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허무 (2)
제방에는 여전히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배정받은 방향을 맡은 군단장들은 서로 성을 지키거나 함락시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다.
츠팟!
그리고 그 위로 헨리가 나타났다.
헨리는 여전히 뒤엉켜 있는 연합군과 제국군들을 보았다.
미안했다.
자신만만하게 아서스의 목을 베어 오겠노라 호언장담했거늘, 헨리는 부끄럽게도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헨리는 블링크를 시전했다.
좌표는 포격탑의 정중앙, 위즈덤이 박혀 있는 곳이었다.
헨리가 포격탑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위즈덤 곁을 지키던 로어가 잔뜩 밝아진 표정으로 헨리를 맞이했다.
“대마법사님!”
“미안하다, 로어. 임무에 실패했다.”
“예?”
헨리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
아서스의 목도 베어 오지 못한 마당에 같잖은 이유나 대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자세한 건 전쟁을 끝낸 후에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모든 아크 메이지들은 나를 따르도록.”
명령과 동시에 헨리는 위즈덤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
“음?”
허공으로 날아오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헨리를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목소리고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헥터가 있었다.
“헥터?”
“헨리!”
헥터는 감격에 찬 얼굴을 하고서 헨리에게로 날아왔다.
그리고 영체 상태의 헥터를 본 로어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헨리가 손을 들어 아군임을 알렸다.
“헨리! 이 개자식아!”
헥터는 헨리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주먹질과 함께 욕설부터 내뱉었다.
그러나 헥터의 주먹은 헨리의 머리를 통과했고 욕설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헥터가 내뱉은 것은 단순한 욕설이 아닌 울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에 없던 마법 결계들은 분명히 마법사들의 작품일 터.
그리고 그러한 아이디어는 분명히 상부의 명령이 없으면 쉬이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헥터는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그 빌어먹을 마법 결계의 책임자가 헨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헨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헥터,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이 자식아! 그 망할 놈의 마법 결계 때문에 며칠이나 대륙을 누볐는지 알아?”
“마법 결계? ……아!”
“‘아!’는 이놈의 자식이! 무튼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분풀이는 이따가 하기로 하고! 너에게 급히 전해 줄 말이 있다.”
“급한 거야?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왜?”
“지금 전쟁 중이거든.”
“그건 나도 알아 자식아! 그보다 너, 발락이라고 아냐?”
“발락? 당연히 알지.”
“그놈이 지금 수도를 거쳐서 살게라로 오고 있어!”
“……그래?”
현재 발락은 헨리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두스카인에서 초완족을 제패하고 이쪽으로 진군하는 중이었다.
이에 헨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호들갑을 떠는 헥터를 바라보았다.
헥터가 이어서 말했다.
“발락 알지? 그 무지막지한 놈. 내가 그놈한테 당했다니까? 그래서 네가 만들어 준 갑옷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는데……. 아무튼 그놈이 지금 살게라로 진군하고 있어. 그리고 녀석한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오해 때문에 녀석은 지금 살게라에 마법사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헥터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헨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헥터의 정보를 들으면 들을수록 헨리는 한숨 말고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헥터.”
“왜?”
“정보 전달은 고마운데. 네가 걱정하는 발락, 지금은 내 휘하에 있어.”
“뭐?”
“네가 들은 그대로야. 네가 자리에 없는 동안 난 발락을 내 부하로 포섭하는데 성공했고, 좀 전에는 아서스를 죽이기 위해 하이랜더에 다녀오는 길이야.”
“뭐, 뭐라고?”
헥터는 진심으로 놀랐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헨리는 헥터가 놓치고 있는 정보들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헨리의 설명을 듣던 중 헥터가 헨리의 말허리를 자르며 황급히 말했다.
“자, 잠깐! 그럼 아서스 그놈이 킬라이브에 키메라 군단을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
“키메라 군단?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드디어 네가 모르는 정보가 나타났군. 잘 들어, 난 빌어먹을 마법 결계 때문에 살게라까지 갔다가 북방을 헤맨 적이 있어. 그러던 중 우연찮게 킬라이브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거기 숨어 있는 열여섯 살짜리 베이브라는 소년한테 이 이야기를 들었어.”
드디어 헨리가 모르는 정보가 생겼다는 말에 헥터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헨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윽고 헥터의 말을 듣던 헨리는 생각했다.
‘킬라이브에서 인체 실험이?’
확실히 아서스가 발락을 포섭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킬라이브에 남은 죄수들을 어찌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킬라이브를 주축으로 주변 마을들을 급습하고 있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말이다.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헥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현재에도 아서스의 흑마법사는 키메라 군단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서스 이놈이……!’
이에 헨리는 솟아오르는 분노로 뒷목이 시큰해졌다.
기껏 제국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헨리의 등장을 이유로 가볍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헨리는 아서스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서스 그놈은 처음부터 통일된 대륙이나 제국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강성한 제국이나 통일된 대륙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끼리 싸울 필요가 없잖아?’
헨리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서스가 수도를 버리고 떠난 상황이다.
말인즉슨,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사라진 이상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연합군과 칼을 뒤섞고 있는 제국군들 또한 모시는 주군을 잃게 되었으니 더 이상 서로에게 칼을 겨눌 이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였다.
헨리는 고개를 돌렸다.
성벽 아래에는 여전히 수많은 병사들이 서로에게 눈 먼 칼을 겨누며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헨리가 비록 이 싸움의 진실을 깨닫긴 하였으나 지금 같은 전쟁 통에 헨리가 진실을 외친다 하더라도 헨리의 말을 귀담아 들을 사람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헨리는 고뇌에 빠졌다.
그러나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지금 여기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순전히 아서스의 농간과 헨리의 필요에 의해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한참의 고민 끝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적절한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방법을 떠올린 헨리는 즉시 블링크를 시전했다.
* * *
아난다와 헬라.
킹턴과 로난.
알렌과 바할드.
로거와 맥도웰.
워커와 반.
전투는 계속되었다.
서로 칼을 겨눈 병사들은 연신 죽어 나갔고 우두머리들이 검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군단장들은 병사들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평화교의 대수도승이라더니! 고작해야 이게 전부인 거야?”
“이 망할 창녀가!”
헬라는 스네이크 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이에 대수도승 아난다는, 수도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쭉한 욕설과 함께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로거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거는 연신 여러 개의 성법을 온몸에 두르며 맥도웰을 뒤쫓았지만, 작정하고 속도전을 펼치는 맥도웰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콰과과과!
반대편에선 오러의 줄기가 끊임없이 내뿜어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워커와 반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오러를 늘였다가 줄이기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기량을 자랑했다.
또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곳도 있었다.
바로 알렌과 바할드의 방향이었다.
알렌은 자신의 우상이라고 여겼던 바할드에게 어떻게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쉴 새 없이 마검을 휘둘렀다.
지칠 줄을 모르는 전투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열기가 과열될 무렵, 전장을 뒤덮은 푸르른 하늘로부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다 주모오옥!”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헨리였다.
메아리칠 만한 산이나 지형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헨리에게로 몰렸다.
수십만의 시선들.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시선의 숫자가 몇 개든 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데 모은 시선들을 향해, 세상의 지혜라고 불리는 위즈덤을 높이 치켜들었다.
“링크!”
그리고 헨리는 외쳤다.
마법사들 간의 정신을 연결시키는 마법, 링크를 말이다.
‘링크’는 마법사들끼리 마법이나 마력을 공유할 때 사용하는 마법으로,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이룬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의 마법을 구사할 때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이윽고 헨리가 링크를 시전한 순간, 헨리의 두 눈에 새하얀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위즈덤이 몸을 부르르 떨며 헨리의 마력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헨리의 전신으로부터 에메랄드 빛 마력이 뿜어졌다.
그것은 마치 파도를 연상케 했다.
그만큼 뿜어진 마력의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뿜어진 마력은 이윽고 푸르른 하늘을 뒤덮었다.
하늘은 점점 더 새카맣게 변했다.
마치 우주처럼 새카맣게 변한 하늘은, 마침내 하늘뿐만이 아니라 연합군과 제국군이 딯고 있는 땅 전체를 검게 만들었다.
별은 없었다.
말 그대로 새카만 어둠뿐인 풍경.
이에 검을 휘두르던 모두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뭐하는…… 거야?”
연합국의 군단장들은 헨리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성탑에서 헨리를 바라보는 성녀와 십이사도, 책사 마실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법이, 성법이 먹히질 않아요……!”
성녀 아이리네는 이것이 혹시라도 헨리의 술수일까 싶어 급하게 저항 성법을 펼쳤으나, 애석하게도 헨리가 시전한 것은 성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두 손 놓고 가만히 헨리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제방의 사위 전체가 시커먼 어둠으로 물들었을 때, 헨리는 다시 한 번 마력을 폭발시켜 냈다.
그리고…….
“……!”
“저, 저건……!”
새카만 어둠 속, 그 안에 아서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서스의 맞은편에는 헨리가 있었다.
‘됐어!’
헨리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
그것은 다름 아닌 비람이 자신에게 ‘샤하트라의 역사’를 가르쳐 줄 때 사용했던 환술 교보재였다.
훌륭한 응용법이었다.
환술로 빚어 낸 영상은, 시전자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
물론 헨리에겐 그만한 환술을 빚어 낼 만한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보유한 마력은 많았다.
그리고 반대로, 대제사장 비람에겐 모두에게 헨리의 기억을 보여 줄 만한 환술 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한 스케일의 환술을 부릴 만한 마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헨리는 서로의 능력을 공유하는 마법, ‘링크’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윽고 헨리의 마력을 바탕으로 비람의 도움과 함께 어우러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은 헨리의 기억이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헨리는 최대한 모두가 이해하기 편하게 기억을 편집했다.
물론 일반인이라든가 마도사급 이하의 마법사라면 미친 듯이 힘들 일일 테지만, 대륙 유일의 대마법사이자 7서클의 헨리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헨리는 자신이 죽은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것부터 시작해, 전쟁이 이루어지는 중에 수도의 황궁을 급습한 것, 그리고 궁 내부의 사람들을 내보낸 것과 아서스의 키메라였던 핌과 림의 대결 등,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보여 주었다.
영상은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재생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서스가 헨리에게 작별 인사를 남겨 두고 모습을 감추었을 때, 영상이 중지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모두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서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