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04화 (204/522)

# 204

꼬리잡기 (5)

대낮.

칼리번 요새는 의무 복무 기간을 채우지 않으면 제아무리 장교라 할지라도 요새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밀턴이 쫓겨난 지금, 여전히 칼리번 요새는 마물의 숲을 견제하며 특수군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사령관님.”

“뭐가?”

“저를 잡아 주신 것 말입니다.”

“잡아 주긴 뭘 잡아 줘? 결국 선택은 네놈이 한 거지.”

그리고 지금.

사령관실에는 세 명의 남자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니첼과 이셀란, 그리고 포람의 성을 버린 로난까지 말이다.

세 사람은 헤밀턴이 떠난 이후, 이셀란의 주도 하에 대낮부터 술병 마개를 열었다.

이에 니첼 사령관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셈이야? 헤밀턴의 말이 사실이라면 군부 상인들도 전부 도망쳤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얼마 전에 전체 보급을 받아 둬서 한동안 버틸 수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마저도 보름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로난 또한 짐짓 요새의 안녕을 걱정했다.

그도 그런 것이 칼리번 요새는 순전히 제국의 원조로 유지되는 특수군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벌컥, 벌컥!

두 사람의 한탄이 끝날 무렵, 이셀란이 눈앞에 놓인 위스키 병을 집어 입안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병을 반쯤 비웠을 때쯤, 이셀란이 큰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술병을 올린 후 걸쭉하게 트림을 해 보였다.

“꺼어억!”

거친 술고래다운 행동이었다.

이에 로난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셀란을 불렀다.

“부, 부사령관님?”

“다들 걱정도 팔자군.”

“예?”

“뭐?”

“이 내가 그 정도 비책도 없이 술이나 까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뭐…… 나도 장담은 못하지만 제국도 하루아침에 무너진 마당에 우리도 한번 천운을 믿어 보도록 하죠.”

이셀란은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들만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말의 끝에, 이셀란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니첼이 물었다.

“그게 뭔가?”

“저희 칼리번 요새를 구원해 줄 종이입니다.”

“종이?”

“일단 한번 보시죠.”

말을 마친 이셀란은 그것을 부욱 찢었다.

그러자 이셀란의 눈앞에 요정의 날개 가루 같은 새하얀 광휘의 잔재들이 허공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로난은 눈앞에 일어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헤, 헨리?”

“어, 뭐야? 너도 있었냐?”

광휘의 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길?”

“아…… 부사령관님, 일부러 이러신 겁니까?”

“시끄럽고 앉기나 해.”

갑작스러운 소환.

이에 니첼과 로난은 경악했고, 헨리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이셀란은 그들 사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스럽게 술병을 집어 들었다.

* * *

호출권.

헨리가 발명한 아티팩트이자, 환생한 직후 헨리가 가장 많이 애용하는 아티팩트.

헨리는 여분의 마력이 많아지면서 텔레포트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진 후로 이 호출권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대량으로 발부해 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헨리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나 변수가 생긴다면 자신이 직접 그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헨리는 호출권을 통해 대부분의 변수들을 가볍게 해결해 왔다.

그리고 지금 헨리는 저번 거래에서 이셀란에게 주었던 호출권의 호출을 보고 곧바로 칼리번 요새로 텔레포트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셀란뿐만이 아닌 사령관 니첼과 자신의 동기, 로난까지 모두가 한자리에서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가 이셀란이 주는 술잔을 받아 들자 로난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헨리의 이름을 불렀다.

“헨리!”

“왜?”

“너 대체 뭐야? 방금 전에 그거, 텔레포트 아냐? 설마 너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쓴 거야?”

“아니, 텔레포트가 맞아.”

“뭐?”

어차피 제국이 멸망하고 아이젠도 죽었다.

그리고 아서스는 새로운 제국을 건국했고 연합국도 형성된 마당에, 이제 와서 허둥대며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잠자코 술을 따라 주던 이셀란이 놀란 어투로 물었다.

“뭐? 스크롤이 아니라 텔레포트라고?”

“그렇습니다.”

주르륵…….

“술 넘칩니다, 부사령관님.”

당연히 텔레포트 스크롤인 줄 알았건만 태연자약하게 보통의 텔레포트라고 고백하자 이셀란 또한 크게 놀라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곁에 있던 니첼 사령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헨리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들을 충분히 납득시키려면 한동안 입 아프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부한 자신의 사연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헨리가 먼저 용건을 묻기로 했다.

“제 사연은 이따가 알려 드리면 될 것 같고…… 그나저나 부사령관님은 어인 일이십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호출하라고 드린 호출권이긴 한데 말이죠.”

사실 이셀란이 자신을 호출한 것에 대해선 얼추 짐작이 갔다.

제국이 무너졌으니 당연히 제국에게 보급을 의존해 오던 칼리번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험을 감지한 군부 상인들까지 연락을 끊고 잠적했을 게 뻔했다.

그러니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보급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오면 자연스럽게 나를 떠올리게 되겠지.’

헨리의 예상대로였다.

생각지도 못한 악재가 줄줄이 겹치자 이셀란은 와일드카드로 헨리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셀란의 연줄 중에 친분이 두터우며 황실에 뒷배를 잡고 있는 이는 헨리가 유일했으니까.

헨리의 물음에 이셀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석궁 같은 눈빛을 내뿜으며 헨리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이거…… 시미치도 못 떼겠군.’

저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눈빛이었다.

물론 이셀란이 헨리의 사정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셀란이 꿰고 있다는 것은 지금 헨리가 이셀란을 상대로 너스레를 떨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꿰뚫음을 의미했다.

“네놈, 다 알면서도 물으면 좋으냐?”

“뭐가 말입니까?”

“이야기는 들었다, 킹턴의 아들놈이 와서 주절주절 떠들다 갔거든!”

“킹턴의 아들이라면…… 헤밀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놈이 여긴 왜 온 겁니까? 설마 아서스가 귀화를 권유하던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귀화를 권유받긴 했지만 정식으로 권유를 받은 건 여기 있는 로난뿐이었다.”

“근데 로난이 거절했군요.”

“그래. 킹턴 그놈이 로난을 자기 출셋길로 사용하려 했거든.”

“그럼 로난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돼? 우리랑 같은 신세가 됐지.”

우리랑 같은 신세.

지킬 나라가 없는 군인들이란 그저 장비 좋은 비적 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난은 같은 신세라는 말이 퍽 듣기가 좋아 가볍게 쿡쿡 웃었다.

“이제 귀족도 아닌 놈이, 좋다고 실실 웃기는…….”

그리고 헨리 또한 로난의 판단이 마음에 들어 얄궂게 한마디 해 주었다.

“아무튼 이제부턴 꽤나 진지한 얘기가 될 테니 귀담아들어라.”

“예.”

인사치레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어서 이셀란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우선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아이젠 그놈은 어떻게 됐지?”

“죽었습니다.”

“그래, 당연히 아서스 밑으로…… 뭐라고? 죽었다고?”

“예, 영지전 중에 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처리한 것이긴 합니다만.”

“이런……!”

이셀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헨리가 쥐고 있는 아이젠의 연줄을 통해 어떻게든 요새에 보급선을 구축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헨리의 발언에 이셀란이 말했다.

“……망했군.”

“무엇이 말입니까?”

“난 너만 믿고 있었거든. 근데 네가 그 아이젠을 죽였으니 우리 요새는 이제 어디서 보급을 받는단 말이냐? 그렇다고 마물의 숲을 내팽개칠 수도 없고 말이다.”

이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마물의 숲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곧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에게 대륙을 내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그런 문제로……. 그 문제,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네놈이 어떻게?”

“아서스 밑으로 들어가긴 싫고 하지만 보급은 필요하니, 그렇다면 당당하게 아서스에게 보급을 요구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미친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아서스에게서 보급을 받아 낼 수 있는지,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헨리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헨리가 아무리 연합국을 형성하고 저택 가득히 물자들을 쌓아 놓았다고 한들, 그것들은 순전히 ‘협약을 맺은 자유도시’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그 물자들을 요새에 내주게 된다면 계획해 두었던 다른 일들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윽고 헨리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우선 니첼 사령관님께서 대표로 황제가 된 아서스를 만나십시오.”

“내가?”

“예, 그리고 당당하게 보급품을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끝입니다.”

“……?”

설명이 끝났을 때, 세 사람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혐오스러움이 일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정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아서스의 목적은 대륙을 장악하는 것. 게다가 듣기로는 급변하는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세율도 20%나 낮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재가 부족하여 로난을 십검으로 등용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 칼리번을 비롯한 다른 특수군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다면 대륙은 분명히 마물들이 들끓게 되어 혼란이 닥칠 것입니다.”

“그렇겠지.”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대륙 전체가 마물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들을 토벌할 사람은 과연 누구겠습니까?”

“……아!”

대륙 정벌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아서스가 괘씸하다는 이유로 칼리번을 방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서스에겐 골칫거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아서스는 민심과 쓸데없는 낭비를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칼리번 요새에 보급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서스는 새로운 칼리번을 조직해 뒤늦게 마물의 숲을 견제해야 될 텐데, 그것만큼 쓸데없는 낭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급을 조건으로 아서스가 아이니아군에 귀속되라고 하면 어떡할 건데?”

“굳이 귀속될 필요가 있습니까? 거절하십시오. 어차피 나라가 망한 판국에 과한 요구만 하지 않는다면 아서스도 어쩔 수 없이 물자를 내줄 겁니다. 그러는 편이 자기한테 훨씬 이득이라는 걸 알 테니까요.”

“과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헤밀턴이 무례하게 분위기를 잡치고 가서 그렇지, 헨리의 말은 지저분한 명분과 조건들을 관철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경솔했군.”

그리고 니첼과 이셀란은 자신들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가장 중요한 보급 문제를 해결했군. 그럼 이제 슬슬 너에 대해서 한번 들어 볼까?”

가장 급한 문제이자 큰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자 긴장이 한시름 풀리면서 드디어 여유 있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세 사람은 축배를 들 겸하여 헨리의 이야기를 안주거리 삼기로 했다.

그러자 헨리가 무덤덤한 척, 숨김없이 자신의 비밀을 모두 드러내려던 찰나…….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셀란 이 양반, 내 아버지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

비밀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헨리의 숨겨진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하기엔 이셀란과 자신의 아버지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을 깜빡하고 있었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를 위해 영지에서 출가한 지 몇 년.

헨리는 그제야 동쪽 끝자락에 있는 자신의 고향, 모리스 영지의 존재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