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허무 (3)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아냐, 저건 거짓이야……!”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그 반응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같았다.
영상은 곧 종료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새카만 하늘을 거두어들이지 않았고 곧 새로운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리고 영상 속에는 헨리가 있었다.
“모두들 들어라.”
영상 속의 헨리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현재 헨리 스스로가 직접 자신의 생각을 영상화시켜 모두에게 송출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이름은 헨리 모리스, 죽은 대마법사의 유일한 수제자이며 오래 전부터 아서스를 뒤쫓아 온 사람이기도 하다.”
헨리는 모두의 이목이 모이고 모두가 혼란에 빠진 이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람의 힘을 빌려 거대하게 띄워진 환술 영상 속에 자신을 투영해 내 하고 싶은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너희들의 황제는 도망쳤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이 알던 아이니아 제국은 없다.”
좀 전의 영상을 보았기에 지금 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서스의 도망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도망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아서스가 가진 것을 버리고 떠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 하지 마라! 마법사!”
고함을 친 것은 다름 아닌 로거였다.
로거는 분노로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헨리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분노한 까닭은 간단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서스가 도망친 것을 인정해 버리면, 자신이 모시는 교황이, 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교황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단 걸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영상 속의 헨리가 고개를 돌려 로거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키메라라니! 네놈은 지금 우리 평화교가, 찢어죽일 흑마술사들이나 다루는 키메라를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로거가 분노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평화교는 예로부터 마족과 흑마술사들의 멸족을 몸소 실천해 온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런 평화교가, 그것도 평화교의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황이, 키메라 따위에 손을 댄 황제와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헨리가 흥분하는 로거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팔라딘 로거.”
“뭐……?”
점잖게 자신을 꾸짖는 태도에, 로거는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앞에 펼쳐진, 오로라처럼 거대한 헨리의 얼굴은, 마치 신이 직접 자신에게 훈계를 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헨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로거, 못 본 사이에 양심이 많이 탁해진 것 같군. 그렇다면 너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이 행동들이 네가 모시는 신 앞에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말할 수 없다.
교황의 편의에 의해 평화교가 아서스와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그리고 그런 교황의 명령에 따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지켜 온 신념을 굽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에 헨리는 말없이 고개를 떨군 로거를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입이 있다면 대답하라, 로거. 너의 성법은 인간들의 전쟁에나 사용되라고 신께서 내려 준 것인가?”
“……아, 아니다.”
“그럼? 너의 간사한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 준 것인가?”
“아, 아니다……!”
로거는 괴로워했다.
그래서 더더욱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다.
헨리에게서 느꼈던 무력감, 그것은 무력감이 아닌 그동안 외면해 왔던 그가 가진 양심의 무게였던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시뻘게진 얼굴을 한 로거를 보며 헨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기로 했다.
대신 로거를 본보기로 일벌백계한 제국군의 다른 군단장들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제국이라 여겼던 나라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 그러니 너희들은 모셔야 할 주군을 잃었으며 동시에 더 이상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할 이유 또한 사라졌다.”
헨리는 짧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 이래도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 갈 생각이더냐?”
“…….”
헨리의 통렬한 비판에, 다섯 군단장과 성녀, 그리고 십이사도와 책사 마실라까지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다.
전쟁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 * *
병사들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섯 군단장들 또한 검을 집어넣고 말 머리를 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방 성의 병사가 소리쳤다.
“제국군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끝이다……!”
한 병사의 외침에, 이내 모두의 긴장이 탁하고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병사들은 도미노처럼 쓰러졌으며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바보처럼 헤실거렸다.
“흐흐흐……!”
“막긴 막았네……!”
“살았어……. 다행이야…….”
짧은 전투였지만 그만큼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이에 지휘관들 또한 병사들이 충분히 긴장을 회복할 수 있게끔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헨리는 연합군 간부들 전체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 * *
제방 궁의 회장 내부.
이내 군단장 모두가 원탁에 둘러앉자 맥도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리다니.”
맥도웰은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맥도웰은 느려터진 로거를 상대로 꽤나 재미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헬라나 반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큭큭큭.”
“아쉬워, 그 목석 같은 남자를 짓이겨 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불호령이 백번은 떨어졌을 말이었지만, 군단장들쯤 되는 실력자들이라면 진심으로 아쉬워할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연합군 측에선 ‘알렌’이 그러했다.
그는 진심으로 바할드와 맞붙어 보기를 원했으니까.
이윽고 헤라리온이 들뜬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하하, 다들 살벌한 농담은 이쯤해 두시고……. 그럼 이쯤에서 한번 되짚어 보도록 하죠. 대마법사님, 좀 전에 비람의 환술을 통해 보여 주신 것들. 그게 전부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서스가 그러리란 것은…… 헤라리온 전하께서도 얼추 예상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까?”
애초에 아서스의 절멸을 위해 헨리와 손을 잡은 이가 바로 헤라리온이었다.
그러니 헨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믿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헤라리온이 헨리가 본 것을 되짚는 이유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헨리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게 됐군요. 그럼 처음에 약속드렸던 대로 각 나라의 완전한 자주권을 보장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저와 개인적인 약속을 하신 분들 또한 순차적으로 약속을 이행토록 하겠습니다.”
깔끔한 정리였다.
애초에 아이니아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조직된 것이 연합군이었다.
그러니 아서스가 사라지고 제국군의 적대감이 해소된 지금, 더 이상 연합국을 유지시킬 이유가 사라졌다.
헨리의 깔끔한 정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불만을 표시할 만한 부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물 찌꺼기가 입안에 남은 것처럼 모두들 찝찝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헬라였다.
“아…… 이거 참 찝찝하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냥 뭐랄까, 일해 주기로 해 놓고 돈만 받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 물론 우리 쪽 전사들이 아예 죽지 않은 게 아니라 일을 안 한 건 아니긴 한데……. 아무튼 좀 그래.”
헬라가 말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라리온도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 저도 여제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게다가 소레국과 두스카인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종결된 터라……. 물론 저는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지만 헬라 여제님과 마찬가지로 뭔가 말끔한 기분은 들지 않는군요.”
헤라리온의 입장은 이해가 됐다.
애초에 헤라리온은 아서스에 대한 복수 때문에 손을 잡은 것이었으니까.
이에 헨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도올이나 태제의 의견을 들어 보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조성되기 시작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들 의리는 있네. 그럼 이렇게 되면 다들 2차전에 합류하겠군.’
뻔한 결과.
그것은 곧 이루어질 아서스 사냥의 참전을 뜻했다.
솔직히 말해서 헨리는 연합국과의 관계가 정리되면 빠른 시일 내에 마법사들과 함께 이동중인 키메라 군단의 사냥에 나서려고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서스는 키메라 군단과 함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을 테니까.
자신은 있었다.
아직 힘이 파악되지 않은 아서스라면 몰라도, 블랙 미스릴을 섞어 만든 키메라 형제인 핌과 림을 마력만으로 찍어 누를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기동력 문제 때문에라도 헨리는 마법사들과 함께 이동할 참이었다.
예컨대 이것은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키메라 군단을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다.
키메라 군단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와중에 기존의 연합군들이 헨리를 도와준다면 일처리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연합군 수장들의 뜻을 파악한 헨리는 터뜨린 웃음을 곧바로 부드러운 미소로 포장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네요. 역시 여제님이십니다. 그리고 헤라리온 전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도올 님께선…….”
아직 도올은 그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노년의 지혜 덕분이었다.
헨리가 도올에게 말했다.
“아니, 제방은 굳이 함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수를 앞두고 있는 헤너른 평야를 뒤집어엎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배려, 굳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권리인 걸요. 대신 도올 님께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도올 님께 드렸던 약속, 혹시 아서스에 관한 일을 모두 끝낸 후에 이루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
도올과 맺었던 약속.
그것은 전쟁이 끝나는 즉시 자신을 동대륙으로 이주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도올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도올을 동대륙으로 이주시켜 준 후 아서스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대륙은 헨리조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
그렇기 때문에 텔레포트를 사용하고 싶어도 동대륙에 대한 마땅한 좌표라든가, 관련된 좌표 계산법이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차하면 배를 타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1분 1초가 급한 지금, 번거로운 일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도올 님.”
그리고 도올은 헨리의 부탁을 승낙해 주었다.
이로써 아마리스와 샤하트라, 그리고 무력으로 굴복시킨 두스카인까지 일단은 확보해 둔 셈이었다.
“그럼 이제…….”
두스카인과 소레국의 병사들은 곧 합류할 터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설득이랄 것까진 없지만 태제 또한 헨리의 부탁을 부담 없이 들어 줄 것이다.
그렇기에 헨리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두스카인이나 소레국 따위가 아니었다.
이윽고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형님들, 저랑 같이 어디에 좀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디를?”
“요 앞의 제국군 막사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아!”
“크크큭, 미친놈.”
가벼운 제안.
그리고 반과 맥도웰은 헨리가 무슨 뜻으로 그런 제안을 하는 건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