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
하늘이 무너져도 (2)
헨리는 헥터를 무슈에 데려다 준 후, 다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이번에 헨리가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세인트 홀’.
세인트 홀은 다행스럽게도 아서스의 화를 피해 간 곳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헨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계속된 사고로 인해 미루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앙켈만’의 회복을 위해서였다.
헨리는 세인트 홀 내부로 텔레포트하지 않고 성문 앞으로 텔레포트했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좀 더 특별한 법령, 즉 신성법이 적용되고 있는 곳이었기에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이 전복된 마당에 신성법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헨리가 그들에게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었으니까.
입국은 쉬웠다.
헨리는 세인트 홀에 입성하자마자 너구리 같은 로스 교황 대신 성녀 아이리네를 찾았다.
그편이 대화하기엔 더 편했으니까.
때마침 성녀는 기도를 올리고 있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윽고 자리가 마련된 후, 초췌한 헨리의 안색을 본 아이리네가 말했다.
“마법사님?”
“예?”
“잠시 저에게 손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헨리는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이리네는 헨리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화아악-!
그러자 따스한 빛이 그녀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와 헨리의 손을 타고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이것은 오직 교내에서도 성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초회복술이었다.
헨리는 순식간에 전신에 쌓인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한쪽에 밀어 두었던 화도, 스트레스도 모든 것들이 부드럽게 사그라듦을 느꼈다.
현재의 헨리로선 최고의 선물인 셈이었다.
치유를 받은 헨리가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뭐가요?”
“만약…… 제가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처음부터 평화교에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지금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참사요?”
헨리의 자조적인 말에 아이리네는 지금 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아직 성국에는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성녀님, 이곳은 다행스럽게도 아서스의 화가 비껴갔지만 다른 도시들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비껴가지 못했다니요? 그럼 다른 도시들은 지금……?”
“대부분이 멸망했습니다.”
“……!”
담담하게 비보들을 전하는 헨리의 말에 아이리네는 말없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려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헨리의 말이 계속되었다.
“수도 하이랜더를 포함해 비발디 타운, 아마리스 같은 동맹국들의 대다수가 궤멸되거나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무슈를 임시 기반으로 잡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 세상에…….”
헨리가 읊는 담담한 비보에 아이리네는 결국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원군 파병을 포기했다는 죄책감.
헨리의 말마따나, 처음부터 평화교가 다른 지역에 파견을 보내 주었다면 지금과 같은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는 과거 교황의 의견을 수용했다.
아니,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게 오히려 맞는 말일 것이다.
설마 큰일이야 있겠냐는, 안전 불감증 같은 생각 때문에 교황의 의견에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 사달이 났다.
그리고 그 사달은 지원 몇 번으로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담담하게 비보를 읊던 헨리는 왈칵 눈물을 쏟는 아이리네를 위로했다.
“울지 마십시오. 성녀님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어리석어 생긴 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성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돕겠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라도 맡겨 주세요!”
성녀는 진심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죄책감을 덜고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말을 내뱉으며 성녀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울었다.
헨리는 성녀가 모든 슬픔을 게워 낼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 뒤 그녀의 슬픔이 제법 잦아들었을 때쯤, 그제야 헨리가 말했다.
“성녀님, 그럼 우선 저와 함께 앙켈만으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헨리는 성녀에게 앙켈만으로의 동행을 부탁했다.
그런데 헨리의 입에서 앙켈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성녀가 눈물을 훔치며 다급히 말했다.
“앙켈만……!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앙켈만에…… 대해서 말입니까?”
“예, 정확히 말하자면 아서스에 관한 것입니다.”
아이리네 또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을 하려고 했다.
이에 헨리는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아이리네에게 제안했다.
“성녀님,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곳을 신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국 내에 제가 모르는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앙켈만에서 나누도록 하시죠.”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럼 교황님께 보고 드리고 오시는 것입니까?”
교황에게 보고.
본디 성녀는 교황의 허가가 있어야지만 이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그릇된 의견으로 죄책감을 얻게 된 성녀는 더 이상 교황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아니, 신뢰할 수 없다고 하기 보다는 맞지 않는 의견을 굳이 겉으로 드러내 불화를 조장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에 성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보고는 드리지 않을 거예요. 마법사님 정도라면 조용히 성국을 빠져나갈 수 있잖아요?”
듣던 중 반가운 말.
헨리는 그녀의 배려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출발할 터이니 제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헨리의 손을 잡는 아이리네.
이윽고 빛이 번쩍였다.
* * *
“여긴……?”
헨리와 함께 앙켈만에 도착한 아이리네는 앙켈만이 내려다보이는 허공으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그녀는 발아래에 깔린 거대한 빙산의 크기에, 그리고 빙산에 얼어붙어 있는 시민들에 입을 가리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헨리가 말했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제가 힘들어지니까요.”
헨리의 말에, 아이리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 빙산이 되어 버린 도시 위에 안착했다.
빙산은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얼음 속에 시간이 멈춘 도시와 사람인지 좀비인지 모를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뀨뀨뀨!
그때였다.
헨리에게 도시의 보존을 명령받은 엘라곤이 헨리가 다시 나타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날아와 헨리에게 달라붙었다.
엘라곤을 본 아이리네가 물었다.
“마법사님, 이 아이는……?”
“성녀님은 처음 보시겠군요. 이 아이의 이름은 엘라곤입니다. 사람은 아니고 최상급에 해당하는 정령입니다.”
“아아, 정령이었군요.”
엘라곤을 본 아이리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자 엘라곤이 그녀를 경계했다.
그러나 곧 그녀로부터 느껴지는 따뜻하고 성스러운 기운에 경계심을 풀고 천천히 다가갔다.
-뀨?
엘라곤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애정을 나누어 주는 듯한, 그런 모양새였다.
이에 아이리네는 엘라곤의 그러한 행동에 큰 귀여움을 느끼며 엘라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뀨뀨!
아이리네의 손을 붙잡은 엘라곤은 그녀에게 자신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말이다.
이에 엘라곤의 의도를 알아챈 아이리네는 엘라곤이 원하는 대로 잔뜩 칭찬해 주었다.
“네가 이곳을 지켜 주고 있었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뀨!
뿌듯함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엘라곤.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헨리가 물었다.
“성녀님, 그럼 어느 것부터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음, 우선은 마법사님의 말씀대로 앙켈만의 시민들이 언데드인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럼 지금 당장 도시 전체를 해동시키는 것은 좀 그렇고…… 일단은 시민 한 명 정도만 해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헨리와 아이리네는 좀비처럼 변해 버린 앙켈만의 시민들을 두고 수많은 추측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당장 가장 후보가 유력한 것은 역시나 ‘좀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슈의 병원을 비롯하여 앙켈만 시민들이 보여 준 행동은 영락없는 좀비 꼴이었으니까.
이에 헨리는 도시의 측면으로 이동한 다음 도시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시민 한 명을 얼음덩이째로 도려냈다.
도려낸 빙상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석을 연상케 했다.
헨리는 도려낸 빙상을 도시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린 후, 급속도로 해동시켰다.
츠즈즛-!
마력으로 만들어진 열기가 빙상 전체를 감싸 안으니 빠른 속도로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시민이 모습을 드러낼 때쯤, 급속으로 얼어 있던 시민의 몸체가 공기에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그억…….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
명백한 좀비의 것이었다.
이윽고 얼음이 모두 녹았다.
몸이 뻣뻣하게 얼어 있던 좀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부드러워지면서 점차적으로 큰소리를 냈다.
하지만.
“홀드.”
“……!”
헨리는 풀려난 좀비에게 홀드를 시전해 좀비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구속했다.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준비가 끝나자 아이리네는 턱 관절을 벌린 채 굳은 좀비에게 다가가 십자가를 그리며 외쳤다.
“여신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턴 언데드(Turn Undead).”
화아악-!
다시 되살아나선 안 될 죽은 자를 다시 원래 있는 곳으로 되돌리는 성법, 턴 언데드(Turn Undead).
턴 언데드가 발동되자 아이리네의 전신으로부터 신력이 개방되며 밝은 빛이 뿜어졌다.
만약 시민이 정말로 좀비가 되었다면 성법 턴 언데드에 의해 한 줌의 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사아아-!
그러나 바람이 모래를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밝게 빛나던 신력은 곧 사그라들었고 두 사람은 재가 아닌 여전히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쩡하다고?’
성녀의 신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좀비 상태의 시민에게 턴 언데드가 통하지 않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서스와 드라칸이 흑마술에 손을 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성녀급의 턴 언데드가 통하지 않는다면 눈앞의 시민은 흑마술 따위로 변질된 좀비가 아니란 말이 되었다.
‘그럼 대체?’
추측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아이리네가 의견을 냈다.
“혹시 마법 때문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아는 홀드 마법은 말 그대로 대상을 같은 자세로 고정시키는 건데, 만약 재가 되어야 할 대상이 마법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면…….”
“아,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성녀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홀드 마법의 원리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에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해제시켰다.
그런데 그 순간.
-그라아악!
마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좀비가 아이리네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