼 변한 시민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새로운 위협이 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앙켈만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앙켈만이 아닌 평범한 해상 도시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마을을 이루고 전통을 잇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힘이었으니까.

“하즈…….”

반의 얼굴이 더욱 더 침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반은 자신이 가장 미안함을 느끼고 사죄해야 될 존재, 하즈의 이름을 나직이 읊었다.

하즈.

헨리와 반에 의해 반평생을 앙켈만에 기거하며 성실하고 청렴한 공무원으로서 살아왔던 남자.

그리고 늘그막이 되어서야 그동안 쌓아 온 공로를 인정받아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된 남자.

그러나 그는 자신이 헌신한 세월에 비해 조족지혈 같은 풍요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단순히 아서스의 흥미 때문에.

결국 반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반은 헨리에게 자신의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눈물을 떨구었다.

그렇게 반은 한참동안이나 죽은 하즈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바닥을 적실만큼 눈물을 흘린 반이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헨리에게 물었다.

“헨리, 혹시 술 가진 것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반의 물음에, 헨리는 아공간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조용히 반의 곁에 두었다.

술병을 집어 드는 반.

반은 술병의 마개를 개봉한 후 그것을 몇 모금 들이켰다.

그런 다음, 얼어붙은 도시를 향해 술을 휘휘 뿌렸다.

금세 동이 나는 술.

술을 모두 비운 반은 조용히 술병을 빙하 앞에 세운 다음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신에게 기도했다.

신에게 기도하며 하즈에게 사죄했다.

동시에 복수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기도와 다짐이 끝나자 반은 고개를 돌려 강건해진 눈빛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헨리.”

“예.”

“부탁이 있다.”

“어떤 부탁 말씀이십니까?”

“너라면 이 도시 전체를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 수 있겠지?”

“……진심이십니까?”

“어차피 앙켈만의 모든 이들이 죽었다. 그렇게 됐으니 더 이상 이 도시는 앙켈만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그러니…….”

팡!

주먹을 움켜쥔 채 자신의 가슴을 내려치는 반.

“난 이 자리에서 앙켈만을 불태워 시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내 가슴에 앙켈만을 오롯이 묻어 두겠다.”

그것이 반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반이 죽은 시민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사죄라고 생각했다.

이에 헨리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의 말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참 반다운 생각이라고 헨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반의 선택을, 헨리는 존중해 주기로 했다.

“뒤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헨리는 반에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손을 모은 후 얼마간 주문을 영창했다.

이에 에메랄드 빛 마력이 헨리의 전신에 결집되며 빛을 뿌렸다.

그리고 마침내, 영창이 끝났을 무렵 헨리가 나직이 읊조렸다.

“……업화의 굴레.”

화르륵!

헨리가 업화의 굴레를 시전하자 곧 헨리의 오른손 전체가 푸른 불꽃으로 뒤덮였다.

이어서 헨리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런 다음 뜨고 있는 남은 눈으로 자신의 불붙은 손을 바라보며 눈앞의 얼어붙은 앙켈만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르륵!

헨리의 오른손에 감싸 쥐여진 앙켈만 전체에 지옥의 푸른 불꽃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화아악-!

업화의 굴레는 시전자가 지정한 모든 것들을 불태운 후에야 모습을 감춘다.

전형적인 지옥불의 특성이었다.

빙하에 불이 옮겨 붙자, 헨리는 그제야 손 붙은 불을 거두었다.

그리고 빙하 전체에 옮겨 붙은 업화의 굴레를, 반과 함께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서스, 네놈만큼은 절대로 죽이지 않고 평생을 속죄 속에 살게 해 주겠다!’

앙켈만을 얼린 빙하만큼이나 차갑고, 그 빙하를 녹일 만큼이나 뜨거운 분노가 뒤섞인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다짐은 반 또한 증오와 함께 굳건히 맹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