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새로운 탄생 (5)
헨리의 계획대로 황궁은 공식적인 연설 행사를 열어 아서스가 건재함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사에게 떨어진 척살령을 거두어들였으며, 대륙 정벌을 공식적으로 종료시켰다.
갑작스러운 아서스의 변심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아서스가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났음을 알린 덕택에 치솟던 물가가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륙을 품던 불안정한 민심 또한 천천히 잦아들어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헨리는 도시연합을 비롯한 기존의 연합군들에게도 현재의 아서스가 텐이 둔갑한 허수아비라는 것을 알려, 빠르게 민심과 물가가 안정화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헨리는 비로소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오직 아서스만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칼.”
아서스를 상대하기 위해 헨리가 가장 먼저 한 선택은 다름 아닌 스칼의 소환이었다.
헨리의 부름에, 반수반인의 형상을 한 교환의 정령, 두꺼비 스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아아! 이게 누구신가!
간만에 부르는 호출이었다.
스칼은 얼굴을 내밀자마자 재기에 성공한 오랜 친구에게 끊임없는 찬사를 보내주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잘 지냈고말고! 네 덕분에 이계 생활이 지루하지 않았어. 다 지켜 보고 있었거든!
“역시.”
스칼은 자연계가 아닌 이계의 정령.
그리고 이계에서 인간계 전체를 관람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므로 그동안 헨리가 보여준 행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지켜보았다.
그러니 헨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인 셈.
스칼이 말했다.
-아직 완전한 대마법사의 길은 멀었지만. 그래도 다시 대마법사의 자리를 꿰찬 것은 아주 축하할 일이지. 그래! 이번엔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았는가?
“아서스의 위치를 알고 싶다.”
-역시! 너라면 당연히 그걸 물을 줄 알았지. 하지만 말이야……. 마음 같아선 너에게 아서스의 위치를 말해 주고 싶지만, 놈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문제?”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헨리는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보였다.
인간계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스칼이 하지 못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같은 부정적인 단어는 별로 스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에 스칼이 말했다.
-그래, 마음 같아선 녀석의 위치를 제공해 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보통의 인간이 아니게 되어서 말이야.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녀석은 지금 감히 나 따위는 쳐다보지도 못 할 높은 분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그래서 녀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너에게 알려 줄 수 없게 됐어. 그분이 별로 원치 않아 하시거든.
헨리는 지금 스칼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스칼이 스스로를 ‘나 따위’라고 칭할 만큼 스칼에게 있어 높은 존재가 있던가?
그도 그런 것이 스칼은 자연계 정령들에게조차 간섭을 받지 않는 이계 소속의 특수 정령이었기 때문이다.
“그 높은 분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나?”
그러므로 다음 질문의 수순은 당연했다.
하지만 뻔한 질문에, 스칼은 고개를 내저으며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말했다.
-안 돼. 이건 그분의 허락을 맡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자칫 잘못했다간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거든.
“어이가 없군. 설사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네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어느 누가 너에게 그런 압박을 넣는단 말이야?”
-유추하려고도 하지 마. 아무튼 아서스와 관련해선 더 이상 네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어. 그러니 그와 관련된 질문을 제외하고 물어보라고.
이렇게 되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원래대로라면 스칼을 통해 현재 아서스가 있는 위치를 확보한 후, 그곳으로 군대를 보내 쓸어버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칼에게 아서스의 위치를 물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일이 아주 귀찮게 되었다.
‘씁.’
입맛이 썼다.
이에 한참을 고민하던 헨리는 바깥에 대기 중이던 로어를 불러들였다.
“로어.”
“예, 대마법사님.”
“전에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거, 알아 봤어?”
“갑자기 종적을 감춘 마법사 말씀이시죠?”
“그래.”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어찌 됐든 추려 낼 수 있었습니다.”
“누군데?”
“드라칸 로티크라고 인간학을 전공하던 마도사였습니다.”
“드라칸?”
드라칸.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와는 말을 거의 섞어 보지 않아 기억이 희미했다.
헨리는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아! 그, 키가 엄청 큰 놈!”
“그렇습니다.”
“그놈만 사라졌어? 다른 마법사들 중에 사라진 놈은 없고?”
“예, 대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신 조건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다른 마법사의 보조 없이 오롯이 혼자서 키메라를 창조해 내려면 적어도 5서클 정도의 역량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그가 마도사라는 전제 하에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조사한 놈들 중에 사라진 놈은 드라칸이 유일하고?”
“그렇습니다.”
전부터 마탑의 마법사들 중에 하나가 아서스와 내통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바쁘다 보니 그게 누군지 자세히 조사할 겨를이 없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아서스가 사라지면서 드디어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칸, 드라칸이라…….’
헨리는 드라칸의 외형을 떠올렸다.
길쭉한 키와 귀신 같은 얼굴, 그리고 긴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깊은 인상을 가진 놈이 아니다.
그래서 헨리가 대번에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고.
하지만 어찌됐든 지금으로썬 그 녀석이 아서스에게 붙어먹은 ‘배신자’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고 드라칸을 배신자로 의심하고 있기에, 최선책은 아니었지만 차선책으로 생각해둔 두 번째 방법을 스칼에게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스칼.”
-왜?
“아서스는 어쩔 수 없고. 그럼 5서클에 인간학을 전공한 ‘드라칸 로티크’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를 찾아줘.”
-5서클에 인간학을 전공한 마법사, 이름은 드라칸 로티크……. 좋아 그럼 대가는?
“일단 찾아보기나 해. 대가는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역시 자네야.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거든!
거래를 제안 받은 스칼은 곧바로 눈을 감고 인간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의 스캔 끝에 입모양을 둥글게 말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호오……!
감탄하는 스칼을 보며 헨리와 로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추적을 마친 스칼이 감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까 전에 분명히 달라는 대로 준다고 했지?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값이 좀 비싸질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게?”
-네가 찾는 드라칸이란 마법사, 녀석은 더 이상 한낱 마도사 따위가 아니야.
“……한번 자세히 말해 봐.”
스칼의 심상찮은 대답에, 헨리는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스칼이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확실하겠지? 두둑한 대가를 약속하겠다는 거.
“알겠으니까 얘기나 해 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더 이상 마도사가 아니라니? 설마 녀석이 아크 메이지로 각성이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
“그럼?”
-그 이상이다.
“……뭐?”
드라칸이 아서스의 총애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서스가 스칼의 행동까지 간섭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드라칸이 인간계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상, 드라칸에 대한 정보는 얼마든지 스칼이 열람 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스칼은 그러한 능력을 통해 현재 드라칸이 어떠한 경지에 오르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드라칸 그놈, 헨리 너와 똑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
헨리와 똑같은 경지.
그것은 곧 아크 메이지를 넘어선 7서클 대마법사의 경지를 일컬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5서클 마도사가, 현직 아크 메이지들도 넘지 못한 단계를 무슨 수로 뛰어넘는단 말인가?
이에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로어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교차했다.
“그 말, 사실이야?”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건가? 난 정보를 비싸게 팔아먹긴 해도 거짓 정보 같은 건 일절 취급 안 해.
헨리의 되물음에 스칼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팔짱을 껴보였다.
그렇다.
스칼의 말대로 스칼은 값을 후려치긴 해도 거짓 정보 같은 건 팔지 않는 정직한 장사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의 입가에 헛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 하하…… 7서클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륙 마법 역사상,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아크 메이지의 벽을 깨부수지 못했기에 로어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것이 헨리였다.
하지만 충격은 곧 또 다른 감정으로 변질되었다.
재미.
그리고 흥미로움.
자신을 제외한 최초의 7서클 마법사가 탄생했다는 말에 헨리는 자존심이 상한다기보다 오히려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되지…….”
확실히 인간학은 키메라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연금학과 쌍벽을 이루는 학문이었다.
그리고 드라칸은 순수 인간학만으로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인간학 전문 마법사.
그런 자가 연이은 7서클의 경지를 달성했다는 말은, 즉 여태껏 오롯이 키메라 연구에만 매달려 7서클의 경지를 이루어냈다는 말이었다.
이에 헨리는 그동안 만나 본 몇 종류의 키메라들을 떠올렸다.
다들 굉장한 수준의 키메라들이었다.
감히 인간이 만들어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뛰어난 기술력과 잔인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마법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작품들이었다.
이에 헨리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 드라칸의 위치는?”
-남부의 샬롯 고원에 있다.
“샬롯 고원?”
-그래, 샬롯 고원에 있다.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봐 헨리.
“음?”
-네가 물은 것은 드라칸의 위치뿐, 호기심이 있다면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는 게 어때?
헨리의 추가 질문에 스칼은 팔짱을 낀 채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이에 헨리는 순간 자신의 답답한 호기심을 갖고 흥정하는 스칼에게 강렬한 짜증을 느꼈다.
“스칼.”
-왜 그러지?
가라앉은 헨리의 목소리.
그 순간, 스칼 또한 미묘하게 변한 헨리의 기분을 눈치채고야 말았다.
“뭔가 잊고 있나 본데. 난 다시 마탑의 수장이 됐어. 그리고 내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너를 소환 금지 항목에 넣을 수 있게 됐지.”
-…….
“장사 계속 하고 싶지? 그럼 알아서 기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한두 번 정도야 스칼의 특성이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간만에 소환된 것 때문일까, 스칼은 지독한 수전노처럼 모든 정보에 대가를 요구하며 쩨쩨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결국, 잠자코 있던 헨리의 심기를 자극한 꼴이 되어 버렸다.
헨리의 경고에,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스칼이 두 손을 바르게 모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셨나 보군요.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
어색한 웃음.
이에 헨리가 관심 없다는 듯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샬롯 고원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놈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괴물들이 서로 살육전을 벌이고 있다.
“살육전? 사람이라도 해친다는 거야?”
-아니,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는데?
“……?”
직접 보질 못하니 스칼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칼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칼은 분명히 인간계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지만, 다시 말하면 지켜보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어낸 헨리는 허공에 손짓하여 스칼을 역소환시키려 했다.
그러자…….
-자, 잠깐!
“왜?”
-설마 이대로 끝?
“말했잖아. 장사 계속하고 싶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알아서 생각하라고 말이야.”
-…….
거래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 * *
두 개의 의자.
그것은 마치 왕좌를 연상케 했다.
왕과 여왕이 나란히 앉는, 그런 의자 말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서스와 백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드라칸이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키아아아!
두 사람의 귀에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으로 핏물이 치솟았다.
툭- 투르르…….
위아래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험상궂게 생긴, 마치 도깨비를 연상케 하는 여느 괴물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러한 머리를 베어낸 자는 여리여리한 소녀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소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신에 군데군데 털이 돋아나 있었고, 양손에는 기다란 손톱을 가진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긴 손톱을 가진 괴물이 도깨비의 수급을 잘라내고 허공에 울부짖으며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서른 개의 알에서 태어난 서른 마리의 괴물들.
모두 다 드라칸의 마력을 머금고 다시 태어난, 2차 진화를 거친 드라칸의 키메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수는 어느덧 아홉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저놈이 마지막인가?”
턱을 괴고 있던 드라칸이 손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던 키메라가 양 무릎을 바닥에 꿇음과 동시에 드라칸과 아서스를 향해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두 사람에 대한 완전한 복종의 표시였다.
이에 아서스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훌륭해. 서른 마리의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아홉 마리의 상급 키메라들. 아주 멋져. 아주 훌륭해.”
아서스는 연신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내 친히 너희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도록 하마.”
거친 생존 경쟁이 끝난 지금.
샬롯 고원에서 세 번째 진화가 시작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