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새로운 탄생 (4)
도망친 궁녀들에 의해 수도에 흉악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 황궁을 급습하여 폐하의 목숨을 노린다는, 그런 소문이 말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도망친 것은 궁녀들뿐만이 아니라 황궁을 지키던 근위병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황궁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궁녀와 근위병들 모두, 그러니까 황궁을 기습한 일인군단(一人軍團)과도 같은 기세의 헨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러나 공포보다 더 지독한 것이 바로 호기심이었고, 호기심보다 더 지독한 것이 바로 욕심이었다.
소문대로라면 현재 궁은 텅 비어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
그러므로 하이랜더의 뒷골목에 사는 하루살이 좀도둑들에게 텅 빈 황궁은 그야말로 주인없는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수도의 기습이 이루어진지 정확히 이틀째가 되던 날, 하이랜더의 황궁은 시궁쥐 같은 좀도둑들에게 아주 탐스러운 먹잇감이 되었다.
“갈 거야?”
“가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가뜩이나 전쟁 때문에 밥값도 오른 마당에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갈아치우려면 거기밖엔 답이 없어.”
하이랜더 뒷골목에 사는 열일곱 살 한스는 고아다.
그리고 그와 절친한 친구인 켐벨은 한스와 마찬가지로 고아인데다가 현직 도둑들로부터 꽤 쓸 만한 정보를 물어오곤 했다.
텅 빈 황궁의 보물.
그리고 그것이 지금 한스와 켐벨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했다.
물론 두 소년뿐만이 아니라 하이랜더에 사는 한탕주의자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다.
소문이 돈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몇 명의 도둑들이 황궁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자마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한스는 결심하고 말았다.
“가자, 켐벨! 어차피 이따위 인생을 사느니 죽느니만 못하잖아. 확실하게 당길 수 있을 때 확 당겨 놓자고.”
“무, 물론 그 정보는 내가 물어온 게 맞긴 한데…….”
대담한 한스와는 달리 켐벨은 겁쟁이였다.
그래서 한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겁먹은 고양이처럼 잔뜩 꼬리를 말았다.
그러나 한스의 말도 맞았다.
아서스가 일으킨 대륙 정벌 때문에 대륙의 어디를 가도 밥값이 폭등했고 그 흔한 옥수수 스프조차도 귀해서 못 먹는 판국이 되었다.
겁먹은 켐벨을 본 한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켐벨을 쏘아붙였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친구에게 지기 싫어 내뱉은, 오기 어린 대답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마침내 켐벨의 얼굴에도 확신이 차올랐다.
이에 한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계획을 꾸리려던 찰나.
“제국군이 돌아왔다!”
“뭐?”
제국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하이랜더 주민들의 입을 타고 두 소년에게까지 흘러들어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때아닌 호외에, 한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대륙 정벌에 나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국군이 돌아온단 말인가?
또 제국군들은 황궁이 기습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그러나 한스가 고민하든 말든 사람들은 귀환한 제국군을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오……!”
군의 선두에는, 킹턴이 개선장군처럼 말을 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페이실링 출신의 군단장들과 평화교의 군단장들이 행렬을 잇고 있었다.
모두들 근엄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근엄했기에 의아했다.
보통 군대가 귀환했을 때, 그들의 표정이나 행동에 따라 전쟁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분다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고 곳곳에 붕대를 매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면 그것은 전투에서 패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제국군에는 그 어떤 표정이나 행동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근엄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뭇 진중한 분위기, 덕택에 귀환한 제국군을 구경하는 시민들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의 행진을 숨죽이고 바라볼 뿐이었다.
“제기랄, 대체 뭐야?”
제국군 행렬을 구경하던 한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침묵의 행진.
물론 의도를 알 수 없는 답답한 행진 때문에 화가 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 밤 마침내 황궁을 털 결심이 섰는데, 그 타이밍에 제국군이 귀환한 탓이 컸다,
이에 켐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한스.”
“왜?”
“지금 시점에서 제국군이 황궁으로 귀환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게?”
켐벨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황궁이 기습당했다는 사실만을 들었을 뿐, 그 누구도 황제의 생사여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 * *
제국군의 마지막 병사가 황궁으로 들어갔고 황궁의 문이 굳게 닫혔다.
킹턴은 대기 중이던 병사들을 나누어 사라진 근위병들 대신해 황궁의 경계를 서게 했다.
제국군의 귀환은 순전히 헨리가 낸 아이디어였다.
어찌됐든 전쟁은 끝났고 수도에는 황궁이 피습을 당했다는 불길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 하루 빨리 민심을 진정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제국군 모두가 황궁에 진입했을 때, 킹턴은 텅 빈 황궁의 내부를 보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이거 미치겠군.”
불과 며칠 사이였지만 황궁 내부는 난장판 그 자체였다.
부서진 기둥, 파괴된 대리석 계단 등…… 고작해야 며칠 새에 폐허처럼 변해 버린 황궁 내부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알렌이 킹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개판이네요.”
“뭐, 뭐랏? 네놈! 입 조심하지 못할까! 아무리 제국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한들, 이곳은 감히 네놈 따위가 비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풉, 곧 죽어도 귀족 행세는…….”
“뭐라고?”
“왜? 불만이면 칼이라도 뽑든지.”
제국을 뭉치게 만든 황제가 사라졌으니 사실상 제국의 질서는 무너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런 것이 아이니아 제국의 신분이나 질서 같은 건 순전히 아서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서스가 사라지고 질서가 무너진 지금, 알렌은 더 이상 킹턴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었다.
“네놈……!”
이에 킹턴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헨리가 듣기에 현재까지 살아남은 제국 십검은 자신이 유일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켰다간 도리어 세력이 부족한 자신만 손해를 볼뿐이었다.
이에 킹턴은 몹시 분했지만 침착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해도, 수십 년 동안이나 갑의 위치로 살아왔던 킹턴이다.
그러니 그의 몸에 벤 고고한 습관 같은 건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알렌은 부들거리는 킹턴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후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
헨리가 준 호출권이었다.
그러자 곧 모두의 눈앞에 헨리를 포함한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들, 그리고 전 제국 십검과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텐이 텔레포트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대마법사님?”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알렌이 상냥한 얼굴로 헨리를 맞아주었다.
알렌이 킹턴에게 그랬던 것처럼 헨리를 무시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의 휘하에 바할드가 있다.
바할드는 알렌의 우상이었으니 당연히 바할드의 윗사람인 헨리를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이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들 말씀드린 대로 침묵을 유지한 채 황궁으로 입성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대륙 정벌의 결과를 유추할 수 없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마지막 병사 한 명까지도 굳게 입을 다문 채 모두 황궁으로 들였습니다.”
“좋군요. 그럼 이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가 바로 제가 추천한 새로운 황제, ‘텐’입니다.”
헨리는 텐을 소개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텐은 잔뜩 얼어 있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텐을 앞으로 떠밀었다.
이에 텐이 화들짝 놀라며 두 걸음 앞으로 나와 횡설수설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저, 저는 천만황금의 주인인! 아, 아, 아니지! 그…… 저, 저는…… 텐…… 이라고 합니다.”
과도한 긴장 덕택에 텐은 말을 잔뜩 더듬거렸다.
그리고 곧 그러한 긴장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감이 넘치고 유쾌하기 짝이 없는 평소의 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태껏 소소한 돈놀이나 헨리의 뒤치다꺼리만 해 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국의 황제가 되라는 것도 모자라, 눈앞에는 전 기사왕과 현 기사왕, 그리고 마탑의 아크 메이지들과 더불어 평화교의 거물들, 마지막으로 용병국의 거물들까지 한데 모여 있으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놈이 차기 황제라고?”
이에 가장 먼저 불만을 내뱉은 건 다름 아닌 킹턴이었다.
척 보기에도 왕이 되기엔 한없이 그릇이 작아 보이는 남자다.
그런 놈을 대륙 전역을 다스릴 새 제국의 차기 황제로 모시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이에 헨리가 여전히 부드럽게 휜 눈매를 유지한 채 킹턴에게 말했다.
“그래서?”
“……뭐?”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해. 계집애처럼 구시렁대지 말고.”
“무, 뭐,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계집애처럼 구시렁대지 말고 나한테 직접 얘기하라고.”
“……!”
헨리의 다그침에, 킹턴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헨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헨리는 킹턴이 어떤 식으로 쳐다보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킹턴, 뭔가 여전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확실하게 말해주는 건데, 아서스가 도망친 시점에서 네놈은 더 이상 귀족도 무엇도 아니야. 그러니 지금 가진 것들이나마 제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주제 파악을 하고 혓바닥을 놀리는 게 좋을 거야.”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헨리는 여태껏 마탑의 마법사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경어를 사용해 왔으니까.
그런 헨리가 갑작스럽게 킹턴을 깔아뭉갠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자리는 지금 텐을 소개하는 자리.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추천한 텐을 모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힘의 과시.
그리고 그러한 과시를 통해 텐에게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신뢰.
이 자리에서 현 기사왕이라고 일컬어지는 킹턴을, 세 치 혀로 짓뭉갤 수 있다는 걸 텐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말을 들은 킹턴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에 알렌과 맥도웰, 반이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었다.
이에 헨리가 고개를 홱 돌린 후 모두에게 말했다.
“할일이 참 많습니다. 비어 있는 황좌를 채웠다고 해서 삐걱거리던 행정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구멍투성이인 행정 체계를 바로잡기엔 시간이 너무나도 빠듯합니다. 그래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멀뚱하게 서 있던 텐의 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전신을 꼼꼼히 채울 정도로 눈부신 광명이었다.
그리고 광명이 잦아들었을 때쯤,
“……!”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텐이, 어느새 전 황제, 아서스 하이랜더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에 놀란 것은 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헨리는 놀란 텐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아서스와의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저는 텐을 거짓 아서스로 내세워 평소대로 행정을 돌보려고 합니다.”
“……하?”
헨리의 의견에, 책사 마실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이었다.
헨리의 말은 계속 됐다.
“궁녀들이 도망치고 난 뒤, 수도에 이상한 헛소문이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서스가 무사함을 보여 주고 민심을 잠재워야 합니다. 그리고 아서스와의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그때부터 제대로 된 제국을 만들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헨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학파장급 마법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전에 스승님을 도와 함께 정책을 만들던 이들이 바로 마탑의 마법사임은 아시겠지요? 그러니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들을 제외한 정치 쪽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들을 소집해 당분간은 새로운 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정책의 발의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 그동안 잉여 인재들을 허투루 놀리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이제부터 아서스가 기습으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마법사들에게 떨어진 척살령 등을 해제하기 위한 황제의 공식적인 연설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헨리는 텐의 나머지 어깨에도 손을 올렸다.
그러자 텐이 화들짝 놀라며 헨리를 바라보았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긴 건 좀 기분 나쁘긴 하지만……. 잘 할 수 있지?”
“무,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 그럼 지금부터 단기간에 황제가 되기 위한 속성 과외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고.”
“예, 예?”
오로지 텐을 위한, 헨리의 족집게 황제 과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