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격돌 (2)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십이사도들 중 하나인 엘이 아이리네를 부축했다.
그러나 아이리네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입가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 내며 눈망울에 총기를 띠우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사도님들께선 다음 성법을 준비해 주세요.”
성녀는 강인하고 고결해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만인의 모범이 될 테니까.
그것은 성녀가 자신이 성녀로 선택받던 날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에 십이사도들은 짐짓 감동한 눈빛으로 다음 성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성법의 준비를 시작할 무렵, 토성의 최상층, 그리고 최상층 중에서도 중심부에 만들어진 ‘보호갑’ 속에서 책사, 마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7서클 대마법사는 다르다 이건가?’
용병왕 알렌의 책사, 마실라가 성탑의 최상층에 있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녀는 군단장들 중 최고 두뇌를 가진 지략가로서, 전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극악무도한 서먼 메테오도 성녀의 성법에 가로막혔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승산이 있다!’
성법을 먼저 펼치게 한 것은 그녀의 지략이었다.
왜냐면 적군이 전투에 도움이 될 성법을 펼치고 있는데 마법사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멋지게 적중했다.
물론 헨리가 직접 나설 것이란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대마법사의 힘을 가늠해 볼 수 있었으니 제국군으로선 크나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헨리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되었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판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를 시작하세요!”
마실라가 한참 머리를 굴리던 찰나, 성녀 아이리네가 다음 성법을 시작했다.
그녀가 사용할 다음 성법은 제국군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활력을 심어 주는 성법이었다.
그리고 세간에선 이것을 흔히 ‘전장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수호와 축복.
이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태양 사제단이 지속시킬 대표적인 성법들이었다.
성녀와 십이사도가 새로운 축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곧 성탑 전체에 다시금 광명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헨리 또한 텔레파시로 로어에게 명령했다.
-마탑도 슬슬 주문진을 가동해.
-예, 대마법사님.
텔레파시.
오로지 정신력으로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고위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된 권능이었다.
헨리가 명령을 내리자 로어가 곧 헨리의 명령을 지원탑에 전달했다.
“지원탑은 결계를 강화하라.”
“예!”
둥글게 지어진 제방의 성.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올이 지내는 제방의 궁이 있었는데 헨리는 궁 내부에 세 개의 탑을 건설했다.
물론 마법으로 지어진 탑이니만큼 그 크기는 단연코 제국군의 성탑보다 훨씬 더 높았다.
헨리는 그것들을 일컬어 삼각탑이라고 불렀다.
삼각탑은 총 세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순서대로 마법 포격만을 위한 포격탑과 각종 마법 지원을 맡아 줄 지원탑, 그리고 환술사들로만 이루어진 환술탑이 있었다.
개중에 지원탑은 제방 전체에 마법 결계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가장 많은 아크 메이지들과 부하 마법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윽고 헨리가 명령을 내리자 지원탑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합장을 시작했다.
우우웅……!
수백 명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합장을 시작하자 이윽고 지원탑 전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공명된 지원탑은 성법과는 달리 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으며 옅은 파도가 휘몰아치듯, 제방 전체에 보이지 않는 결계를 강화했다.
결계가 강화된 걸 확인한 로어는 이어서 포격탑에도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포격을 실시한다. 전군, 좌표 준비.”
“준비!”
포격탑은 지원탑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하지만 보조가 아닌 단순한 파괴만을 위해 조직된 모임이었으므로 지원탑에 비해 구동이 쉽고 효율이 좋았다.
이윽고 사대원소학을 전공한 마법사들이 각자가 전공한 원소학에 따른 파괴 마법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웅!
무릇 보호나 복구보다 쉬운 것이 바로 파괴와 살육이다.
그러므로 포진된 마법사의 수는 적었지만 포격탑으 마력 공명은 지원탑의 몇 배나 되었다.
곧 포격탑 위로 수많은 마법진들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듯이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도 기도를 시작한다!”
소리를 외친 것은 평화교의 성기사단장인 로거였다.
로거는 휘하에 집결된 성기사들에게 성법을 외울 것을 명령했다.
성기사들의 성법.
그것은 스스로의 육신과 무구를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크게는 두려움을 덜어 주고 용기를 샘솟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준비하라.”
그리고 그것은 수도승들의 수장, 아난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난다는 휘하의 몽크들에게 육체를 강화시켜 주는 강화 성법을 명령했다.
양측에 각 군 특유의 신비로운 기운들이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이에 킹턴은 전투를 준비하는 평화교의 태양 전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준비는 끝났다.
비록 제국군 병사들은 강행군으로 인한 여독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그것은 성녀의 치유술로 모두 해결했다. 그렇기 때문에 토성 또한 쌓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므로 킹턴은 여세를 몰아 단숨에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제아무리 성녀의 치유술이 뛰어나다고 한들, 그것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에 킹턴이 부관에게 턱짓을 하자 부관이 병사들에게 진격 명령을 전했다. 그리고…….
부우우우!
진군을 알리는 제국군의 뿔 나팔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구!
뿔 나팔 소리가 드높여지자 막사에 뭉쳐 있던 제국군 병사들이 명령받은 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10만 대군은 총 5개의 군단으로 나뉘어졌다.
마실라는 이를 5방향 전법이라고 명명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둥글게 지어진 제방의 성을 다섯 갈래로 포위하여 한꺼번에 압박하겠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군단은 곧 5방향이라는 이름 또한 가지게 되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헤너른 평야는 이윽고 10만 제국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움직임은 엄청난 진동들을 만들어 냈다.
“발사!”
그러나 제국군 병사들의 이동을 한가로이 보고만 있을 헨리가 아니었다.
헨리는 제국군이 이동하자마자 곧바로 대기시켜 두었던 마법진들을 일시에 발동시켰다.
콰과과광!
숱한 마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작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쏟아진 마법들 대부분이 거대한 굉음을 만들어 내며 대기를 찢어 놓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포격탑의 마법이 제국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성탑의 꼭대기에 있는 성녀가 이를 악물고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됐군.’
화살이 쏟아지고 마법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제국군은, 애초에 계획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각자 주어진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군했다.
5방향을 맡은 5군단은 다음과 같았다.
1군단임과 동시에 11시 방향을 맡은 대수도승, 아난다.
2군단임과 동시에 1시 방향을 맡은 총사령관 킹턴.
3군단임과 동시에 4시 방향을 맡은 용병왕 알렌.
4군단임과 동시에 6시 방향을 맡은 성기사단장 로거.
마지막으로 5군단임과 동시에 8시 방향을 맡은 창술의 대가, 워커.
다섯 개의 군단은 책사 마실라의 계획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동은 곧, 헨리의 눈에도 띄어 그들이 어떠한 전략을 구사하려는지 대번에 알 수 있게 했다.
‘2만 명씩 다섯 부대로 나누었군.’
성의 모양이 둥그니 제방 자체를 포위할 것이란 건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포위망을 좁혀 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두어 연합국 병력들을 미리 배분해 두었다.
그리고 지금.
공중에서 제국군의 병력 분배를 확인한 헨리는 즉시 허공에 마력포를 쏘아 올렸다.
피이잉, 파방!
쏘아 올라간 마력포는 이내 거대한 폭음을 내며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이는 제국군의 병력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졌으니, 흩어진 연합군의 병력 또한 즉시 다섯 개 군단으로 나뉘어 위치를 사수하라는 뜻이었다.
‘다섯 개!’
마력포의 암호를 본 각 군의 군단장들은 즉시 성벽 위의 병력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헨리는 효율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기 위해 성의 외곽에 5천 명씩, 총 열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두었다.
그리고 헨리가 다섯 갈래를 의미하는 축포를 쏘아 올리자 5천 명씩 나누어져 있던 병력들이 1만 단위로 뭉치며 금방 5개의 군단을 형성해 냈다.
물론 5개 군단에 대한 지휘관 선정도 미리 끝내 두었다.
콰광! 콰과과광!
수많은 마법 포격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쏟아지는 양에 비해 화력은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낮은 서클의 마법이 모인다고 한들 7서클의 효력을 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헨리는 각자 짝이 맞추어지는 전투 양상을 확인한 후, 로어가 있는 곳으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로어.”
“예, 대마법사님.”
“내가 지시한 걸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불규칙적으로 마법 포격을 보내야지만 놈들이 나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해.”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아, 너만 믿겠다.”
헨리가 해 줄 수 있는 준비는 이것으로 모두 끝났다.
이제부터 헨리는 일전의 수뇌부 회의에서 말했던 대로 제국의 수도, 하이랜더로 텔레포트 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헨리는 하이랜더로 향하는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하기 전에, 로어가 서 있는 포격탑 위에서 오른손을 쭉 뻗었다.
그리고 나직막이 속삭였다.
“위즈덤!”
지이이잉!
주인의 부름에 세상의 지혜가 응답했다.
헨리가 위즈덤을 소환하자 곧 헨리의 손아귀에 마력의 보고, 위즈덤이 소환되었다.
헨리는 소환된 위즈덤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리고…….
쿠드득!
소환한 위즈덤을, 포격탑의 정중앙에 거세게 박아 넣었다.
이윽고 헨리는 위즈덤으로부터 손을 뗐다. 그러자 위즈덤이 나무뿌리처럼 포격탑에 단단히 박히게 되었다.
“위즈덤, 부탁하마.”
포격탑에 뿌리를 내린 위즈덤에게, 헨리는 나직이 마력의 공급을 부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규칙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숱한 마법 포격을 쏟아붓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대마법사 다운 넓은 아량으로 선뜻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 중에 하나인 위즈덤의 마력을 개방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파아아앗!
위즈덤이 개방되자 곧 포격탑 전체에 마력이 충만해졌다.
물론 제아무리 위즈덤이 마력의 보고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위즈덤의 마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헨리의 아량이 넓다고 한들, 위즈덤에 담긴 마력 전체를 마법 포격에 퍼 줄 생각도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상 동력이었다.
헨리는 포격탑 전체에 위즈덤의 마력이 공급되는 걸 확인한 후에야 최종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됐어.’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났다.
헨리는 마지막으로 로어와 눈빛을 교환한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텔레포트.”
헨리는 하이랜더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아서스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