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결투 (4)
‘잘하고 있겠지, 그 녀석?’
평야의 우측에 위치한 테헤른 고지.
고지는 높은 언덕을 뜻하는 말로 예로부터 고지를 점령하는 자가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헨리가 이 테헤른 고지를 맡은 이유이기도 했다.
평야에는 세 명의 천부장과 삼천의 군사, 그리고 아이젠을 보냈다.
그리고 좌측에는 천오백의 군사와 캄사디아라는 무장을 보냈다.
그렇다면 보급병을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은 고작해야 삼백.
이것 때문에 전략 회의 당시, 몇몇의 천부장들이 불만을 표시했다.
왜 머릿수 싸움이 중요한 고지전에 더 많은 병사를 배치하지 않고, 협곡 수비 따위에 천오백이나 되는 군사들을 배치했느냐가 그 이유였다.
이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불만이었다.
게다가 헨리는 미리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악취 나는 수렁 스크롤까지 쥐여 줘 가며 협곡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들을 밀집시켰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계산된 행동이었다.
헨리가 캄사디아에게 많은 병사를 내준 까닭은 협곡에서 적군의 발목을 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바로 아이젠의 눈을 피해 아군을 학살하기 위함이었다.
‘평야 전투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아이젠이 없는 협곡전이나 고지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마음 같아선 고지전을 혼자 치르고 나머지 병력 모두를 협곡에 밀집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남은 병력까지 모두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헨리 혼자서 고지를 막겠다는 것은 아무리 헨리의 신뢰도가 깊어도 도저히 아이젠과 천부장들을 설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한 명의 천부장과 이백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협곡으로 밀집시켰다.
헨리는 헥터를 믿었다.
그 골든 잭슨마저 무릎 꿇렸던 위대한 헥터 마이어의 검술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거대한 흑갑옷.
그리고 제국 십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오러의 소유자인 헥터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헥터에게 협곡에서의 학살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럼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헨리는 이백의 병사들을 오로지 기마병들로 구성했다.
그런 다음 그 누구보다 빨리 테헤른 고지에 도착해 천부장과 병사들을 한데 끌어모아 주목시켰다.
“모두들 주목.”
“주목!”
말에서 내린 이백의 병사들.
병사들의 눈에는 다른 곳으로 보내진 병사들보다 몇십 배에 해당하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단지 기마병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데리고 고지로 끌려온 게 바로 자신들이었으니까.
이는 누가 봐도 비참하고 가련한 운명이었다.
‘녀석들, 겁먹었나 보군…….’
물론 헨리는 병사들의 그러한 불안함을 진즉에 눈치챘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나면 자신들이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윽고 헨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우린 현재의 인원으로 다섯 배에 달하는 적군을 막아 낸다.”
“…….”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온 천부장, 나다스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천부장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이에 나다스만이 물었다.
“마땅한 묘책이라도 있습니까?”
“있지.”
“예?”
생각지도 못한 대답.
이에 헨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괴물을 이용한다.”
“괴물…… 말입니까?”
“그래.”
그때였다.
-크롸라라라라!
쿵! 쿵!
“으아아악!”
“도, 도망쳐!”
고지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
그것은 이더웨더군의 비명였다.
* * *
‘방향은 모두 세 군데. 아이젠 녀석, 분명히 백병전에 자신감을 보일 테니 평야로 병력을 집중시키겠지.’
이더웨더군의 전략 회의.
알프레드는 아이젠이 기사 출신인 만큼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백병전에 온 힘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데리고 온 오천의 병사들 중 보병 삼천을 평야 전투에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이천의 병사들 중 천오백에 달하는 정령사들을 모두 ‘고지전’에 사용키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만큼이나 화려한 정령술을 활용하기엔 좁은 협곡보다 드넓은 고지가 훨씬 더 나았으니까.
알프레드는 천오백 정령사의 화력을 이용해 단숨에 고지를 뚫어 버린 후, 평야에 몰린 쇼난군의 배후를 칠 생각이었다.
‘이 싸움은 나의 승리다!’
이에 알프레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비록 진화의 알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화의 알은 그저 아이젠을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한 장치였을 뿐.
게다가 고지 쪽에는 천오백의 정령사 이외에도 천부장 자격으로 상급 정령사를 둘이나 보내 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드라칸에 의해 새롭게 팔이 돋아 난 자신의 장남, 왈레드이다.
‘지금의 왈레드라면 확실히 믿을 만하다.’
왈레드는 새 팔을 얻고 지옥에서 다시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분노로 불타오르는 왈레드가 이번 전투에 참여한 이상, 고지전에서의 패배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말을 타고 선봉에 선 왈레드가 나지막이 날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온몸을 주물렀으나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이 상쾌했다.
이에 왈레드는 쥐고 있던 고삐를 양손으로 더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느낌이 좋아.’
드라칸의 제안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인생 중 감히 최고의 행운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팔을 날려 먹은 이후, 왈레드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팔이 사라진 허전함.
그리고 병신이 되었다는 자괴감.
그 덕분에 왈레드의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들어가 지하를 헤집어 놓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드라칸이 자신을 구원하러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제국에서 금지시킨 인체 연성술을 자신에게 사용한다는 사실이 뭔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왈레드는 이렇게 살 바에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생각으로 두 눈 딱 감고 드라칸의 제안에 응하였다.
그는 수술이 끝난 직후 다시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다시 돋아난 자신의 팔을 보고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줄로만 알았다.
‘팔뿐만이 아니야. 새 팔을 얻은 직후 내 정령술은 한 단계 더 진화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확실히 왈레드는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더 농밀해진 데다가 몸속에서 순환하는 마력량이 한층 더 불어났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증거로 지금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상급 정령사, 에드와두와의 정령 대련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내가 에드와두를 이기다니…….’
같은 상급 정령사에 알프레드의 핏줄을 타고 났지만, 분명히 에드와두는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령사였다.
그런데 드라칸의 인체 연성술 이후 그 에드와두를 앞지르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에 자신감이 붙은 왈레드는 배정된 천오백 정령사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 더더욱 목소리를 드높였다.
“더 빨리 달려라! 이럇!”
왈레드군은 곧 고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된단 말이지?’
고지는 마치 마룡의 등짝을 떠올리게 할 만큼 높고 길쭉했다.
그리고 저 능선을 넘기만 한다면 이번 영지전은 아버지의 승리가 될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전투에서 일등 공신이 될 테고 말이지.’
이에 왈레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이 뜬 해.
지금보다 그림자가 조금만 더 길어지면 곧바로 전투를 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척후병.”
“옛!”
“가서 상황을 보고 와.”
“옛!”
천오백 군사가 모두 정령사로 이루어져 있으니 척후병 또한 당연히 정령을 다룰 줄 안다.
척후병은 기척을 지우기에 용이한 대지의 중급 정령사였다.
그렇게 한참 후, 기척을 지우고 몰래 고지를 오르던 정령사는 얼마 뒤 기척을 지우는 것도 깜빡한 채 숨을 헐떡이며 왈레드에게 뛰어왔다.
“와, 왈레드 님!”
“뭐야, 무슨 일이야?”
척후병의 표정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이에 왈레드와 에드와두 또한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척후병을 종용했다.
이에 척후병이 말했다.
“아, 알을 발견했습니다!”
“알?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좀 설명해 봐.”
“정령의 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고지로 향하는 정상 부근에서 말입니다!”
“뭐라고?”
정령의 알.
정령은 정령계가 아닌 인간계의 자연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 태어날 때도 있고 모체가 되는 상급 정령이 넘쳐 나는 힘을 배분하기 위해 낳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간에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정령의 알을 획득한 정령사는 가진 정신력과 관계없이 추가로 정령을 더 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왈레드와 에드와두는 꼴깍 침을 삼켰다.
척후병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고지로 달려가 정령의 알을 가지고 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와두는 선뜻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알프레드의 사병대, 이더웨더군에 소속된 정령사.
감히 가주의 아들을 옆에 두고서 정령의 알 같은 진귀한 보물에 욕심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왈레드 또한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눈빛에 탐욕을 번뜩이며 척후병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당장 그리로 안내해라! 아직 전투가 시작되려면 멀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회수해 와야만 한다!”
“예엣!”
“그리고 너!”
“예, 옛?”
“너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로 큰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왈레드 님!”
왈레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만약 척후병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 또한 아버지와 같은 ‘더블’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에 왈레드는 소수의 수색대를 추려 서둘러 척후병을 따라 정령의 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정말로 ‘정령의 알’이 운석처럼 고지 정상 부근에 박혀 있었다.
‘정말이다!’
정령사로 꾸려진 수색대 전원은 운석처럼 박힌 알을 보자마자 그것이 강력한 정령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에 왈레드의 입이 점점 더 귓가에 걸리기 시작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들어 올리지 않고서?”
“예엣!”
정령의 알은 마치 다 큰 돼지만큼 거대했다.
그러니 크기만 놓고 봐도 최소한 상급 정령은 될 터.
이에 알프레드가 침을 질질 흘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수색대원 전원이 정령의 알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피이잉!
“음?”
알 표면에 손을 갖다 댄 순간, 알 표면에 새하얀 섬광이 맺히며 광명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면으로부터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뭐, 뭐야!”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물의 상급 정령사, 에드와두가 재빨리 아쿠아 실드를 전개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쿠아 실드를 전개하면서 폭발을 고스란히 받아 낸 에드와두는 그 엄청난 대미지에 그만 각혈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쿨럭!”
“에드와두!”
에드와두가 내상을 입을 정도의 폭발이라니?
저것은 분명히 부화하기 전의 알이 아니었던가?
이에 왈레드는 배운 지식들을 총 동원해 왜 저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쩌적, 쩌저적…….
파삭!
거대한 폭발로 생겨난 뿌연 흙먼지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어?”
실루엣은 자꾸만 커져 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거대해져 가던 실루엣이 먼지 속에 숨겼던 모습을 흩어지는 흙먼지 위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드, 드래곤?”
-크허허어어엉!
고맞을 찢어 놓을 듯한 강렬한 포효.
그것은 흡사 드래곤, 그것도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전설 속의 블랙 드래곤을 연상케 했다.
-크허어어엉!
다시 한 번 울부짖은 드래곤.
드래곤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지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릉!
드래곤의 시야에 왈레드의 수색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천오백의 정령사들이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롸롸라라라라!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이에 드래곤을 올려다보던 정령사들 모두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도, 도망쳐!”
드래곤의 고함에 허둥지둥 도망치는 정령사들.
이에 헨리는 고지 너머에서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깨어났군.’
자신의 단잠을 깨워 심기가 불편한, 엘라곤의 끔찍한 투정소리를 말이다.