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꼬리잡기 (10)
‘왔군!’
장막이 생기며 일어나는 진동이 이리도 거대한데 잠에서 깨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헨리는 장막 전체를 울리는 강렬한 파괴력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부우웅!
어둠 속을 가르는 작고 푸른 유성.
벽에 날아와 부딪힌 검은 형벌이 다시금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검은 형벌이 몸을 부딪치고 간 자리에는 마치 혜성이라도 떨어진 듯 엄청난 크기의 크레이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누구냐?”
사위를 가르는 나지막한 물음.
발락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하지만 그 침착함 속에 녹아 있는 날카로움은 그 어떤 날붙이보다도 예리했다.
그러나 헨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마치 풀뿌리를 뽑아내듯 거세게 위로 젖혀 올렸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지상으로 솟구치던 철의 장막이 한층 더 빨라진 속도로, 그리고 한층 더 두꺼워진 몸체를 땅 밖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쯧.”
발락이 인상을 구겼다.
이것은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발락은 살기를 끌어올렸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고 있는 이 상황.
그렇기 때문에 발락은 상대가 필시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대륙 전체에 마법사 척살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머리가 돌지 않은 이상, 결단코 행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발락은 벗어 놓았던 갑옷을 재빨리 착용했다.
그가 쓴 삼각뿔이 돋아난 투구 사이로 넘쳐나는 살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졌다.
좀 전에는 가벼운 경고를 목적으로 검은 형벌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이제는 무장을 완전히 끝냈고, 가벼운 경고도 마쳤으니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었다.
“흐읍!”
발락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흉부가 확장되며 근육이 팽창하였다.
‘천지분쇄!’
콰아앙!
결전기 천지분쇄.
발락의 검은 형벌에 오러가 응집되며 지축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쾅! 쾅! 콰앙!
천지분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발락은 드럼을 치듯 계속해서 땅을 후려쳤다.
그러자 단단했던 지축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주위의 균형을 어그러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지축을 뒤흔들어 장막을 무너뜨릴 속셈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짝!
“바다의 은혜!”
장막이 무너지기 전, 헨리는 재빨리 합장하며 바닷물을 소환했다.
그리고 동시에 철의 장막을 끊임없이 뽑아냈다.
쿠구구구구!
높아지는 철의 장막 안으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파도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에 발락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런!”
꼬르르륵!
장막은 솟아오르는데 물도 차오른다.
덕분에 땅 위에는 있어선 안 될 수압이 발생하며 발락의 힘을 저하시키기 시작했다.
“라이트.”
파밧!
바닷물은 꽤나 맑았다.
그래서 헨리는 물 아래에 깊숙이 잠겨 있을 발락을 구경하기 위해 빛을 만들었다.
장막은 여전히 솟아오르고 있었고 바닷물을 끊임없이 차올랐다.
이것은 오직, 난폭한 맹수를 길들이기 위해 헨리가 준비한 특설 무대였다.
‘기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결국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기사들이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은 간단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파괴력보다 더욱 더 강한 오러를 몸에 두르면 제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 할지라도 어찌 됐든 몸으로 때우며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헨리처럼 거리를 벌리고 여러 가지 마법을 조합해 압박을 가한다면 속수무책이었지만 말이다.
쾅……!
천지분쇄의 파괴 소리가 점점 더 옅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헨리는 그제야 수중감옥의 생성을 그만두었다.
엄청난 크기의 수중 감옥이었다.
그 높이는 대충 헤아려도 약 25미터 정도.
그러니 그 안에 든 바닷물의 양만 재어 보아도 그 무게가 상당히 어마어마했다.
“프로즌 밤.”
쉬이이익…….
“웃차!”
헨리는 이어서 손바닥 위로 조그마한 얼음 결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닷물이 가득 찬 타워 안으로 던져 넣었다.
퐁당!
바닷물 속으로 던져진 얼음 결정은 조그마한 크기 탓에 꽤나 귀여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결정이 던져지고 얼마 뒤.
쩌저저적!
타워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바닷물이 거짓말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캔슬.”
헨리는 이어서 철의 장막을 역소환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높이 솟아올라 있던 장막 전체가 한줌의 마력이 되어 헨리에게로 되돌아왔다.
타닥.
헨리는 지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얼음 기둥 안에 갇힌 발락 앞에 섰다.
“여전하네.”
얼어붙은 사나운 맹수를 본 헨리의 짧은 소감문이었다.
이어서 헨리는 마지막까지 검은 형벌을 휘두르려던 발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미약하긴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이지 않을 생각으로 산 채로 얼린 것이었으니까.
“흐음.”
일단은 산 채로 확보하는 데 성공하긴 했다.
처음엔 녀석을 붙잡아 대화나 시도해 볼까 싶었지만 충분히 냉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실거리는 살기를 내뿜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에 헨리는 클레버를 호출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일단 수납해 둬.”
“알겠습니다.”
헨리의 명령에 클레버가 체스트를 개방했다.
그리고 한입에 발락을 집어삼켰다.
꿀꺽!
물론 발락을 삼키긴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얼음 기둥의 일부를 삼킨 것이었다.
이에 헨리는 남은 얼음 기둥을 해동시킨 뒤, 클레버를 역소환했다.
“급한 불은 얼추 처리한 것 같고, 그럼 이제 남은 일은 헥터를 찾는 건데…….”
헥터는 발이 없다.
육체를 잃었으니 영체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걸음 형상을 통한 추적이 불가능했다.
이에 헨리는 골치 아픔에 머리를 짚었다.
“음…….”
헨리는 생각했다.
헥터는 분명히 귀한 인재였고 쓸 만한 장기 말이었다.
하지만 추적이 불가능한 영체를 추적하는데 들일 시간과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에 대한 가치를 비교해 보니.
“뭐,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헨리는 헥터를 믿기로 했다.
헥터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분명히 훨씬 더 똑똑한 친구일 테니까.
“텔레포트.”
볼일을 마친 헨리가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군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이니아 제국에서 파견한 사냥꾼들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사냥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런 무자비한 사냥을 일삼기 전에 꼭 한번쯤은 아이니아 제국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한다는, 그런 종류의 소문을 말이다.
처음엔 대부분이 믿지 않았다.
하지만 피난민의 행렬들을 기습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군벌들이 피난민들을 호위하는 군벌과 맞닥뜨릴 때마다 그 소문은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이에 군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아이니아 제국군에 입대하자는 의견과 새로운 제국군이 될 바에는 차라리 용병이 되자는 의견으로 말이다.
용병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이유는 간단했다.
두 번 다시 군법 속에 갇혀 사는 고리타분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국군에 입대한 자들 중에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입대한 이들이나, 죄를 저질러 수용국에 가는 것 대신 대체 복무를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이에 판단을 마친 군벌들은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군벌들은 발락의 제안대로 하이랜더 지방으로 이동하는가 하면, 어떤 군벌들은 그러한 군벌들과 합류해 동반입대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함께 호위하였다.
그리고 용병이 되고자 하는 군벌들은 더 이상의 약탈을 멈추고 대부분이 비발디 타운이나 용병들의 도시, 페이실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과연, 헨리 님의 말씀대로군.”
그리고 지금.
비발디 타운의 시장, 벤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들어오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며 헨리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 번 감탄하였다.
‘곧 피난민들을 포함해 전 제국의 군인이었던 놈들이나 각지의 용병들이 자유도시로 몰려올 거야. 그러면 넌 적당한 때가 됐을 때 본격적으로 도시군을 모집해.’
전쟁도 결국 사람들의 싸움이다.
물론 헨리나 발락 같은 일당백 이상의 인재가 있다면 전쟁의 방향이 크게 좌지우지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전쟁의 주된 싸움을 행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보통의 보병들이었다.
이에 헨리가 원하는 바는 간단했다.
징병과 전쟁의 두려움을 피해 자유도시로 오는 이들에게 안전함과 의식주를 약속할 테니 그들을 도시군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강압적인 권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징병제와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그들 스스로가 심리적 궁지에 몰려 자발적으로 도시군에 입대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징병되는 것과 스스로 입대하는 것에는 마음가짐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심리적 궁지에 몰려 비발디 타운으로 출입하길 희망하는 인파가 폭주하는 지금이 바로 도시군을 형성할 적절한 시기인 셈이었다.
벤트는 새로운 출입자들의 서류와 통계 그래프를 확인한 뒤, 공무원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부르셨습니까, 시장님.”
“어, 그래. 다들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맡은 일을 끝까지 행해 주어 고맙게들 생각하고 있네.”
“아닙니다.”
벤트는 권위적인 시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더더욱 권위적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공무원들이라고 불안한 대륙의 정세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어서 벤트가 말했다.
“내가 오늘 자네들을 부른 까닭은 오늘부터 도시에 출입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비발디 타운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할 도시군의 모집을 실시할까 싶어서 그러네.”
“도시군이라면…… 군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제국이 멸망한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우리도 아이니아 제국에 편입되어 강제로 징병당할 것만 같거든.”
“하지만 시장님, 도시군을 조직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예산도 필요하고, 그들을 통제할 만한 지휘 체계나 관련된 경험이 있는 인재들도 대거 필요합니다.”
“알고 있네.”
“예?”
“며칠 전, 제국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네들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그 급료, 누가 주었다고 생각하나?”
“……?”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제아무리 큰 상단의 상단주들도 월급날만 되면 입안이 바짝 마르기 마련이다.
한 번에 빠져나가는 돈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제국도 멸망한 마당에 대체 무슨 돈으로 자신들에게 급료를 지급한 것일까?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도시군을 발판으로 그 어떤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는 하나의 독립국으로 거듭날 생각이네.”
“예……?”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공무원들은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벤트의 다음 말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네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아네. 그래서 모셨지. 그럼, 이제 나와 주시겠습니까?”
벤트가 누군가를 호출했다.
그러자 공무원들의 시선이 벤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일제히 쏠렸다.
그리고…….
“……!”
“저, 저분은?”
시선을 쏟아내는 공무원들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전 제국의 마탑장, 로어 길리언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씨익.
공무원들의 반응을 본 벤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